- 김영하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리뷰


『오빠가 돌아왔다』는 김영하의 단편 8편을 묶은 책입니다.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이고, 김영하는 이미 한국 문단을 이끄는 주역 중의 한 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김영하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2010년도 가을입니다.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은 문학의 유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분히 시간의 유한성 때문이랍니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부지런히 읽어오기도 했지만, 항상 읽을 책들은 제가 독서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을 압도해 버립니다. 희망 독서 리스트를 들여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시간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유한함이지요.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기에는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런 유한성이 있기에 시간을 효과적으로 경영하는 맛이 있기에 도전적이기도 합니다.

8개의 단편을 읽고 간단히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 은 저의 영감을 자극한 정도를 표시한 것입니다. 재미를 표시한 것은 아닙니다. 김영하의 단편은 거의 모두 나를 즐겁게 했으니까요. 간혹, 이게 뭐야? 하는 의문이 든 단편이 있었지만 재미는 있었습니다. 의문이 든 작품에는 별표를 달지 않았고, (나의 가용 시간이 많지 않아) 리뷰도 생략했습니다. 별표의 숫자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점을 오빠가 돌아왔다의 리뷰에서 누나와의 전화 통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혀 두었습니다.


오빠가 돌아왔다 (이하, 오빠) ★
첫인상이 불편했다. 이를 테면 이런 문장들이 그랬다. "(아빠가) 가끔 저렇게 오빠한테 개기다가 두들겨 맞는 걸 보면 정말 구제불능이다. 개도 몇 대 맞으면 꼬리를 내린다는데 저 아빠라는 인간은 똥개보다도 지능지수가 낮은 게 아닐까 가끔 의심스럽다."(p.10)
소설은 재밌었지만, 책에 실린 8편의 단편 중 별표 순위로는 6위였다. 한편, 오빠를 함께 읽기로 한 동네 누나는 오빠를 제일 재밌는 단편으로 꼽았었다. 내겐 6위였는데, 누나에게는 가장 와 닿았던 작품이라니! 전화를 걸었다. 내가 불편했던 문장을 읽어 주었더니, 누나는 이 문장보다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이하 엘리베이터)>의 주인공을 보며 더 답답했단다. 하하!  <엘리베이터>는 내가 가장 유쾌하게 읽었던 작품인데! 기분이 묘하다. 나에겐 가장 유쾌했던 작품을 누나는 가장 답답하다 하시니, 이건 뭘까? 하는 즐거운 의문이 들었다. 모든 독자의 마음에 가서 닿을 수 있는 김영하의 힘인가! 놀라울 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의 다양성에서 온 삶의 신비인가!

참고로, 누나는 돌아온 엄마의 심정을 깊이 공감했다. 여자를 데리고 들어 온 스무살 아들, 중학생 딸의 어미 노릇을 하러 들어 온 모습에서 뭉클함을 느꼈단다. 나는 이 책으로 독서토론회를 한 적이 있는데, 오빠를 좋았다고 꼽았던 이들도 서로 다른 이유로 좋아했다. 그 중에 중년 부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누나의 이유를 듣고 새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경험이 책의 해석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사 ★★
먼저 밝혀 둘 것이 있다. 나는 이사 임박자다. 이사할 집을 구하기 위해 올해 봄부터 수원 조원동, 송파구 송현동과 석촌동의 여러 집을 살펴보았다. 인천 삼산동과 남양주 진접지구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8개월 전부터 이사를 준비해 왔는데도, 아직 이사 완료자가 아니라 이사 임박자다. 엄밀히 말하면, '임박'이라는 표현보다 '희망'이 어울릴 것이다. 아직 집을 구하지 못했으니까. 그렇다. 나는 어서 이사하고 싶다. 그런데 아직 못했다.
김영하의 단편 <이사>는 내가 왜 이사를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나는 책이 망가질까 봐, 혹은 책 한 박스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이 많은 책을 옮겨 달라고 인부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미안해서 수개월 동안 이사를 못하고 있는 게다. <이사>는 나의 개인적인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참 즐겁게 읽혔다. 하지만, 별 두 개를 주게 된 것은 즐거워서가 아니다. 2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사'라는 행위를 과연 왜 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 속에서 오직 분명한 한 가지는 그가 전날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잠들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사라 한다."(p,71) 
사람들은 왜 이사를 할까? 동물들도 이사를 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이사가 동물적 본성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뭘까? 이사라는 실존적인, 살아가면서 여러번 하게 될 필연적인 행위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 주어 고맙다.

2) 살의를 느낀 진수가 별표의 두 번째 이유다. <이사> 주인공 진수는 '여간해서 언성을 높이지 않는' 얌전한 사람이다. 진수 집에 들이닥친(!) 인부는 그런 진수가 큰 소리를 치게 할 정도로 거칠고 무례한 사람이었다. 진수는 시종일관 한 두 번 큰소리를 칠 뿐 이사가 끝날 때까지 내내 침착한 편이었고, 인내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진수는 그 무례한 인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두어 번 느꼈다. 물론 일시적인 충동이고 살의보다는 분노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반복적이긴 했다. "노란 조끼가 장롱을 들여놓다가 새로 깐 장판을 세 군데나 찢어 놓았을 때 진수는 다시금 새로운 살의를 느꼈다." (p.66) 나는 아버지를 용서한 이후로 '살의'를 느낀 적이 없다. 간혹 때려주고 싶다는 충동은 있었지만,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시적인 살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새삼 일깨워준 것이 있었으니, 영화 <공공의 적>이 그랬고, 김영하의 소설이 그랬다. 고마운 일이다. 나는 세상을 보다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으니까. 내가 원하지 않는 대목을 걷어내며 이해한 세상은, 온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해 방식은 진짜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보물선 ★
386세대의 대학 생활을 묘사한 대목으로 시작되는 <보물선>은 첫 장부터 흡입력이 있었다. "그들은 '역사연구회'라는 별로 유서 깊지 않은 동아리에서 만났는데~ '역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p.75) 386세대 대학 동아리의 진실을 담은 묘사를 통해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소설은 형식과 재만의 삶을 다룬다. 형식은 진지하고, 순수하다. 그는 동아리의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진짜 역사를 공부했다. 졸업하더니 홀로 가두 투쟁을 했다. 그는 스스로 공부하여 얻은 신념대로 살았다. 하지만 현실의식이 빈약하여 그의 삶은 엉뚱한 방향, 이를 테면 이순신 장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온 것이라 믿고 동상 제거에 힘쓰며 살아간다. 형식은 어리석을 만큼 현실 인식이 빈약한 것이다. (언급했듯이 형식의 힘은 진지와 순수다).

재만은 돈의 흐름을 읽을 줄 알고, 기회가 있는 곳에 머무를 줄 안다. 게다가 돈의 흐름이 끊어지는 지점, 기회가 위기로 바뀌는 순간을 알기에 제때 빠질 줄도 안다. 재만은 '역사연구회'에서 은근슬쩍 빠져나가 실리를 찾았고, 사회에서도 잘 치고 잘 빠져서 주식 투자로 크게 성공한다. 성공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비리와 술수를 마다하지도 않는다. 비리와 술수가 기회와 돈을 안겨 준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재만의 힘은 영리함이다. (하지만, 영리함이 순수와 정의로부터 멀어질 때 영악함이 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 재만과 형식이 사회 생활을 하다가 만나는 대목부터 소설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형식은 여전히 진지하고 현실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듯 했다. 그는 보물선을 찾고 있었고, 보물선 사업에 투자할 투자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재만 일당을 만난다. 재만은 주식 투자, 정확하게는 몇 번의 작전주로 큰 돈을 벌고 있었다. 재만 일당은 보물선에는 관심이 없다. 형식은 보물선을 믿고 찾아나선 것이고, 재만은 그걸 재료로 한 작전을 하여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서로 힘을 합친다. 이 절묘한 협업으로 재만은 큰 돈을 벌지만 형식은 보물선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투자자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사회적 성공의 잣대로 보면 볼 때, 재만과 형식의 삶은 어떠한가? 인생의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또 어떤가? 재만과 형식 중 어느 한 사람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두 사람 모두 어느 한 가지를 결여하고 있다. 형식은 진지하고 순수하나 현실인식이 없고, 재만은 세상의 이치에 밝아 돈을 많이 벌지만 비도덕적이다. 두 사람의 좋은 면을 조화롭게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어리석지 않을 정도의 진지함, 영악하지 않은 영리함의 조화를!

소설은 세기 말의 코스닥 열풍과 작전주가 횡행했던 시절의 뒷 이야기를 잘 보여준다. 말로만 들었던 작전주에 얽힌 비화는 주식 관련 서적에서도 접하지 못한 흥미로운 읽을거리였다. 무엇보다 형식과 재만이 보여 준 대학에서의 모습과 사회에서의 모습이 일관적이어서 감탄하며 읽었다.

너의 의미 ★★
삼류 감독과 신인 소설가의 '못말리는' 사랑 이야기다. 이 러브 스토리의 방점은 '못.말.리.는'에 있다. 아무도 못말리는 두 사람의 닭살 애정 행각이 넘치는 러브 스토리가 아니다. 지나치게 순박한 20대 여인의 사랑이 못말릴 정도로 답답하다는 뜻이다. 남자는 38살, 무명의 영화감독으로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싶어하는 배우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속물이다. 배우와 섹스 한 번 했다고 '속물'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무자비하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어 판단하지는 않는다. 속물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조검을 조건을 갖췄다. 남자는 뮤직비디오 한 편을 여러 번 우려 먹는다. 그의 말이다.

"그 한 편 덕분에 벌써 세명의 배우지망생과 두 명의 모델들을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예쁜 여자가 좋다. 쓰레기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면전에서 하지만 않는다면."


이 남자 속물 맞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니 열받게도 순진하고 예쁜 신인 소설가가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이 열받음이 왠지 언제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영화 <연애의 목적>을 볼 때의 느낌이었다.) 속물을 사랑하게 된 여자의 나이는 스물 다섯, 예쁘고 착하다. 밝히는 그 남자가 예쁘다고 했으니 평균 이상의 외모일 것이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한다. 이렇게 순진한 여인이 저런 속물을 사랑하게 되다니! 열받는다. 아니, 어쩌면 순진하니까 속물을 사랑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남자의 속물스러움과 여자의 순진한 사랑을 잘 묘사해 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를 묻는 듯 했다. 제목도 '너의 의미'다.

여자가 쓴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은 사랑에 빠졌는데, 왜 하필 그 여자를 사랑하는지 끝내 납득하지 못했다. 심사평에 의하면, 이 신인의 소설은 "왜 하필 그 사람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고통"을 다룬 소설이란다.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왜 그 사람이냐고 합리적인 이유를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까?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점을 지닌 파트너에게 매력을 느꼈다가, 결혼하면 매력을 느꼈던 바로 그 점 때문에 힘들어한다. 이 순진한 여자 역시 자기와는 너무나 다른 속물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만약 그 남자와 결혼에 이르게 된다면, 힘들어지지 않을까? 그제서야 남자의 매력이 새로워서 동경한 것이지 매력의 실체를 몰랐던 것이라고 한탄하지 않을까?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너의 의미'의 두 남녀가 결혼하게 된 이야기를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기도 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 ★★
"인생을 살다가 발목 잡힐 일을 한 적 있어요?" 올해 초, 어느 중년 부인으로부터 받은 질문인데, <크리스마스 캐롤>을 읽고서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22살 때였나? 오락실에서 거대한 덩치의 깡패 같은 사내를 때리고 도망쳤던 일(그는 무례했고, 나는 그에 대한 정당한 응징을 한다고 시도한 일이다. 다행히도 잡히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독서실 친구들이랑 슈퍼마켓에서 미니초코파이 한 상자를 훔친 일, 헤어지는 여자 친구에게 험한 말을 했던 일 등이 떠오르지만, 이것은 발목 잡힐 정도는 아니다.

질문에서 말한 발목 잡힐 정도의 일은 사회적 지탄을 받을 정도의 잘못을 의미한 것이리라. 감옥에 갈 정도의 일이라면, 분명 발목 잡히는 일이 될 것이다. 감옥에 갈 일은 아니더라도, 친한 친구에게 말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라면 이 역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을 받았던 당시, 나는 답했다. "있지요."

<크리스마스 캐럴>은 발목 잡힐 만한 일을 저지른 세 남자의 이야기다. 발목 잡힐 일은 그 본질상 영원히 들통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허나, 소설 속의 세 남자는 동시에 들통의 위기 속에 처한다. 세 남자는 모두 가정을 가진 중년의 남자다. 젋었을 때, 그들은 진숙이라는 한 여자와 몸을 섞은 묘한 사이다. 당시 진숙은 조금 '띨한 걸레'였다. 욕망을 추스리기 힘들었던 20대 초반의 남자들에게 진숙은 좋은 상대였다.

소설은 세월이 흘러 잘 살고 있는 세 남자에게 진숙이 찾아오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뤘다. 사건이라 함은 십수 년이 지난 후, 독일에서 살던 진숙이 잠시 한국에 들어왔는데 살인을 당한 것이다. 진숙이 살인을 당한 날에 세 남자를 만났으니, 자연스럽게 세 명의 남자는 용의자 후보가 되었다. (누가 범인인지는 직접 읽어 보시길.)

남자들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발목 잡힐 만한 일'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소설 내내 그것이 발각될까 봐 불안해 한다. 그들은 진숙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가 없다. 살인 혐의를 벗어나기도 해야겠고, 젊은 날의 과오에 대한 죄의식을 떨쳐 버리기도 해야 했다. 여유 없기는 성적 충동이 강렬했던, 그래서 과오를 저질렀던 젊은 날의 모습과도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 온 진숙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십대 초반의 너희들은,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어차피 지나간 얘기잖아, 그래, 음, 똥 마려운 강아지들 같았어. 너희들은 남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없었어. 욕망에 허덕대는 스스로를 혐오하느라 다른 누군가를 동정하고 자시고 할 여력도 없었지. 개폼을 잡고 내 자취방에 기어들어와 십 분 만에 사정하고 도둑놈들처럼 기어나가면서 자기들이 무슨 게릴라나 된 줄들 알고 있었지."

이렇게 말하는 진숙에게, 세 남자는 살의를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진숙이 피살되었을 때, 모두 자기 손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나도 모르는 새에 칼질을 해댄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이런 죄의식을 다룬 소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하게 되었다.

진숙은 살해당하기 전, 세 남자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는데, 소설은 한 남자의 부인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찢어 버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카드는 쓰레기통에 들어갔지만, 음악이 내장된 칩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은 멈추지 않았다.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아내는 쓰레기통을 뒤져 음악칩을 찾아내 베란다 밖으로 던져 버린다. 하지만, 캐럴은 배터리가 소모될 때까지 끊임없이 울려퍼질 것이다. 발목 잡힐 일을 저지른 적이 있는 이들을 괴롭힐 음악이.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세 남자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갔다.
나에게도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갔었다.
그 순간이 생각나서 나는, 이 소설이 얼마간 무섭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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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