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을 읽는 기본지식

- 소포클레스 외 <그리스 비극 걸작선> 을 읽고


‘걸작선’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 비극을 엮은 책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2편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번역하신 천병희 선생은 옮긴이 서문에서 세 명의 작가를 이리 설명했습니다.

 

“위대한 창조자였던 이들 3대 비극작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지칠 줄 모르는 탐구심으로 그리스 정신을 가장 위대하게 구현해냈으며, 인류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그리스 비극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와 상상력을 길어 올린다.”

 

나는 인류에게 문화적 유산을 남긴 나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스를 공부하는 까닭입니다. 공부의 목표는 ‘그리스 정신’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제게는 그리스 비극을 읽어볼 이유가 충분한 셈입니다. 서사시와 비극 그리고 철학자들이 남긴 글들은 그리스 정신을 잘 살펴볼 수 있는 텃밭이니까요.

 

제가 그리스 비극을 진지하게만 접근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대에 가장 유행한 예술의 형태를 만난다는 즐거운 생각도 가졌으니까요. 무엇보다 그리스 인들이 펠로폰네소스와 같은 비극을 이겨낸 정신을 배우고 싶고요. 인생이 비극이더라도 명랑 정신을 가진다면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제 가설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와 노래, 춤과 웅변술 그리고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을 한데 묶은 종합예술로서 비극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거니와,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작품에 소재와 주제를 제공하는 살아있는 이슈로 우리 곁에 있다.” - 천병희

 

그리스 비극은 종합예술이었습니다. 20세기 초에 영화가 발명된 이후로 종합예술의 자리는 영화의 차지였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극이 종합예술이었습니다. ‘비극 = 종합예술’ 이라는 등식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 비극 읽기에 도움을 줍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이어가려는 이유입니다.

 

소설을 쓰는 현대의 작가들은 홀로 작업합니다.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더라도 결국 마지막 문장은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들의 손끝에서 마지막 작업이 이뤄지는 셈입니다. 현대에 접어들며 작가들이 고독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지요? 사실 이러한 ‘고독한 작가’의 모습은 근대 이후의 작가상입니다. 요컨대, 현대의 작가는 1인 예술 행위입니다.

 

반면 시나리오 작가는 다릅니다. 그들은 무대나 촬영현장에서도 함께하며 자신의 시나리오가 극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핍니다. 배우와 감독이 극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하고 토론합니다. 최종 결과물은 작가의 손끝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에서 결정됩니다. 음악과 조명 등도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를 종합예술이라 부르는 까닭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은 시나리오 작가에 가깝습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품을 책으로 출간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비극은 혼자만의 작업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집단 예술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드라마를 전공한 다섯 명의 교수가 함께 쓴 <드라마 사전>은 집단 예술로서의 그리스 비극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합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3월말에서 4월초까지 약 일주일 디오니소스 신을 축하하는 축제를 열었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상점은 휴업하고, 관청도 업무를 일시 중단했다. 외부로부터 사람들이 물려들어 아크로폴리스의 남동쪽 비탈에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비극의 상연을 중심으로 한 축제를 구경했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모든 주요 연극 관계자들이 퍼레이드를 펼치고 앞으로 있을 연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선전을 한다. 배와 비슷한 장식차에 탄 지위가 높은 사제가 첫날의 행렬을 이끌었고, 그 뒤를 화려한 춤과 볼거리가 줄을 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습니다. 최고의 순서이긴 했지만 축제의 유일한 프로그램은 아니었습니다. 배우와 합창단원들의 도움이 없으면 비극이 상연될 수도 없었겠지요. 이런 점에서 그리스의 비극은 종합예술인 것입니다. 비극이 그리스인들의 문화생활을 엿보는 키워드이기도 한 게지요,

 

저는 지금까지 개별 비극 작품의 내용보다는 종합예술로서의 비극을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데에는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비극이 공연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1) 그리스 비극은 폴리스의 모든 시민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종교적 의례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리스인 하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르고, 그들은 인본주의와 자유로운 정신을 지녔을 것 같지만, 비극을 만들고 관람했던 이들은 고대의 그리스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고대인이라는 점이 두 번째 특징을 불러옵니다.

 

2) 그리스 비극의 등장인물은 자유의지보다 구조와 형식에 매여 있습니다. 형식이 내용을 이끌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비극의 형식을 이해하면 내용을 파악하기가 수월해집니다. 비극은 음악, 춤, 합창이 곁들여졌고 대사는 노래처럼 말해졌으니 뮤지컬과 비슷한 셈이지요. 줄거리는 유명한 전설을 가져온 경우가 많아 시민들은 모두 극의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3) 그리스 비극에서는 코로스가 등장합니다. 코로스도 극을 이끌어가니, 코로스를 건너뛰어 읽으면 안 됩니다. 코로스의 역할은 다양합니다. 극의 바깥에서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고, 주인공과 대화하기도 합니다. 사건의 전개를 설명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형식적 이해가 비극 읽기를 돕기에,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은 비극을 읽기 전에 비극에 대한 해설서나 배경지식을 읽기를 권했습니다. 책을 읽으면 가장 좋지만, 저는 노파심에 책 읽을 시간이 없으실까 싶어 간략하게 기본지식을 정리해 본 것이고요. 이제는 그리스 비극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6편 중 한 편 만이라도.

 

그리스 비극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일례로, 프로이트가 주창한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빌어왔고, 반대적 의미를 가진 칼 융의 ‘엘렉트라 콤플렉스’ 역시 그리스 비극에서 따온 개념입니다. 오이디푸스 왕과 엘렉트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의 비극에 모두 등장합니다.

 

“초보 독자들은 3대 극작가를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아이스킬로스는 드라마의 신학교수로서 신과 그 신의 준엄한 판결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소포클레스는 드라마의 예술가로서 인간의 고통에 집중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드라마의 비평가로서 그리스의 전설을 그가 살았던 혼란스럽고 환멸스러운 시대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삼는다.” - 클리프턴 패디먼

 

<그리스 비극 걸작선>에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패디먼의 말처럼 <오이디푸스 왕>은 가장 뛰어난 인간이 맞게 되는 비참한 고통을 다뤘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그 운명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장엄하게 맞이합니다. 그러한 마지막 장면도 참으로 인상 깊지만, 저는 오이디푸스 왕이 고통을 초래하게 된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자기 인식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천병희 선생도 이런 해설을 덧붙였더군요. “이 비극은 인간의 인식 능력, 즉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스스로 저지른 행위들의 과정과 의미를 깨닫게 되며, 나아가 ‘어떻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응하는지를 다룬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 관하여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나는 책을 읽다가 430행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쯤되면 기이히 여길 만도 한데’라고 생각했지만, 오이디푸스 왕은 그때까지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이중의 무지’입니다. 모르면서도,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모르는.

 

<오이디푸스 왕>을 비롯한 6편의 비극을 담은 <그리스 비극 걸작선>은 그리스 정신이 무엇인지 궁금한 분들이나 그리스인들의 종합예술을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 유익한 선집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독일의 철학 거장 헤겔은 <안티고네>를 그리스 비극의 최고 걸작으로 꼽았습니다. 두 드라마는 모두 <걸작선>에 실려 있답니다.

 

- 요즘엔 걸작만을 소개하는, 조르바.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