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가는 자기 초상화를 그린다. 시인도 자화상을 쓰고 소설가는 자전적 이야기를 짓는다. 범인들도 어린 시절엔 일기장에, 성인이 되어서는 마음판에 자기 이야기를 쓴다. 두 가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알고 싶다는 욕망과 누군가에게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지만 이 글 <나의 초상>은 누군가에게 나를 홍보하기 위함은 아니다. 세 가지 목적으로 쓰는 글이다. 첫째는 나를 알아가기 위함이고 둘째는 알게 된 나를 경영하여 더욱 나를 즐기기 위함이다. 셋째는 인생이 흘러가면서 서서히 나의 목적을 실현해가기 위해서다.

 

2.

나는 유통업자이지 생산자가 아니다. 지식을 유통하는 사람이지, 새로운 이론과 지식을 창조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몫이다. 하지만 나는 눈이 밝은 유통업자다. 인생에 유익을 주는 지식을 선별할 줄 안다. 진짜와 가짜를 식별할 줄도 안다. 나는 인류 최고의 지성과 대중 사이에 매개체로 존재한다. 

 

또한 나는 정직한 유통업자다. 내가 전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정말 내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묻고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들만을 유통한다. 좋지 않은 생산물에 대해 따지고 들 때도 있느니 나는 비판적 유통업자다. 지배 이데올로기에서부터 나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나는 전달하고 실어 나른다. 그것의 공과를 따져 가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공부하는 유통업자다. 개념 정리와 지적 얼개를 짜면서 내가 무엇을 유통하는 사람인지를 연구하고, 유통하는 것의 정체를 공부한다. 이것은 생산업자로의 전환을 꿈꾸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유통업자가 되기 위함이다. 좋은 유통업자는 자신이 유통할 더 나은 것들을 찾고, 폭리를 취하지 않는다. 나도 그러고 싶다.

 

3.

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좋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허나 죽음은 삶의 마지막 과정으로 삶의 일부다. 나는 죽음을 인식하며 산다. 이 좋은 삶이 끝나는 게 싫기 때문이고, 언제든지 삶이 끝날 수 있음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아도 잊어버린다. 혹은 자신과는 먼 이야기라고 착각하거나 자신은 오랜 생을 살거라 서둘러 믿어버린다.

 

나는 그 착각, 망각, 자기기만이 잘 안 된다. 이것은 종종 무상함을 안긴다. 내가 자살할 만한 기질을 가졌구나, 하고 종종 생각하는 까닭이다. 나의 어두운 부분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어둡게 끝나지 않을 텐데,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을 끄집어내는 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어둠에서 꺼낸 빛은 더욱 건강하고 밝고 강인하다. 나도 그리될 거라 생각한다.

 

죽음의 개연성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인식은 내 삶에 곳곳에 어떠한 현상으로 드러난다. 나는 매년 연말이면 내 삶을 정돈한다. 유서 한 장을 쓰고, 갚아야 할 부채를 기록한 문서 파일을 업데이트 하여 금새 찾을 수 있는 노트북 폴더에 둔다. 그리고 집안을 정리정돈한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주방 정돈이 잘 되었더라고 친척들이 그랬다.)

 

일상을 살다가도 종종 살아있음에 감사해한다. 생과 사는 우주의 조화다. 남녀가 조화를 이루어 생명을 창조하듯, 생사에 대한 조화로운 인식이 지혜를 창조한다. 죽음을 깊이 인식하고 사는 이들이 생에 대해 느끼는 감사는 진하고 깊다. 죽음을 인식하며 살기의 또 하나의 유익은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주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4.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시절의 일은... 엄마가 나를 안고 그를 면회하러 간 일이다. 아마도 서너 살 즈음일 것이다. 그는 나의 혈연이라 추측되지만 어렴풋한 기억이라 확실치 않다.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와 내가 방문한 곳이 군대의 면회장인 줄로 알았지만, 언젠가부터 군대가 아닌 교도소의 면회장일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버지는 누군가와 싸우다가, 그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는 면회장에서 만난 그가 아버지와 싸웠던 사람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것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나의 기억과 직관일 뿐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고서 이런 추측을 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도, 인생 경영에도 무익한 일이기에 서른 두 살때 내 기억을 할머니께 슬쩍 확인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내 직관은 맞았다. 하지만 죽음으로 이르게 한 사고의 당사자는 확인치 못했다. 교도소 면회장에서 만났던 그라고 해도,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하게 불운한 사고였을 테니 원망은 없다. (내 안에 원망함이 없음이 신기하다. 사고의 전말을 몰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니, 내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였으니 누군가는 실형을 받게 되고,

가장의 사망은 아내와 아이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어떤 영향이었을까? 지금도 그 영향력은 유효한 걸까?

이것에 대한 답을 하나 둘씩 찾으면서 나의 자기이해도 조금씩 깊어질 것이다.

 

자기이해를 위해 과거사를 헤짚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고 싶진 않기에 서른 다섯이 될 때까지 혼자 간직해 온 나의 과거다. 이 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어서도 아니고, 갑자기 옛 일이 너무 궁금해서 적는 것도 아니다. 남들은 관심도 없을 가정사지만 내게는 중요하다. 누구나 유전자 뿐만 아니라, 가정 환경으로도 영향을 받으니까.

 

지금에서야 과거사를 정리하는 것은 내게 상처 없이 다룰 줄 아는 지혜가 생겼다고 믿기 때문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 둘씩 생략하면 정말 진솔함이 필요할 때에 나도 모르게 한발짝 물러나게 될까 봐 저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가정사의 모든 진실을 알게 되어도 여전히 잘 살아간다는 것을 고령의 할머니께 보여 주고 싶다.

 

5.

내게 맞이할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죽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아름다워지고 싶고 성장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내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선사한 이는 구본형 선생님이다. 그는 봄날의 벚꽃처럼 아름답게 피었다가 화사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말했다. 아름답게 떠나셨다고.

 

노년에 이르렀을 때, 내 곁에 있는 여인이 나를 참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두번째로 아름다운 장면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는 쉽다. 그들은 나의 일부분만을 보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이는 나의 많은 모습을 본다. 이왕이면 나의 다양한 모습을 본 이들이 나를 조금 알 때보다 나를 더욱 좋아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세상의 지각 있는 몇몇이 내 책을 참 괜찮은 책이라 평가해 준다면 이것은 내게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나는 평생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할 텐데 글쓰기에 대한 보상은 글쓰는 행위 자체다. 쓰면서 기쁨에 취하고 쓰면서 만족을 얻는다. 거기에다 누군가가 내게 진심어린 엽서나 메일을 보내준다면 그것은 행복한 보너스다. 보너스도 가득한 인생이 되기를 꿈꾼다.

 

6.

나는 4월의 따뜻한 햇살과 벚꽃을 좋아하고 10월의 시원한 바람과 맑은 하늘을 즐긴다. 4월과 10월은 내게 낭만의 계절이다. 4월이 잔인하다고 노래한 엘리엇의 시는 지금의 우리에겐 중요치 않다. 누구나 시대의 산물이고, 그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다르니까. 4월엔 봄의 기운이 만개하고 초록의 싱그러움이 대지를 감싼다. 나는 들로 가서 풀내음을 맡는다.

 

매년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들려올 때면, 10월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는 것이 나는 아쉽다. 10월의 옷자락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단풍을 쫓아 남도로 떠날 때도 있다. 한 번 즈음은 9월엔 강원도, 10월엔 경기도와 충청도, 11월엔 전라도와 제주도까지 쫓아가고 싶다. 하지만 일년내내 가을인 나라로 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 쾌락은 적응되니까.

 

프로야구도 나의 즐거움이다. 가을을 쫓아가는 열정만큼이나 프로야구 10개 구장을 쫓아다니고 싶다. 일생에 일년은 프로야구에 푸욱 빠져 지내고 싶을 정도다. 시즌권을 끊어 전국의 구장을 돌아다니며 대부분의 경기를 관람하기! 낮에는 여행을, 저녁엔 프로야구를!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다. 그러니 생각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7.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그녀가 말한 요지는 이렇다. 지난 만남에서 당신께 들었던 이야기는 매우 신선한 자극이 되었고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후 실행에 옮겨 이런저런 성과와 삶의 결실을 맺었다, 그래서 고맙다. 그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전화했다. 나는 이리 대답했다. 항상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행으로 옮기시네요. 훌륭합니다. 질투가 날 정도로요.

 

진심이었다. 부러웠고 질투가 났다. 나는 생각만 하는 사람이니까. 누군가를 생각하되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고, 무언가를 계획하되 실행은 굼뜨다. 내 삶이 엉망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의 1/10도 실행하지 못하며 산다. 생각의 속도로 실행하지는 못하겠지만, 생각과 실행의 격차가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기는 내게 정말 중요한 과제다.

 

8.

나는 가늘고 곱슬한 머릿칼을 가졌다. 고등학생 때엔 나의 헤어스타일을 부러워했던 친구들이 많았다. 내 짝과 뒤에 앉은 두 명이랑 나, 이렇게 넷이서 반에서 가장 헤어스타일이 멋진 친구를 뽑았는데 내가 3위인가에 꼽혔었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과거는 괜찮았지만 현재의 모습은 서글프다. 어느 순간 이후로 곱슬이 심해졌다. 고등학생 때에 빡빡이를 한 이후였던 것 같다. 머리를 빡빡 깍으면 머릿결이 달라지나? 모를 일이지만, 그 때 이후로 헤어 스타일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지금은 탈모가 진행 중이다.

 

나의 피부는 매우 부드럽다. 손은 말할 것도 없고 팔이나 배를 만져 본 이들은 모두들 놀란다. 애석하게도 얼굴 피부가 엉망이다. 삼십 대 중반인데도 여드름이 나곤 한다. 모공도 크다. 게다가 이마에 패인 가로 주름이 인상을 망쳐 놓는다. 얼굴과 목에는 점도 많다. 무슨 점이 이리도 많을까. 신가하게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콧날이 오똑하고 콧망울이 예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콧구멍이 크고 낮은 줄만 알았는데, 그나마 코라도 좀 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입술도 작고, 귀도 작고, 눈까지 작은 얼굴이니 말이다. 아랫입술은 조금 도터운 느낌이 들지만, 입술의 폭이 좁다. 눈이 작아도 보일 건 다 보인다는 것도 다행이다. 눈도 커지고 시력도 밝아지면 좋겠지만, 가진 것에 정 붙이며 사는 것도 인생의 재미라 생각한다.

 

키는 크다. 182cm나 되니, 만약에 키를 외모에 넣을 수 있다면 큰 키야말로 나의 경쟁우위일 것이다. 다리가 길다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해도 다리는 정말 길다. 키 큰 이들 중에도 다리가 아닌 허리가 긴 이들도 있는데 나는 다리가 길다. 정말 길기나 한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친구들과 목욕탕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 모두는 탕에 들어갔고, 친구들의 성기는 모두 물 속에 잠겼다. 185cm의 친구도 마찬가지였지만, 오직 내 성기만이 물 위로 드러났다. 우리가 숏다리라 놀리는 친구 녀석은 배꼽도 잠겨서, 우리는 마구 웃었다.

 

9.

돈도 충분히 있고 삶에 부족함이 없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누군가가 내게 물었던 질문이다. 나는 대답했다. 글을 쓰고 여행을 다닐 겁니다. 어떤 글이라고 되물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인데요. 대답을 하면서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돈을 벌어야 하기에 모든 순간을 하고 싶은 일에 바치지는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과 돈벌이를 상당 부분 일치시켜 놓았다. 참 잘 살아온 대목이다.

 

지금 주머니에 100만원이 생긴다면 어떻게 쓰고 싶어? 예전에 연인이 물었던 질문이다. 당시의 대답은 생각나지 않지만, 지금은 이렇게 답하고 싶다. 시간을 내어 자유롭고 여유롭게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아마 그때도 답변 목록에 여행이 포함됐을 것 같다.) 100만원이 한 번 더 생기면, 외숙모에게 용돈을 주고 싶다. 어서 두 개의 100만원을 만들어야겠다. 그리고 나의 바람대로 실행하고 싶다. 참 유익한 '100만원 짜리 질문'이다.

 

10.

 

 

행복을 누리는 순간, 와우 앞에서의 강연! 

모든 강연이 즐겁진 않다. 배우려는 열정과 의지가 가득한 청중들 앞에서 내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을 효과적으로 조근조근 전달하는 강연은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 강연을 진행할 때, 내 강점이 발휘되고 있음을 느낀다. 사진은 2013년 와우신년회에서 미니강연을 하는 모습이다. 내 앞에는 와우들이 있다. 강연을 해서가 아니라 와우들 앞에서 한 강연이라 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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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