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 준비도 일이다. 그것도 이중의 일이다. 숙박 예약, 동선 파악, 여행지 조사 등 여행 자체를 위한 준비도 해야 하고, 부재 중일 때를 대비한 일상의 업무도 몇 가지는 처리해 두어야 한다. 여행이 설레임과 함께 얼마간의 부담감으로도 다가오는 까닭이다.

 

12월 8일부터 22일까지의 미국 여행은 내게 설레임보다는 부담감이 컸다. 여행 직전의 일정이 다소 빡빡했고, 지난 9월에 벌어진 데이터 유실 사고의 후유증으로부터 이제 막 벗어나기 시작했기에 해야 할 업무도 많았다. 왜 이럴 때 여행을 떠나냐고? 내가 그 말이다.

 

나는 7월 이후, 줄곧 슬프거나 힘겨웠다. 여행이라도 떠나야지, 했던 때가 10월 초였다. 그때 계획한 여행이 이번 미국 여행이다. 계획된 일정을 피하다보니, 출발일이 12월 8일이 되었다. 문제는, 정작 12월이 되어서는 여행 없이도 일상을 살아갈 정도로는 내 마음이 회복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별안간에 여행을 떠나간 된 연유다. 두어달 간 미뤄두었던 업무를 열심히 해야 할 시점에 나는 한국을 떠났다. 나도 모르게 여행에 대한 설레임보다는 일상을 떠나는 아쉬움이 큰 것처럼 기술했는데, 사실이 그렇다. 아쉬움은 점점 사그러질 것이다. 나는 현재에 집중할 것이고, 여행이 곧 나의 현재가 될 테니까.

 

2.

지난 한 주는 바빴다. 특히 주말로 향하면서 극에 달했다. 금요일, 눈길을 뚫고 다녀온 전라도 광주에서의 강연 일정이 정점이었다. 새벽에 도착하여 잠시 눈을 붙인 후, 토요일에는 친척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받아야 했고 이어 유니컨 송년회도 참석했었다. 일요일에는 와우를 만났고, 월요일에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준비를 할 겨를이 없었다. 꼭 처리하고 떠나리라, 했던 업무마저 마치지 못했다. 월요일 마음 편지를 제대로 보내고 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행 준비는 뒷전이었다. '보보님 엄살 부리시네. 그래도 그간의 여행 노하우가 있는데 어느 정도는 했겠죠'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이다. 겨우 가방만 꾸려 집을 나섰다.

 

가방만 꾸렸다는 말은 정말이다. 옷가지와 여권, 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그저 떠났을 뿐이다. 여행지에 대한 지식과 예약된 일정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 하루의 숙소 예약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하루 이틀 정도는 예약하려고 했는데, 떠나기 직전까지 안과 방문, 마음편지 작성, 가방 꾸리기에 우선순위가 밀렸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부재를 위한 업무로 바빴고, 여행을 위한 준비는 집을 나서고서야 시작했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첫 이틀을 위한 숙소를 예약했고, 공항에 도착해서야 ESTA[각주:1]를 신청했다. 긴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일 처리하기'도 여행의 노하우라면, 그 덕은 좀 보았다.  

  

3. 

항공사 체크인을 하는 내게, 직원이 서두르라고 다그친다. "탑승 마감 시간이 5시 10분이예요. 뛰어가셔야 해요." 시계를 보니, 20분 남짓이 남았다. 체크인 마감 시간도 겨우 맞추었는데, 또 다시 마감의 압박이라니! 오늘 아침엔 마음편지를 마감하고 왔는데... 그건 내 사정이고, 늦게 와서 괜히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빨리 갈게요." 나는 걸음을 재촉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3번 출국장에 들어서니, 공항 검색대 앞에 늘어선 줄이 길었다. 3~4분을 기다리다가 '여기서 10분 이상을 소요하면 너무 빠듯한데' 하는 생각이 들어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직접 줄 선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란다. 

 

"실례하겠습니다. 탑승 시간이 빠듯해서요." 결국 이 말을 세 번 남발해야 했다. 사소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폐를 끼쳤다. 정신 없는 승객으로 비춰지지 않으려고 교양 있게 행동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쓴다고만 생각지 마시라. 나는 나답게 살면서도 배려, 교양, 양심을 잃고 싶지 않다. 

 

검색대는 무난히 통과했다. 금지된 물건을 기내에 들고 갈 이유는 없으니까. 출입국심사는 자동 등록을 한 덕분에 30초 만에 끝냈다. 이제 게이트로 이동하는 일만 남았다. 117번 게이트는 멀다. 탑승동까지 순환열차를 타야 하지만 10분이면 충분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5시가 되었다. 여유를 잃을 이유도 없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게이트에 도착하니 17시 09분이었다. 휴우, 하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제 정말 떠나는구나.' 비행기에 탑승하니 한국인 승무원이 맞아 주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날 델타 항공에는 2명의 한국인 승무원이 탑승했단다.) 일상으로부터의 떠남으로, 오랜만의 해외 여행이 시작되었다.  

 

  1. 비자면제프로그램. 미국 비자가 없는 이들이 미국으로 입국하기 위해 필참해야 함. [본문으로]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