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다. 주인공은 <인간극장>에도 출연했던 노부부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극장에 가는 이유는 영화 관람이지, 다큐멘터리 시청은 아닐 것이다. 대자연을 찍은 다큐멘터리라면 모를까 TV 시청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 시골 배경의 노부부가 등장하는 다큐를 나는 왜 극장까지 가서 보는 걸까? 영화관으로 향하는 길에 머리를 스쳐지나간 질문이었다.

 

 

영화는 제목과 포스터가 스포일러다. 사별의 고통이 주요한 서사임을 대놓고 드러낸다. 타격은 아닐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힘은 서사가 아니라, 리얼리티일 테니까. 이 영화를 찾은 이유를 생각하니 세 가지였다. 죽음의 리얼리티를 기대했고, 다정한 노부부가 죽음을 맞는 모습이 어떠할지 궁금했고, 할머니의 애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를 통해 나의 애도 현황을 성찰한다면 보너스고.

 

스토리는 단순하다. 89세 할머니와 98세 할아버지가 시골집에서 함께 밥 먹고, 일하고, 장을 보러 다닌다. 두 분은 24시간 내내 함께 붙어있다. 붙어있음은 젊은 또는 중년의 부부에게는 괴로움이지만, ‘노년’의 부부에게는 축복 같은 일이라는 생각을,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오랫동안 서로에게 맞춰진 ‘편안한 어우러짐’이 노년의 최고 행복 아닐까.

 

두 분의 행복에 ‘죽음’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시름시름 아팠고, 할머니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76년을 함께했지만, 할머니는 아직 함께함의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았다. 98세나 된 지아비의 죽음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는 듯이 말했다. “3개월만 더 있다 가세요. 그러면 내가 얼마나 반갑겠소.” 고령의 어르신에게도 죽음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영화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집중하지 않았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죽음의 리얼리티가 영화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 두 분의 소소한 일상이 러닝타임의 대부분이었고, (약간의 가족 갈등이 있었지만) 후반부 주요장면은 할아버지의 떠남과 할머니의 슬픔이었다. 할아버지 묘 앞에서 할머니는 엉엉 운다. 적잖은 관객들도 울었을 것이다. 나도 슬펐고 고통스러웠다. (극도의 슬픔은 고통을 동반한다.)

 

나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할머니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관계가 깊을수록 이별의 슬픔은 짙어진다. 문득 어리석은 질문이 찾아든다. 슬픔을 옅게 만들기 위해 깊은 관계를 지양해야 하는가? 결단코 아니라고 믿는다. 결국, 깊은 슬픔은 관계의 행복을 만끽한 이들이 맞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인 셈이다. 한없이 친밀한 관계를 누리면서도 이별의 고통 따위는 모른 채로 살고 싶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나는 친한 사이라고 믿었던 이의 죽음 앞에 덤덤한 사람이 되기는 싫다. 훗날의 이별이 아프더라도 지금의 관계들이 더욱 깊어졌으면 좋겠다. 정겨운 관계는 슬픈 이별을 잉태한다는 점에서 강계열 할머니의 슬픔은 당신께서 자초(?)하신 것이다. 본의 아니게도 슬픈 이별을 추구하게 되다니! 본의 아닌 추구, 그것이 서른일곱의 나이에 절친한 친구와 사별한 나를 깊이 위무한다.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