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허삼관, 사랑스러운 일락이. 영화 <허삼관>을 관람한 간단 소감이다. 그러니 나의 소감을 늘이면,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가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기회가 되겠고, 일락이를 향한 애정 표현을 쏟아내는 장(場)이 되리라.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고, 사랑을 표현해서 나쁠 게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세상에 글 하나를 보내는 민망함을 달랜다.)

 

1.

허삼관(하정우)은 허옥란(하지원)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마음앓이 하던 허삼관은 삼촌(주진우)에게 물었다. “삼촌, 어떡해야 결혼해요?” “결혼하려면 네가 가진 것을 모두 주어야지.” 가난한 허삼관은 피를 팔아 번 돈으로 허옥란에게 냉면, 만두, 불고기, 향수를 선물했다. 돼지고기 한 덩이도 사주었다.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오늘 제가 쓴 돈이 2천원예요. 언제 제게 시집오실 거예요?” 황당한 허옥란, 인간적인 허삼관.

 

옥란에게 부자 애인이 있다는 난관을 넘어서며 허삼관은 결혼에 성공한다. 예비 장인어른께 모든 돈 전부를 내어 드리며 진심 어린 모습으로 결혼 승낙을 얻었다. 허씨 부부는 세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허삼관은 특히나 첫째 아들 일락이를 사랑했다. 아들 사랑은 어느 날 산산조각 났다. 11년 동안 키워 온 일락이가 허옥란의 옛 연인 하수용의 아들임을 알게 된 것. 허삼관은 아내에게 분노한다. 아들에게까지 매몰차다. “사람들 없는 곳에서는 이제 나를 아저씨라 불러.” 가여운 일락이, 인간적인 허삼관.

 

허삼관과 아내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고, 허삼관은 이제 이락이와 삼락이만 데리고 다닌다. 관객 관점으로는 일락이의 어엿한 모습에 흔들릴 만도 하겠지만, 아내에 대한 배신감과 11년간 속아왔다는 데서 오는 배신감과 허탈감이 컸으리라.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허삼관이 다시 일락이를 아들로 여기게 되는데, 일락이가 중병에 걸린 게 결정적이었다. 치료에 3만원이라는 큰돈이 들어가게 되었다. 여전히 가진 돈이 없었던 허삼관은 위험할 정도로 엄청난 피를 판다. 금액을 마련하느라 약속한 날짜보다 이틀 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늦어서 미안해.” 뭉클한 부정, 인간적인 허삼관.

 

2.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가. ‘~적이다’ 라는 말은 어떤 것의 본질이 잘 발현된 것을 뜻한다. 동물적이라는 말은 동물다운 것의 발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답고, 인간적인 걸까?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다. 리더십, 사랑, 배려 등을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우리의 본성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이기적 본성이 인간의 어두운 모습이라면, 긍정적인 인간다움도 있다. 이기적 본성을 이겨내려는 ‘선한 의지’가 그것이다. 이기적 본성에서 출발하여 선한 의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최선의 경주가 좋은 삶이리라.

 

또 무엇이 인간적인가. 인지상정이야말로 인간적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말이다. 여인을 향한 사랑, 처자식을 향한 마음, 질투와 복수심 등은 모두 인지상정이다. 나눔, 용서, 배려 등도 선한 의지의 발현이라는 점에서는 인간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것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노력하여 얻은 휴머니즘이고 인지상정은 보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첫 마음이니까. (그것이 배고픔이든, 호불호의 감정이든) 감추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인지상정이고, 분노하거나 초조할 때 어찌하지 못하는 모습이 인지상정이다.

 

3.

허삼관은 인간적이다. 앞뒤 재거나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허옥란을 얻기 위해서 삼촌의 메시지를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여인을 향한 순수한 사랑 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는 일락이가 자기 아들이 아님을 알고 나서도 지극히 인간적이다. 충격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을 보라. 사실 대처랄 것도 없다. 아픔을 넘어서려 하거나(초월), 덤덤해지려는(초연) 노력은 하지 않는다. 속았으니 억울하다, 내가 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가 그의 태도다. 선한 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것은 또 얼마나 인간적인가.

 

이것이 옹졸한 쪽의 인간적 모습이라면 허삼관의 마지막 인간적 모습은 선한 의지가 발현된 아름다운 쪽의 인간다움이다. 아픈 아들 앞에서 허삼관의 옹졸함은 아침햇살에 이슬이 사라지듯 증발해 버린다. 키운 정만으로도 부모다운 책임감과 애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인간적인 모습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이다. 열 받고 억울하고 짜증도 나지만, 이기심이 자연스럽듯이 선한 의지가 자연스럽게 발동하는 지점 말이다. 옹졸하던 허삼관은 반전을 이뤘다. 그 모든 찌질함을 벗고 피까지 팔아 아들을 살리려는 위대한 모습을 보인 것.

 

4.

인간답다, 인간적이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희미하게나마 구분하여 쓴다. 잘 생긴 연예인이나 빈틈없이 보이는 위인이 실수할 때 ‘참 인간적이네’라고 말하고, 누군가가 고귀한 언행을 펼치면 (동물적인 것과는 다른) ‘인간다운 모습’이라 표현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안에 옹졸함과 초연함을 모두 지녔다. ‘인간’이 얼마든지 추해질 가능성과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가능성을 모두 지녔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간’이라는 단어에 ‘적이다’와 ‘답다’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최근 몇 개월만 자기 삶을 돌아보자. 자신의 옹졸했던 장면이 떠오르진 않는가. 나만 그런가. 옹졸함이 종종 출몰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옹졸함과는 정반대의 어떠한 모습으로 살기를 꿈꾸고 희망하는 것이다. 인간은 양면적 존재다. 이기적 본성에 매어 있으면서도 이타적 날개를 달고 아름다운 하늘로 비상하기를 꿈꾼다. 그래서 초인이 되자는 니체의 제안은 (비상을 꿈꾸며 자기극복의 의지를 다진 이들에게는) 매력적이지만, (본성에 매인 나머지 인간에게 너무 높은 이상이라 여기는 이들에게는) 절망적이다.

 

5.

<허삼관>을 재밌게 본 것은, 인간적인 허삼관에서 내 안의 옹졸함을 보았기 때문이고, 인간다운 허삼관에서 내가 살고 싶은 모습을 보았던 까닭이다. 내 아들이 아닌 아이를 십 일 년 동안 키우겠다는 말이 아니다. 내 안의 옹졸함을 최소화하는 삶! 이것이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실현시키고 싶은 꿈이다. 허삼관은 아비의 정으로 뛰어넘었다. 뛰어넘기 위해, 나에게도 어떠한 미덕이 필요할 것이다. 대개 우리는 장애물과 싸우면서가 아니라 목표를 추구함으로 장애물을 뛰어넘으니까.

 

허삼관의 양면적 모습과 거의 비슷한 감동을 준 것은 일락이였다. 연기자로서의 표정과 연기도 훌륭하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녀석이 보인 삶의 태도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일락에게 감정이입이 된 것인가 따위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일락이의 눈빛과 밝고 건강한 자아상에 매료되고 몰입했다. 어린 나이에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비약적이긴 했지만, 녀석의 연기로 모두 덮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인간적인 허삼관, 사랑스러운 일락이... 영화 <허삼관>은 내게 두 단어로 남았다.

 

아...! 영화 속 허삼관이 되어 일락이를 사랑하며 함께 살고 싶다.

와! 그럼 나는 허옥란의 지아비가 되는 것인가. 저절로 웃음꽃이 핀다.

하나는 분명히 해 두자. 살고 싶음은 옥란에게 마음을 빼앗겨서가 아니다.

허옥란은 무지 예쁘지만, 일락이는 ‘허옥란’을 조연으로 느끼게 할 만큼

캐릭터와 연기가 훌륭했다. “일락아, 너가 내 아들이면 너를 정말 좋아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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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