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고서, “설명하거나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마리의 매력”에 빠졌다며 호들갑 떠는 서평을 썼습니다. 그것은 서평이 아닌 감상문이었습니다. 해석은 하지 못한 채로 마리에게서 느낀 친밀감과 감상만을 잔뜩 늘어놓았으니까요. 사실은 찬미였습니다. 에세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형식미에 대한 감탄!


인물을 그려내는 표현력과 서사를 꾸려가는 감각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감탄하고 찬미하느라 해석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탄탄한 서사에 몰입하느라 생각하고 음미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긴 에세이인데, 라면 면발처럼 후루룩 마셔버린 느낌입니다. 어쩌면 나는, 서평은 가급적 (혹은 반드시) 해석을 포함해야 한다고 믿어왔기에 글을 쓰는 게 힘겨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64년, 수잔 손택은 자신의 예술론과 비평론을 담은 에세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비평이 반드시 해석을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예술작품은 본원적으로 그 내용”이라는 기존의 사고를 비판합니다.


“예술작품을 (현실을 그려내는) 그림 모델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예술가의 진술로 간주하는) 진술 모델로 이해하든지 간에, 여전히 내용이 우선이다.” 손택은 내용을 중시하느라, 형식의 간과를 비판한 겁니다.


“내용을 과도하게 강조한다는 것은 결코 완성되지 않을 비평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의 호전성을 지적하며, 그 호전성은 특히 문학에서 한층 더 극성이라고 말하는 수잔 손택! 그녀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강조한 것은 감성의 회복, 투명성 추구, 비평의 기능 인식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과 비평)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손택의 주장에 열광합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를 읽고서 해석은커녕 잘 읽고 잘 느낀 것에 그친 나를 손택이 위로해 주어서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런 이유로 열광한다면 손택을 오해한 것입니다. 손택이 예술작품의 불가해성을 주장한 건 아니니까요.


“나는 예술작품이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지 않는다거나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이다.”


제가 손택을 찬미하는 까닭은 그녀가 빛나는 지성과 놀라운 감수성을 모두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자주 따라붙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라는 다소 모호한 칭호를 설명하자면, ‘지성미가 깃든 감수성’일 겁니다. 감성과 이성을 함께 지니기란 힘듭니다. 성격심리학에서 감정형과 사고형이라는 서로 다른 기질로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녀는 예술을 사랑합니다. 영화, 연극, 문학을 열렬히 사랑합니다. 비평은 그녀가 예술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비평하되, 지성과 감성으로 비평합니다. 그녀는 지성을 빌어 비평 기준을 확립했겠지요. (아름답다고 판단내린 예술작품을 향한) 지고의 숭배자가 되는 것은 감성 덕분일 테고요. 손택의 아들은 ‘숭배’를 어머니의 제2의 천성이라 불렀습니다.


<우울한 열정>은 손택이 숭배하고 찬미한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7편의 지적인 에세이를 묶은 책인데, 5명의 사상가나 작가(폴 굿맨, 엘리아스 카네티,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앙토냉 아르토) 그리고 2명의 영화감독(리펜슈탈, 지버베르크)을 다뤘습니다.


책은 우선, 손택이 열렬한 추종자임을 보여 줍니다. 누군가를 존경하기 시작하면, 그에게 흠뻑 빠져듭니다.

“오래전부터 폴 굿맨은 나의 영웅이어서 그가 갑자기 유명해졌을 때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라는 인간의 존재를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걸 보면 항상 의아했다. (중략) 나는 1년 안에 그의 책을 전부 구해 읽었고 그 뒤로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빠져들었기에 가능한, 아니 빠져드는 것만이 아니라 예리한 지성을 지녔기에 가능할 법한 인물 묘사를 보여줍니다. 섬세하고 정확하고 날카로운 분석력이 깃든 진술들을.


“롤랑 바르트는 꼼꼼한 독서가였지만 왕성한 독서가는 아니었다. 자기가 읽은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글로 썼으므로, 그가 글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마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많은 프랑스 지식인처럼(그가 사랑한 지드는 예외다), 그도 비세계적이었다. 그는 외국어를 몰랐고 외국 문학은 번역된 것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가 건드린 유일한 외국 문학은 독일 문학일 것이다.


손택이 직접 책에서 <우울한 열정>을 숭배하기 위해서 썼다고 밝힌 것은 아니지만(저자 서문이나 후기도 없고요), 아들의 말, 폴 굿맨 숭배를 짐작케 하는 대목 그리고 롤랑 바르트를 설명한 대목에서,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숭배와 찬미임을 느낍니다.


“이반은 내가 폴 굿맨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폴 굿맨이 미국에 살면서 건강하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강렬한 기쁨을 느끼면서도, 나 자신이 폴 굿맨과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눈곱만큼도 그와 교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바르트의 글은 모두 논쟁적이다. 그렇지만 그의 기질 가장 깊은 곳의 충동은 호전적인 것이 아니라 찬미하는 것이다. (중략) 바르트는 찬양하고 자신의 열정을 나누는 데 더 관심을 갖는다.”


바르트를 향한 손택의 설명 중에서 찬미에 관한 서술은 손택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제가 <우울한 열정>을 그녀가 ‘숭배’한 예술가들을 다룬 에세이라 말한 까닭이고요. 그래서 저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에세이 중에 발터 벤야민을 묘사한 표현이 ‘우울한 열정’인데 책 전체를 대표하기엔 적합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게 대안이 있는 건 아니고요.


문학, 영화, 비평에 관해 무관심한 분들이 읽기엔 다소 어려운지도 모르겠군요. (아마도 어려운 게 아니라 낯선 것일 테지만.) 누군가에겐 술술 읽히지 않더라도, 내게는 흡입력과 깊은 의미를 안겨준 책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글을 쓸 때, ‘균형’과 ‘깊이’를 깃들인다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거든요. 두 가지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책장을 덮습니다.


지성으로 판단하여 감성으로 찬미한다(균형)!

흠뻑 빠져들어 그의 전부에 접근한다(깊이)!


- 크리스마스 이브를 손택과 함께한, 조르바. (2013. 12. 24)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