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인류 공존의 담론까지 읽어야 할까

-『문명, 그 길을 묻다』를 읽고

 

"쉴 틈 없이 일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도 그랬고, 2만 달러에서 IMF와 함께 곤두박질칠 때도 다시 그 고지를 넘어야 한다고 힘을 모았다. 이제는 2만 5천 달러를 넘어섰다. 그런데 성장의 열매인 행복한 미래는 만기가 자동 연장되는 이상한 적금 통장이 된 것 같다. 질 높은 교육 혜택, 쾌적한 주거 환경, 맑은 공기, 푸른 공원의 시대는 언제 오는 걸까? 아니면 이런 숫자와는 상관없이 서로 비슷비슷하게 고생도 하고 절약도 하고 먹을 걱정을 덜어냈다며 조금씩 여가를 즐기던 20여 년 전이 더 실질적인 풍요를 누렸던 건 아닐까?"

 

『문명, 그 길을 묻다』의 저자 안희경 씨가 프롤로그에서 던진 물음입니다. 그녀는 의문도 토로합니다. "국내총생산과 국민총소득의 숫자가 높아진 동시에 빈부의 차이와 우울한 국민도 함께 늘어나는 이 진행 방향을 성장과 발전이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책의 집필 동기가 선연히 드러납니다. "현재의 상태를 제대로 아는 것이 곧 대책을 실천하는 지식이다. 그렇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 범위를 알고 나아갈 좌표를 찍기 위해 다시 짐을 꾸렸다. 이 문명이 살 길은 어디인지, 길은 있는지에 대해 묻고자 인터뷰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인류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릴레이 인터뷰는 과감하게 진행됩니다. 세계 지성의 최고봉에 있는 거장 11명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서두에 등장하는 세 명부터 소개하자면, 무려 재레드 다이아몬드,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입니다. (책에는 지그문트 바우만, 하워드 가드너, 웬델 베리 등도 등장합니다.) 우선 이 면면들을 한 지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경향신문에 연재했다는 점과 저자의 방송국 PD 경력 등이 도움되었으리라 예상되지만, 인터뷰를 성사시킨 저력이 궁금했는데, 책장을 펼치니 궁금증을 잊을 만큼 책의 내용에 빠져들었습니다. (대개 비결은 "만나고 싶습니다"는 정공법인 경우가 많더군요.)

 

연재 당시에는 전형적인 Q&A 형식으로 진행된 인터뷰였는데, 책에서는 인터뷰어의 질문과 배경지식을 자연스럽게 지문으로 풀어냈고, 지성인들의 목소리만을 인용문으로 고쳐 썼습니다. 장단이 있겠죠.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현장감이 떨어진 대신 인터뷰어의 추가 설명이 책의 이해를 돕고 따옴표로 표시된 인터뷰이(지성인)의 말들에 집중할 수 있더군요. 재레드 다이아몬드와의 대화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이를 원래의 기사와 비교해보셔도 좋겠고요. (경향신문 연재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312345125&code=210100&s_code=af141)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013년 4월 보도에서 '1000년 이내에 인류는 생존을 위해 지구를 떠나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우주로 나아가야 하며, 점점 망가져가는 지구를 떠나지 않고서는 인류의 새천년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호킹의 주장에 대해 인자하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단호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스티븐 호킹은 틀렸어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1000년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아요. 단지 50년 뿐입니다. 우리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한 문제를 풀든지, 아니면 완전히 망치든지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 말이죠. 두번째, 이 별을 망쳐놓고 다른 별을 찾겠다고요? 이것은 답이 아닙니다. (중략) 이런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말하기보다는 지금 우리별을 망가뜨리는 모든 일을 중단하는 데 온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p.21)

 

스티븐 킹과 재레드 다이아몬드, 두 지성의 견해 충돌이 짜릿하기도 하고, 관련 주제에 대해 이해를 높이는 대목입니다. 책에는 이런 대목이 여럿 등장합니다. 이는 저자의 서술이 가진 미덕 덕분이겠죠. 제가 '모리의 방식'이라고 부르는 글쓰기가 있는데, 필자가 학생의 입장이 되어 현자에게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방식을 말합니다. (필자 대신 스토리의 주인공이 등장할 수도 있고요.) 『모리와 함께하는 화요일』에서 미치 앨봄이 보여준 서사적 특징을 말하는 겁니다.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켜 배움을 효과적으로 일으킨다는 점에서 저는 이런 방식을 글쓰기 수강생들에게 종종 추천하죠. 에세이가 그렇듯이 인터뷰도 섬세하게 인터뷰어의 고유성이 살아나는데, '모리의 방식'이라 부를 법한 이러한 서술적 방식이 책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어려운 얘기가 나오면 저자가 설명하고, 한국적 상황을 소개하면서 책이 진행됩니다. 인터뷰이의 사상을 소개한다는 대명제를 헤치지도 않고요.

 

재레드 다이아몬드 photo by 안희경 (출처 : 경향신문)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에너지 소비 자체를 줄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규제 강화와 정부와 거대 기업들의 현명한 정치적 선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1퍼센트가 권력을 쥐고 자신들의 행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나머지 99퍼센트는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폭동은 점진적으로 혁명이 되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리더의 임무가 중요합니다. 리더의 역할은 사회의 안녕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모두가 안녕해야 해요. 1퍼센트만 안녕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내용이 경향신문에 게재되었을 때 '현재의 빈부 차이와 갈등을 가지고 혁명까지 경고하는 메시지는 조금 지나쳤다'는 반응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소 안일하고 무감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억압받고 가난했던 성직자와 귀족이 아닌 제3신분의 소요가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도 없었을 테니까요. 위기론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추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가난한 이들이 투쟁을 일으킨 사례로 소말리아 해적과 LA에서 일어난 두 번의 폭동을 들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인터뷰는 위기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과장이 아닌 현실 진단에 의한 제안이라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귀담아 들어야겠지요.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위기감을 느낄 때에야 비로소 변화를 선택하니까요. 하지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또 다른 상황이 있습니다. 가슴 속에 신념이나 비전을 품은 경우입니다. 두번째 인터뷰의 주인공 제레미 리프킨 역시 인류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견해이지만, 보다 희망적입니다. 우선 리프킨의 문제의식부터 보시죠. 

 

"우리는 지금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는 실제 상황이에요. 우리는 기후 변화가 왜 끔찍한지에 대해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중략) 4억 5천만년 동안 지구는 다섯 번의 멸종기가 있었습니다. 모두 온도 변화 때문에 일어났어요. 과학자드른 이제 여섯 번째 멸종기에 돌입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번 세기가 끝나는 시점에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 종 가운데 60퍼센트가 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싹쓸이라고 봐야 합니다. 생명의 다양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대 1천 만년은 걸립니다."

 

위기론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끝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저자가 다이아몬드의 50년 위기론을 언급함으로 인터뷰를 시작했기에 마지못해 언급했는지도 모르죠. 리프킨은 대안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할 만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3차 산업혁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학문적인 단계에서 실용적인 단계로 넘어왔어요. 전 유럽연합 의장, 독일의 메르켈 총리, 프랑스의 올랑드르 대통령, 그리고 중국의 리커창 총리가 재생에너지 사용으로의 전환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였어요." 책에는 유럽과 중국이 어떻게 새로운 산업혁명에 참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중국의 참여가 놀라운데, 중국 지도자 중 한 명은 "우리는 1차 산업혁명도 놓치고, 2차 산업혁명도 놓쳤어요. 그렇지만 3차 산업혁명은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3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는 재생 에너지, 수평적 권력, 지속가능한 경제 등 입니다. "석유, 석탄, 우라늄은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반면 재생 에너지는 모든 사람의 집 마당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햇빛은 매일 반짝이고 바람은 온 세상에서 불어오죠. 땅에서는 지열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숲에서는 바이오메스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갖고 있죠? 이제 우리는 개인 발전소까지 갖게 되는 겁니다." 발전소를 갖게 된다는 말은 개인이 에너지를 만들고, 소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3차 산업혁명에 뛰어난 나라와 기업들이 많다는 사실이 참 고무적입니다. (프랑스 최대의 전력회사 EDF, 한국의 LG CNS 등)

 

안희경 씨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크게 논란이 일었던 고리 핵발전소 폐기 문제와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리프킨은 "이미 결론이 난, 시대에 뒤떨어진 안건을 왜 다시 끌어내는지 답답한" 눈치였지만, 우리의 사정이 이러하니 저 역시 몹시 궁금했기에 저자의 질문이 매우 반갑더군요. 리프킨의 답변도 명쾌했습니다. 송전탑은 민주적인 방식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의 이득을 위한 것이다, 송전탑이 설치되는 지역 주민의 희생을 강요한다, 핵발전소의 유용성은 끝났다 : 핵폐기물 묻을 곳이 없고, 핵발전소가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세계에서 필요한 에너지의 6%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냉각수도 없다. 이것이 리프킨의 주장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이어서 답변도 제시했고요.

 

"도대체 한국은 왜 비싼 핵발전을 사용하려는 거죠? 모든 사람이 다 생산할 수 있는 공짜 전기가 있는데요. 핵발전은 몇몇 회사에게만 이득이 돌아갑니다. 우리는 모든 사회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조합으로 소유할 수 있는 우리만의 에너지를 생산해야 합니다. 지금 독일이 하는 것처럼 말이죠. 모든 한국인이 자기 집 마당에서 에너지를 만들 수 있을 때 이를 'power to the People' 즉 '국민에게 권력을 쥐어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에너지 민주화를 통해 가능합니다."

 

제레미 리프킨 photo by 오소영 (출처 : 경향신문)

 

리프킨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떨렸습니다. 지속 가능한 경제를 위한 3차 산업혁명에 대하여 리프킨이 신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과 방법론 그리고 이미 실천의 영역에서 세계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전율시키는 비전을 품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전율시키는 삶을 살아감을 리프킨을 통해 느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 책 『문명, 그 길을 묻다』를 권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현우 선생의 추천사가 딱 제 마음이었거든요.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고 우리의 문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평소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곤란과 애로에 허덕이며 자기 앞가림에 바쁘다. 세상을 고민하는 일 따위는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

 

먹고 사는 일에 바쁜 우리들이 거대 담론을 다룬 이 책을 읽어야 할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무능하고 기업이 탐욕에 빠져 있다면, 희망을 일구어내는 일은 시민들의 몫이니까요. 나는 최근 영화 <암살>을 감동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도둑들>을 만든 최동훈 감독의 작품이란 말인가, 하고 놀랐고요. 영화는 대중적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역사의식, 시민의식을 상기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총체성이 아닌 출몰성의 의미에서) 영화 감독이 예술인이 된 경우입니다. 좋은 영화지만, 우리가 영화를 곱씹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영화의 반향은 급격히 소멸할 겁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쥐어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는 일에 바빠 문명의 행보에 관심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더욱 더 탐욕스러운 이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내어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게는 이 책을 일독할 가치가 충분해졌습니다. 

 

최근 읽은 훌륭한 책이 여럿 있지만, '과연 이 책을 그(녀)가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에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는 바람에 최근에 책 얘기를 거의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신이 났습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읽고서는 누군가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어졌고, 재레미 리프킨을 읽고서는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네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 있겠냐마는, 저는 이 책을 여러 사람들에게 권해야겠습니다. 저와는 별개로 여러분들은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 권의 책 값이 두 사람 식사비 정도로 올랐으니까요. 소중한 사람과의 식사만큼 한 권의 독서가 의미있을까? 이 질문에 예스라고 답할 수 있다면 지갑을 열어야겠지요. 경향신문에서 인터뷰부터 읽어도 되겠습니다.

 

안희경 씨는 지금 또 다른 테마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음 전문가들과의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네요.) 그녀의 행보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회의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현실이 어두워도 외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적 이상주의자의 관점으로 여러 현안에 다가서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녀의 삶에서 열정과 배움이 베어나기도 하고요.『문명, 그 길을 묻다』를 읽으며 이렇게 느끼고 나니, 그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책장에는 그녀가 번역한 『붓다의 시간관리』도 보이네요. 무엇이든 읽는 대로 리뷰를 남겨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책을 더 읽지 않는 비독서의 계절, 가을이 와서일까요. 제가 독서를 권하고 있네요.

 

* 안희경, 『문명, 그 길을 묻다』, 이야기가있는집, 2015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