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보려고 극장에 갔다. 표를 사서 밥을 먹고 왔더니, 대기실에 90년대 가수 K가 앉아 있었다. (K가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일 확률이 높다.) 영화 입장을 알리는 안내를 따라, 그도 나도 함께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K와 나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바로 곁에 앉았다. 영화가 끝나고 그는 곧장 나갔고, 나도 따라갔다. “저기 가수 K 씨 아니세요? 제가 지금도 이 세 곡을 가사를 외워 끝까지 부릅니다.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이렇게 할 말을 생각해 두었지만,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극장을 나와 교정을 걸어가는데, K의 자동차가 내 옆을 지나갔다. 그는 차창을 열어 창턱에 왼팔을 걸친 채로 내게서 4~5m 떨어진 곳을 느린 속도로 지나치고 있었다. “저기, 잠깐만요! 혹시 가수 K씨 아니세요?” 라고 말할 기회는 불과 2, 3초의 순간이었다. 생각에서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내게는 너무 짧은 찰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기를 냈다.” 언젠가는 이렇게 말하는 날이 오겠지. 집으로 돌아온 밤에, 그의 노래 3곡을 연달아 들었다. K와 그의 노래를 함께 불렀던 친구를 생각하면서. (9월 14일)


2.
“명절에 내려와도 이젠 만날 사람이 없지?” 거실에서 함께 얘기 나누던 중 삼촌이 물었다. 상욱이의 부재를 염두에 둔 말씀이었다. “네. 예전엔 상욱이가 역까지 마중 나오거나 배웅해 주곤 했는데, 지금은 그러네요. OO이는 명절이면 서울 처가에 가고, 다른 친구들도 애들이나 와이프랑 보내느라 명절에도 바쁘고요. 상욱이는 어떻게든 시간 내어 만났고요...” 잠시 심호흡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재수씨에게 연락하거나 한 번 만나면 좋은데, 제가 핸드폰을 안 가져 왔으니 연락처도 모르네요.”


나만의 강박관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절이라는 특별한 기간에 누군가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려면 친한 사이여야 한다. 그가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할애해야 하니까. 친한 사이가 없지 않지만, 명절 때마다 만났던 가장 친한 친구가 없으니 나의 명절이 조금 한가해지긴 했다. 정말 큰 아쉬움이지만 아쉬움에 함몰되어 지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스펜서 존슨이 알려 준 지혜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은 내가 가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순간이다. 인생의 나락은 내가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 순간이다.” (9월 15일)


3.
오전 일찍 엄마에게 다녀왔다. 오후에는 상욱에게도 갔고, 친구를 만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를 하면서 술을 곁들일까 말까를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우리가 원했던 와인은 품절되었고, 주문하려던 음식은 주방장이 나오지 않아 오늘은 안 된단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와인은 너무 비쌌다. 술은 후일을 기약하고, 식사만 하기로 했다. 세 가지 음식을 주문해 나눠 먹기로 했다. 나는 카르보나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좋아하진 않지만 싫지도 않은 음식이다. 다른 음식과 조화를 이룰 만한 메뉴라는 판단이었다. 


테이블에 나온 음식은 보조 주방장의 솜씨가 그리 훌륭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식당 측에 점잖게 한 마디를 건네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괜찮다고 말렸다. 분위기를 망치지 말자는 의도였다. 나는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품위도 잃지 않으면서 의견을 개진할 자신이 있었다. 고급 식당이라 그들에게도 조언을 받아들일 여유와 불평을 받아들일 자신감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참아야 했다. 친구들이 원하지 않았으니까. 매너 없는 '불만'이 아닌 소중한 '의견'을 전하고 싶었는데... 지나고 보니, 아쉽다. (9월 16일)


4.
오늘은 상욱이 생일이다. 한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매년 생일을 맞을 때마다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희망적인 조언이다. 비록 저 세상의 친구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한가위 전후에 맞이하는 생일이라, 인스펙션 친구들은 명절에 만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욱이 생일에 만나거나 했다. 어렸을 적의 일이고, 녀석이 살아있을 때의 일이다.


인스펙션 카톡 창에다 "오늘 상욱이 생일"이라고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재수씨에게 연락할까도, 생각만 했지, 실제로 하지는 않았다. 실행하는 게 좋았을까, 관두었던 게 좋았을까? 어느 쪽이 나았을까?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오늘은 어떤 쪽이 좋았을지 궁금하다. 나의 이런 성향이 누군가에겐 답답하게 느껴질 텐데, 종종 내게도 그렇다. (9월 17일)


5.

오전에 <인문주의를 권함>(가제) 원고를 다듬었다. 내겐 가슴 아픈 원고다. 2014년 9월 2일에 저장된 파일을 2년이 지나고서야 손을 댔다. 그해 9월 22일에 하드디스크 유실로 많은 자료를 잃었다. <인문주의를 권함>은 9월 2일에 지인에게 공유한 덕분에 건졌다. 그간 손을 대지 못한 채로 지냈다. 원고를 다시 쓸 필요가 없는 앞부분만 출간하려던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분량이 적다는 이유였다. 전체 원고를 살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유실했던 부분을 다시 퇴고해야 했다. 이번 연휴에 그 부분의 퇴고를 시작했고,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오후에는 삼성 대 LG 프로야구 경기를 시청했다. 퇴고에 매진하고 싶었지만, 중요한 시기의 경기라 두 시간을 덩어리로 투자했다. 결과는 쓰라린 패배였다. 아쉬움을 안고 카페로 가서 다시 <인문주의를 권함>을 매만졌다. 밤에는 오토바이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후에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가수로 재기한 김혁건의 강의 영상을 보았다. "포기하지 마세요. 저도 포기하지 않을게요." 이 말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더 이상 슬픈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아요. 행복한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나도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 글쟁이로서의 행복을 누리고 말아야지.' (9월 18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