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세계를 조금은 안다. 머릿속에는 수세기에 걸친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황금빛 아테네의 지적 유산들을 꿰어 찬 지식 꾸러미가 있다. 최근 수년 동안 호메로스와 비극 작가(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읽었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어설프게나마 공부했다. 고대 그리스는 내 독서 인생의 중요한 경유지다. (어쩌면 최종 목적지나 지적 고향이 될는지도….)


아테네 여행을 하다 보니, 첫 문장을 다시 써야겠다. “고대 그리스를 조금은 안다고 착각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모른 채로 그리스에 왔음을 여행 둘째 날부터 절감했다. 헬라어는 알파벳조차 몰랐고, 굿모닝에 해당하는 아침 인사 ‘칼리메라’조차 이곳에 와서야 외웠다. 지역어를 모르고 여행지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여행은 아름답고 우리를 깨우칠 힘을 지녔지만,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성장하는 일은 언어와 지식의 수준에 영향을 받는다.


파르테논 신전에 관해서는 얼마간 알았다. 46개의 도리아 양식 기둥을 가진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 여신에게 봉헌한 건축물이고, 건축가 페이디아스의 감독 하에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지어졌다. 페리클레스 통치 시대의 일이다. 하지만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신전 입구인 프로필라이온과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테네 니케 신전도 있다. 이들에 관한 나의 지식은 세밀하지 못했다. 설명의 재미를 더해 줄 이야기도 빈약했다. 

 
입술을 통해 해방되지 못한 그리스 신화 이야기 몇 조각이 머릿속을 떠다닐 뿐이었다. 보는 것마다 공부거리들을 함께 목격했고, 발길이 닿는 곳마다 나의 무지도 밟고 싶었다. 적잖은 텍스트를 읽고 왔지만, 아테네를 여행하니 나의 지식은 알량했다. 동행들의 물음에는 “모르겠네”를 연발해야 했다. 더 놀라운 점도 있다. 여행이 진행되는 ‘현장’에서 무지를 절감했음에도, 글을 쓰는 ‘관념의 공간’에서는 내가 무엇에 무지했는가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현장은 무지와 호기심 투성이었는데, 관념의 공간에서는 망각과 자기기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조금은 아는데…’ 하는 생각마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현장에서 무엇을 모르고 무엇이 궁금했는지조차 세세하게 떠올리지 못했다. 몰랐던 점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니 지식을 채우기가 어렵다. 채우더라도 내게 익숙한 것으로만 덧칠할 뿐 기질적으로 간과하기 쉬운 영역은 여전히 채색되지 못할 것이다. 총천연색 세상을 몇 가지 색으로만 표현하는 꼴이다.


현장의 공간과 관념의 공간에서 느끼는 지적 감수성이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경악스럽게 다가왔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망각함은 지적 성장의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이해의 방해꾼처럼 느껴져서다. 그래서일까. 자기 이해를 지닌 이들은 몹시 드물고, 자기를 안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부지기수다.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성장이 더뎌진다. 모르고 있음에도 안다고 착각하면,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상대에게 답답함을 안긴다.


오늘은 소크라테스의 감옥(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은 실제 소크라테스의 감옥은 아니다)과 필로파포스 언덕을 오르는 날이다. 6년 전에도 방문했던 곳이다. 당시의 나는 별반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6년이라는 세월은 전혀 무지했던 주제에 눈을 뜨기에는 넉넉한 시간이다. ‘그때보다 깊은 단상에 잠길 수 있을까?’ 나도 궁금하다. 이번에는 적어도 2천 5백년 전에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의 음성이 마음 속으로 들려올 것 같다.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지금의 내게 적용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아크로폴리스에서 드러난 너의 무지를 기억하라!’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도 했다. “당신이 가질 수 있는 보물 중 좋은 평판을 최고의 보물로 생각하라. 명성은 불과 같아서 일단 불을 붙이면 그 불꽃을 유지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꺼뜨리고 나면 다시 그 불꽃을 살리기가 지난하기 때문이다. 좋은 평판을 쌓는 방법은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미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지성을 갖추고 싶다. 내게 지성인이란, 박식함보다는 합리적 사유와 삶의 지혜를 갖춘 인물이다. 그리고 자기기만이 아닌 자기이해를 추구한다. 자기 명성에 거품이 있다면 스스로 걷어내는 사람이 내가 꿈꾸는 지성인이다. 잠시 후, 필로파포스 언덕에 서면 아크로폴리스가 한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견한 나의 무지와 내 지식의 속살도 함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건축물을 바라보며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헤아려야겠다.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연지원)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