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금능으뜸원해변이다. 날씨가 잔뜩 흐린데도 바다가 에머랄드 빛을 띄어서 단숨에 반한 곳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에는 차에 머물다가 잠시 비가 그치면 나가서 잠시 바다를 관조했다. 바다 너머 보이는 비양도는 정말 <어린 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다. 이 해변을 5박 6일을 머무는 동안 세 번을 찾았다.


두 번째 방문은 밤이었다. 나는 어둔 해변 속을 거닐며 인생을 생각했다.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한 시간짜리 소요(逍遙)학파 철학자였다. 생각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리 되겠다. 단순한 삶! 단순함이 간단한 건 아니다. 단순함이 쉬운 것도 아니다. (단순한 명제의 모습을 띠는 지혜를 실천하기란 얼마나 힘든가!)



2016년 11월 초에 오픈한 한림읍네의 콩나물국밥 집에서 아침식사를 먹었다. 전날 밤, 숙소를 향하는 길에 콩나물국밥이 3,900원이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어 찜해 두었던 식당이다. 혼밥족이 늘었다고는 하나, 나는 여전히 혼자 밥먹기가 쉽지 않다. 쑥스럽거나 어색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다. 테이블 하나와 반찬 셋트를 나 혼자 차지하기가 식당 측에 미안해서다.


그래서 혼자 먹을 때엔 반찬이 적은 식당, 이를 테면 삼계탕, 설렁탕, 해장국 집을 찾아 입구 쪽이나 작은 테이블에 앉는다. 되도록이면 비싼 메뉴를 시킨다. 이렇게 매번 '쓸데 없는 오지랖'과 '매너 있는 소비' 사이를 방황한다. 이 콩나물국밥집은 대놓고 3,900원을 명시해 두었고, 기사식당처럼 손님 회전이 빠른 분위기가 부담없이 혼자 들어가서 따뜻한 콩나물국밥을 먹고, 3,900원을 내고 왔다.




한림읍에는 '최마담네 빵다방'이라는 빵과 커피를 파는 작은 카페가 있다. 이름이 재밌다. '빵'을 내세우기엔 빵의 종류나 맛이 월등하지 않고, '카페'로 보더라도 브랜드가 될 만한 요소가 부족했지만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가 볼만한 곳으로 추천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핸드 드립의 커피맛에서 전문성을 보였지만, 제주엔 워낙 쟁쟁한 카페들이 많다. 그런 일급의 카페에 들기엔 뚜렷한 차별화가 없다는 말이다. 세면대의 손타월이 인상 깊었다. 나는 손을 두 번 닦았는데, 두 번째엔 수건 쓰기가 아까워 무의식적으로 공중에 손을 털었다.





<카페 그곳>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나를 죽여주는 음악, 조용한 분위기, 건강한 사이드 메뉴가 나를 매혹시켰다. 조용함은 학구적이기도 했고, 낭만적이기도 했다. 책과 잡지도 놓여 있었고 책을 읽는 이들이 많았지만, 제주에 맞는 여행기나 사진집 또는 감성 충만한 에세이들이었으니 고시원 느낌과는 하늘과 땅만큼 멀다.


둥근 테이블에 쌓인 책 중에서 하나를 집어와 펼치니 젊은 저자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녀에게 제주는 "정성껏 살고 싶게 만드는 곳"인가 보다. 내게는 낭만적이고 여유롭게 살고 싶게 만드는 곳인데. 그녀의 글 몇 편을 읽으며 자연스레 내 필력과 비교하는 나를 발견했다. 자뻑도 하고, 그녀에게 공감도 했던 시간이었다.


제주이니만큼 텍스트를 읽기보다는 사진도 보자 싶어 잡지 <rove>를 펼쳤다. 사진이 이 잡지의 9할인데, 나는 편집자의 말과 잡지의 끝 부분에 실린 두 어개의 텍스트 기사를 더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이럴 땐 여지없이 활자 중독자다. 증상은 경미하다. 세상에 어마무시한 독서가들이 많음을 보면 그렇게 느낀다.




하루가 지났다. '앤트러사이트, 최마당네 빵다방, 카페 그곳'을 찾았더니 날이 어두워졌다. 카페 그곳을 나와 숙소를 향하는 골목길이 쓸쓸하면서도 정겨워서 찍은 사진이다. 밤을 찍은 건지, 골목길을 찍은 건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있다. 나는 분위기와 나의 정서를 담았던 게다. 아니, 담고 싶었던 게다. 카메라는 술취했나 보다. 실체는 또렷한데, 느슨하고 흐릿하게 찍었더라. 묘하게도 어떨 땐 위 사진이, 다른 땐 아래 사진이 더 좋다.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