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휴일 오후, 느긋한 시간이었다. 양평 서재의 책들을 만지작거리며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다가 밀란 쿤데라의 『향수』를 발견했다. '쿤데라의 책이 여기에 있었구나.' 이 책을 찾았던 것도 아닌데, 반가웠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와 같은 제목이지만, 서로 다른 의미의 단어라는 사실을, 책 뒤표지를 보고야 알았다. 쥐스킨트 책은 화장품의 하나인 향수(Perfume)였고, 쿤데라 책은 그리워하는 마음의 향수(Nostalgia)였다. ‘쥐스킨트의 『향수』는 읽었으니,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향수』도 읽어야지’ 하는 치기 어린 생각을 하면서 뒤표지의 글을 읽었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이다. 괴로움은 '알고스'이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탤지어'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생긴 괴로움이다. 향수는 무지(ignorance)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무엇이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잃어버린 유년기 또는 첫사랑에 대한 욕망."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을 법한 문장인데, 이제는 제법 이해하겠다. ‘무지에서 비롯된 고통’이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그이의 일상이 궁금해도 물어볼 수가 없다. SNS의 흔적으로 확인하더라도 마주앉아 두 눈을 바라보면서 나누는 대화나 다정한 문자 메시지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갖는 일이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안부를 찾게 되고, 다른 연인을 만났는지도 궁금하다.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다. 이때의 감정을 궁금함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차라리 고통에 가깝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여기저기 넘겨보다가 깜짝 놀랐다. 책의 곳곳에 밑줄이 그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었다. 군데군데 쓰인 메모는 내 필체가 분명했으니까.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리는 일은 종종 벌어지기에 새삼스러운 건 없지만, 막상 당사자로서 순간적으로 드는 감정은 경악이었다. 뒤표지의 문구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향수가 화장품인지, 그리움인지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리다니!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읽었는데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책이 있다는 사실은 ‘상쾌한’ 충격이다. 나는 읽은 책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삶에 관한 또 하나의 진실 한 조각을 주운 느낌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모두 기억할 수 없다는, 그리고 메모까지 해 놓아도 새까맣게 잊기도 하는 게 우리의 두뇌라는 사실 말이다.


얼마 전, 비전과 목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강사의 강연을 들었다. 긴 강연이 끝나고 자신의 이야기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강사의 사례도 30분 가까이 진행되었다. 강사는 열정적이었고, 명석했다. 자신감과 열의도 있었다. 많은 도전을 감행했고, 하나의 도전이 성공에 이르지 못하면 새로운 목표를 세워 다시 도전했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그를 만든 힘은 비전과 목표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기이해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도 거침없이 도전하는 하는 자신감과 도전정신이다.' 게다가 그는 비전과 목표를 신중하게 세웠다. 그가 20대 중반에 작성한, 무려 6페이지에 달하는 인생 로드맵은 감동적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비전과 목표를 수립한 것이 자신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감동과 분석은 별개다. 나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비전과 목표가 포함된 인생 로드맵은 그의 성공을 설명하는 한 가지 요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성공을 모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경험 너머를 사유하지 못하고, 타인의 입장을 공감하지 못하는 경험주의자들은 인식의 편향성에 곧잘 빠진다. 굳이 경험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인식의 편향성은 어디에서나 자주 발견된다. 젊었을 때부터 비전에 관심이 많았던 어떤 사람이 비전에 관한 책을 읽었다고 사정해 보자. 그는 자기 삶을 들여다보며 생각할 것이다. '내 삶에도 비전이 큰 역할을 해 주었군.'


만약 그가 실행력에 관한 책을 읽는다면, ‘실행력이 매우 중요하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실행력이야말로 주요한 성공요인이라고 판단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어떤 주제를 인식하고서야 비로소 그 주제의 유용성을 깨닫는 동시에 그 주제만큼만 인식의 편향에서 벗어난다. 그날의 강의는 강사 자신의 성공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들여다보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무엇 덕분에 성공하고 성장했는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책, 어떤 만남, 어떤 사건이 우리를 크게 도왔을 수도 있다. 심지어는 결정적인 도움이었음에도 우리가 그것을 잊었을 수도 있다. 『향수』를 읽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나처럼 말이다. 우리가 책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만난 사람도 잊어버리지 않은가. 심지어는 고마움을 느꼈던 은인도 잊어버린다. 헤세의 소설을 보라.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어둠의 세계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싱클레어는 “그 구원이 어린 시절의 삶에서 가장 큰 체험”이라고 느끼면서도 데미안을 잊고 살았다. “고마움의 감정이란 도무지 신뢰할 만한 미덕이 아니다. 그런 걸 어린아이한테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 같다. 그런 만큼 내가 데미안에게 보여준 철저한 배은망덕은 아주 이상할 것도 없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사람도 잊는 게 우리들인데, 고작 읽은 책이야 아무렴 어떠한가. 그러니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아닌지 도무지 헷갈리더라도 자괴감에 빠져들 필요는 없다. 읽은 책을 몽땅 잊어버려도 괜찮다. 더러 위대한 지성인들(이를테면 몽테뉴)도 꼼꼼하게 읽은 책을 잊기도 하니까.


덧#1. 배은망덕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싱클레어가 어린이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린이들은 이해하지만, 배은망덕을 일삼는 성인이라면 정신적, 인격적 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덧#2. 책을 기억하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부주의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부주의함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정성을 기울여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도, 세월은 우리의 기억을 앗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