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장기 30대'를 사는 중이다. 이 말을 설명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며칠 동안 이어온 생각을, 글쓰면서 다듬기 위해서. 글은 
독자뿐만 아니라 필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리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필자를 구원한 글이 독자에게도 유용하다. 글을 시작할 때의 필자와 마무리할 때의 필자가 다른 존재가 된다면, 그것이 필자를 구원한 글이다. 글을 쓰면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도약하고, 변화하는 필자 말이다. (여기서의 글이란 한 편이 아니라 복수로서의 글이다. 어찌 한 사람의 삶이 글 한 편 쓴다고 달라지겠는가.) 뒤집어 말하면, 어떠한 글이 필자가 경험한 '삶의 변화' 또는 '생각의 도약'에서 탄생한다면, 훌륭한 글이 될 확률이 높다.


실례를 들어야겠다. (관념적 설명은 자주 오해를 부르니까. 실체, 실례, 실증이 필요한 이유다.) '글쓴이를 구원한 글'은 어디에 있는가? 서점에 달려가면 만날 수 있고, 블로그 세계에서도 발견된다. 기실 어디에나 있다. 저명한 인사부터 꼽자면, 푸코, 몽테뉴, 레비-스트로스, 프로이트, 맑스, 니체가 그러한 글을 썼다. 가장 쉽게 접근할 만한 텍스트는 몽테뉴의 『수상록』이다.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적 자서전이라 할 『슬픈 열대』도 위대한 자의식으로 쓰인 책이다.


글쓴이를 구원하는 글이 가져야 할 첫째 조건은 '진솔함'이다. 성장이라는 나무는 자기 직시의 땅에서 자라는 법이다. 『수상록』의 서문을 보라. "세상 사람들의 호평을 사려고 했다면, 나 자신을 좀 더 장식하고 조심스레 연구해서 내보였을 것이다. 모두 여기 생긴 그대로의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나를 보아 주기 바란다. 내가 묘사한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 결점들이 있는 그대로 나온다. (중략) 나는 기꺼이 자신을 통째로 적나라하게 그렸다고 장담한다.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다."  (『수상록』 서문 中)


10대라면 이처럼 진솔한 글을 쓰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신경쓰느라 거울을 들여다보며 산다. 거울은 외적인 모습만 비출 뿐이다. 거울은 자신의 삶과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와 능력이 발달시키지 못한다. (질책이 아니다. 그 나이의 특징일 뿐.) 성숙한 이들은 20대, 30대에 자기 성찰의 능력을 키워내어 다른 이들의 시선이 아닌 자기 내면의 희열을 쫓으며 산다. 나도 그런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는데,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찬찬히 판단해보아야겠다. 40대가 되기 전에 이런 고민을 일단락하고(영원한 종결이 아닌 지금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싶다.


2.

'장기 30대'는 지금의 복잡다단한 내 삶을 아울러 설명하는 요긴한 키워드다. 후회와 아쉬움, 현재의 상황, 포부와 욕망이 모두 담긴 개념이다. 수년 전부터 나를 지배해 온 감정과 현재의 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선, 앞으로는 어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열망을 모두 설명하는 말이다. '장기 30대'라는 말을 자주 생각하다 보니, 내게는 아늑한 침실 같은 단어가 되었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를 감싸고 위로하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아니다. 비유컨대, 홀로 편안히 잠드는 침실이기보다는 연인과 뒤엉킨 욕망의 침실이다. '장기 30대'라는 말에는 차분한 성찰과 함께 새 삶을 향한 나의 의지와 열망도 담겼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세기'라는 말로 역사를 구분하곤 한다. 19세기, 20세기에 이어 지금은 21세기다. 이 세기라는 구분, 유용할 때가 많다. 인문학 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딱 집어 연도를 말하고 싶은데, '데카르트가 몇년에 사망했더라?' 하고 가물거리는 경우, 해결은 간단하다. '17세기 중반'이라고 말하면 되니까. 유용한 개념이지만, 역사 이해를 방해하기도 한다. 세기의 변경되면 한 시대가 종언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니다. 세기의 변경과 한 시대의 종언은 무관하다. 한 해의 변경이 우리 삶의 의미있는 변화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에릭 홉스봄의 '장기 19세기' 개념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탄생했다. 에릭 홉스봄은 19세기의 본질을 따졌다. 편의적 구분에서 19세기는 1800년에서 1899년이지만, 19세기의 본질을 따져본 관점에서는 다른 구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프랑스 혁명(1789)과 함께 시작했고, 1차 세계대전(1914)로 종결된다. 한 세기가 100년이 아니라 126년이 되었다. 그래서 '장기' 19세기가 된 것이다. 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는 장기 19세기를 크게 세 시기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구분했다. (세 시기는 모두 한 권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역사학의 고전이 되었다.)


홉스봄의 착상은 천재적이면서도 당연한 접근이다. 2017년 계획을 1월 1일에 세우지 않고 지난해 12월 초에 세웠다고 하자. 또는 11월에 충격적인 일을 당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나의 태도와 생각이 달라져서 삶의 도약을 이루었고 그것이 올해로까지 이어져 한 해를 보낸다면, 그의 2017년은 이미 지난해의 어느 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길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읽었던 책을 정리하고 싶은데 사정상 연기되어 1월 20일에야 완료했다면 그의 독서결산 시점은 1월 20일이 분기점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달력의 날짜와는 무관한 '다분히 개인적인 의미'를 기준으로 한 구분이 필요하다.


4.

다시 말한다. 지금 나는 장기 30대를 살고 있다. 처음보다는 이 말이 의미 있게 들렸으면 좋겠다. 내게는 정말 의미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진솔하긴 하나 조금 과장되이 느껴질 말로 표현하면, 앞으로 내가 스스로를 기쁘게 만드는 황홀한 삶을 사느냐 마느냐가 달린 문제다. 나는 30대에 하려고 했던 일들을 고스란히 해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장기 30대'라는 역사점 개념을 굳이 차용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자칫하면 30대 꿈의 목록을 고스란히 떠 안고 40대로 넘어가게 생겼다. (이미 넘어간 게 아니냐고 묻지 마시라. 나는 지금 장기 30대를 사는 중이니까.)


5.

나는 미처 해내지 못한 과업을 완료하기 전에는 세월과 타협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나이듦과의 결투가 아니다. 나는 탈모, 주름살, 노안과 평화롭게 지낼 마음의 준비는 해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면 닥치면 일시적인 감동의 동요는 있을 테지만.) 결투와 같은 경쟁적인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태하고 끈기 없는 내게는 종종 필요한 단어이기도 하다. 장기 30대의 실체를 이런 단어로 표현하자면, 나는 신체적 노화가 아니라, 평생을 따라다닌 나의 성격적 약점들과 한바탕 겨뤄보고 싶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3無와의 결투다. 끈기없음, 용기없음, 숫기없음! 자신감은 있지만 이 녀석들이 너무 빈약하여 삶도 시들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나의 30대에 대한 자가진단이다. 지난 10년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생겨난 것도 따지고 들면 세 가지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도 저 3無를 달고 산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저들과 동행할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정복하겠다는 마음은 없다. 지혜롭고 행복한 '동행'을 위해 한번 진하게 겨뤄볼 생각이다. 다투고 난 후에 우정이 깊어지듯, 겨뤄본 이후의 단단해질 내 인생을 기대한다. 그리고 노래한다. 나의 슬로건을! (연지원)


약점을 버리려 말라. 동행하라.

약점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하라.

그러기 위해 약점과 뒹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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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