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전가였다. 자연스럽게 과거형 동사로 표현하게 된다. 하루이틀의 생각이 아니지만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다시 비전가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떠한가? 비전가라 하기엔 부끄럽고 부족하다. 겸양이 아닌 현실이다. 세상을 향한 공헌이 아닌 내 작은 세계(나, 가족, 우정, 지인들)로 한정해도 마찬가지다.  

20대를 이상주의자로 살았다. 현실은 잘 알지 못했기에 한껏 이상을 품었다. 원대하게 꿈꾸었다. 내가 원했던 직업을 갖게 되어 기쁘지만, 더 많은 꿈들이 실현되지 못하고 가슴에만 남았다. 매년 책을 출간하고 싶었고 자주 여행을 다니고 싶었지만, 그리 살지 못했다.

30대는 현실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리 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삶이 나를 현실인식의 여정으로 이끌었다. 일과 사랑에서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다. 상실과 아픔도 많이 겪었다.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한 젊은 이상주의자의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후회스러운 선택들이 떠오른다. 너무 많은 책들을 사들였고, 순간적인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고, 많은 시간을 눈물로 보내고 말았다.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어리석은 채로 지나온 시간들이 아쉽다.

절절하게 한스러운 일도 있다. 30대 중반에 절친한 친구와 사별한 일이 그렇다.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삶의 무상함이 찾아와 3년이 지난 지금도 힘겹다. 내 삶을 잠시 되돌아본 이유는 앞을 내다보기 위함이다. 나는 다시 비전가가 되고 싶다.

비전가는 현실주의자와는 다르다. 바라보는 지향이 다르고, 선택의 기준이 다르다. 현실을 고려하는 선택과 이상을 추구하는 선택은 전지의 양극처럼 서로를 밀어내곤 한다.  몽상가와 비전가도 다르다. 몽상가는 꿈꾸는 사람이나, 비전가는 꿈을 실현한다.

이상주의자와 비전가도 다르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에 눈이 어둡지만 비전가는 현실을 직시한다. 삶의 고통스러운 면을 경험하지 않고, 세상의 어두운 구석에 눈을 감고서 이상주의자로 살기란 얼마나 쉽던가.

현실을 기만하며 긍정을 발휘한다고 해서 비전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낙관주의자일 뿐이다.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여 성과를 달성해야만 비전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성취가일 뿐이다.

비전가는 자신의 원대한 이상을 품은 동시에 꿈을 실현하게 만드는 과업에 뛰어드는 사람이다. 그들은 과감하게 꿈을 꾸고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한다. 꿈을 실현을 위해서는 현실인식이 필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비전가는 자신의 이상을 부양하기 위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활동한다. 비전가는 현실인식과 이상추구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지 않는다. 가슴에 이상을 품고 두 발로 현실의 땅을 탐험한다. 비유컨대 비전가는 허공에다 성을 짓고 그 아래에 주춧돌을 쌓아가는 사람이다.

비전가들이 종종 허풍쟁이로 보이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한 비전을 보고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람들의 평판이 아니라 시간만이 비전가를 구분한다.

힘겨웠던 3년이 떠오른다. 지난 날의 힘겨움에도 이면은 있다. 그 날들은 삶의 현실에 눈뜬 시간이었다. 이십 대의 이상주의에다 삼십 대의 현실 인식을 장착했으니 이제는 비전가가 될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위대한 비전가는 좌절하고 절망해도 여전히 자신의 꿈을 향해 고개를 든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보련다. 필요 이상의 위로를 구하지 않고, 실제 이상의 엄살을 부리지 않으며.

다시 꿈을 꾸련다! 수없이 꾸었다가 좌절한 꿈을 다시 꾼다. 이때 필요한 것은 좌절의 과거를 잊는 뻔뻔함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의 떨림과 두근거림을 맛보며 살고 싶다. 가슴 속에 꿈을 지닌 자의 열정을 쫓아 보고도 싶다.

아직은 내 삶과 글에 비장함이 감돈다. 긴장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실패와 자격지심이라는 중력이 나를 자꾸 아래로 끌어당긴다.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 엄숙하고 심각하다.

하나씩 하나씩 마음 속 소원을 실천하다 보면 명랑과 웃음을 되찾으리라. 가슴 깊은 곳에 허전함이 있을 뿐 지금도 날마다 웃는다. 나는 가슴 깊은 곳의 빈 자리를 기쁨과 웃음과 의미로 채워넣고 싶은 것이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을 행복하게 살고 내일을 희망하는 인생! 절망과 무상함의 사막에 기쁨과 희망의 꽃을 피워내기! 과연 원대한 비전이다. 삼십 대에 엄마, 아빠, 선생님 그리고 절친을 잃은 나에게는 정말 그렇다.

가만히 읊조린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듯이,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보자. 이리 말하고 나니 떨린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낯선 회의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내가 다름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정신이 비전가의 모습이리라. 무모할수록 노력하고, 허망할수록 찾고, 의심스러울수록 행진해 봐야지. 오늘 밤에 회의가 찾아와도 아침해와 함께 다시 꿈꾸어야지. 깊게 웃고 다시 춤추는 그날까지.

"나는 춤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 니체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