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햇살을 맞으며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진심 어린 박수를 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강연이 끝나고 진행자가 안내 멘트를 하는 사이 나는 화이트보드 뒤편으로 고양이 걸음으로 이동했다. 나를 발견한 참가자 분들이 따뜻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스스로의 강연에 자주 불만족스러워하는 편인데, 오늘은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그럭저럭'이라는 말이 붙인 건 내내 '희열'이었다가, 마지막 시간에 '선전'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나는 희열 - 선전 - 선방 - 절망, 으로 강연을 평가한다. 참가자 분들의 반응과는 별도로.)

행복감만이 찾아들면 좋으련만, 피곤함도 나를 껴안았다. 일방적인 접근이다. 나는 거부했지만 녀석이 달려들었다. 힘이 없어서 뿌리칠 수도 없었다. 이럴 때엔 얄밉다. 잘 진행된 강연 직후의 기쁨을 좀 더 음미하고 오후를 생산적인 업무 시간으로 보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광진교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풍광도 신체적 피로를 달래주진 못했다. 다리도 아프고 몸도 나른하다. 10여년 전 강연을 한창 많이 할 때에는 하루 세 번의 특강도 진행했는데(4번까지도 했으려나, 가물가물) 요즘엔 엄두조차 안 난다.

저녁이면 회복되고 이튿날이면 멀쩡해지니 만성피로는 아닌 것 같지만, 분명 20대의 체력과는 다르다. 신체적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다. 카페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스타벅스에서 '레드 밸런스'를 샀다. 건강식 과일주스다. 이때를 대비한 비상간식도 있다. 가방에서 닥터유 에너지바를 꺼내서 베어 물었다. 영혼의 생기도 불어넣어야 했다. 무엇을 들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음악은 폴 데스먼드의 <Tangerine>이다. '그래, 좋네!' 유투브를 열어 쳇 베이커와 협연한 곡으로 골랐다. 첫 소절에서부터 전율을 느낀다.


아! 좋다. 좋아하는 재즈를 감상하는 일은 건강한 포도당이 하는 역할을 능히 해낸다. 몸의 활력을 끌어올리고 기분을 황홀하게 만든다. 베이커와 데스먼드가 함께 연주한 곡으로는 <Autumn leaves>도 좋다. <Autumn leaves>라고 늘 좋은 것은 아니나 둘의 연주는 감미롭고 달콤하고 우아하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경쾌하기까지 해서 좋다. 수십 번도 더 들은 곡이다. 귀에 익은 <Autumn leaves> 선율이 흘러나오자 다시 한 번 온 몸에 전기가 흐른다. 이럴 때 놀라곤 한다. '내가 재즈를 이렇게 좋아했나' 싶다. 책 읽는 것만큼이나 좋다. 아... 이거 누구나 하는 얘긴데... 쩝. "취미가 뭐예요?" "독서와 음악 감상이요." 정말인데, 내가 들어도 시시하다. 답변은 시시해도 황홀감은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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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