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종인 역, <신을 구하는 자> The Saviors of God

(카잔차키스 전집 『향연 외』에 수록)

 

1.

강력한 책이다.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비범하기에 그렇다. 감히 선언하자면, 향상심이 강하고 자기 성장을 위해 실제적인 고민과 노력을 해 온 이들에겐 위로와 자극 그리고 달려갈 푯대를 선사하리라. 부연 설명 없이 선언과 명제만 나열되어 있기에 모호하게 읽힐 대목이 많지만, 두어 번 읽어도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난해하진 않다. 내겐 곱씹어 새길 문장이 한 둘이 아니었다. 거듭하여 읽고 싶은 책이 됐다. 사실 두 번째로 읽는 중인데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대체 한 번은 읽을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2.

<신을 구하는 자>는 카잔차키스(1983~1957)가 1923년에 쓴 책이다. 작가 자신을 위한 책이다. 마흔이 된 카잔차키스는 인생철학을 정리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구상했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신을 구하는 자>를 탈고한 직후부터 『오디세이아』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예술로 형상화할 계획을 세웠고 <신을 구하는 자>를 쓰면서 다듬은 생각들을 『돌의 정원』이라는 소설에 흩뿌려 놓았다. (에세이를 통해 생각을 정돈하여 전하고, 소설이라는 예술로 형상화했다는 점은 카뮈의 작업 방식과 닮았다. 누가 선취했는지는 모르지만.)

 

3.

철학적 에세이와 소설로의 예술화를 병행한 방식이 의미하는 바는 최소한 두 가지다. 첫째 톨스토이나 발자크처럼, 카잔차키스는 유미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오직 예술(唯美)’만을 외치지 않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소설가였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거나 사회를 관찰했으며 개인의 자기실현을 돕기 위해 소설이라는 예술을 탐구했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은 유미주의라는 구분이 무의미하다. 작품 자체가 매우 아름다우니까! 다시 말해 놀랍도록 예술적이면서도 유미주의 너머의 가치(종교, 시대, 삶과 인류)를 담고 있으니까.)

 

둘째, <신을 구하는 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해를 돕는 중요한 텍스트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여 둔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렇다. 카잔차키스도 두 권의 저서를 특별하게 여겼다. 카잔차키스 전문가인 ‘키먼 프라이어’는 이렇게 썼다. “<신을 구하는 자>와 <오디세이아>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지목하면서 후세 사람들이 이 두 작품으로 자신을 기억해 주기 바랐다.” (키먼 프라이어! <신을 구하는 자> 영역본 번역자다. 한국어판에도 30쪽에 달하는 그의 작품 해설이 실렸는데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요긴한 텍스트다.)

 

4.

『신을 구하는 자』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철학서에 가깝다. 칸트처럼 논리와 체계를 세우는 철학서나 플라톤처럼 대화를 통해 하나의 개념을 탐구하는 철학서는 아니다. 니체처럼 아포리즘으로 구성한 철학적인 선언이다. 이 책에서 유익을 얻으려면 달콤한 사탕을 즐기듯이 문장들을 음미하면 될 것이다. 사탕은 딱딱하다. 입에 넣은 순간엔 맛도 느껴지지 않지만 혀로 굴리며 조금 빨고 나면 달콤해진다. 깊은 사유를 담은 딱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물고 빨면 달달해진다. 다른 점도 있겠다. 사탕을 오래 빨면 혀가 얼얼해지지만, 일급의 사유들을 오래 음미하면 그윽해진다.

 

5.

<신을 구하는 자>는 프롤로그, 준비, 행진, 환상, 행동, 침묵 이렇게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내가 이해한 대로 저자의 전체 메시지를 표현하면 이렇다. “너 안의 향상심을 발견하고 더욱 키워라. 전사처럼 스스로와 투쟁하여 극기하라.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깨달아 행동으로 실현하라. 정신적인 성장도 놓치지 마라. 자기실현의 완성은 침묵이다. 내가 말하는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다.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최고의 경지를 뜻함이다. 투쟁도 소리칠 필요도 없는 경지!”

 

6.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카잔차키스는 ‘준비’ 장에서 인간의 세 가지 임무를 선언한다. 첫 번째 임무는 운명애(amor fait)다! “쓸데없이 저항하지 않고 마음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 여러 가지 제한을 인정하고 아무 불평 없이 일하는 것 - 이것이 인간의 첫 번째 의무이다. 불안정한 심연 위에다 원만하면서도 환한 마음의 지역을 구축하라. 아주 씩씩하면서도 근면한 자세로 그런 지역을 구축한 다음, 그 지역의 군주처럼 우주를 도리깨질하고 키질하라.”

 

두 번째 임무는 “고뇌 속에서 피를 흘리고 그 고뇌를 심오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중에 오고 또 가장 커다란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 이것이 세 번째 임무다.” 삶의 부조리와 허무 그리고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나아가라는 선언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지만 그래도 용감하게 당신의 뱃머리를 그 심연 쪽으로 돌려놓으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당신의 의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7.

‘행진’은 네 단계로 이뤄진다. 에고, 종족, 인류 그리고 대지다. 우리의 의식을 에고에서 벗어나 인류와 대지까지 확장시켜 주는 장이다. ‘환상’ 장에서는 향상심을 추종하되 홀로 투쟁하지 말고 동료들과 연대하고 역사적 위인들과 연대하길 권한다.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그리고 대지의 힘을 얻으라고 권한다.

 

이 모든 선언과 투쟁은 결국 행동하기 위함이리라. “이론의 가장 거룩하고도 궁극적인 형태는 행동이다.” “행동은 구원으로 가는 가장 넓은 문이다.” 여기에서 카잔차키스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한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 중 하나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이고 때론 보통명사다. “우리는 신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었다. 심연, 신비, 신비, 절대 암흑, 절대 광명, 물질, 정신, 절대 희망, 절대 절망, 침묵.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불렀다. 이 이름만이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우리의 가슴을 심오하게 울리는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8.

마지막 단계인 ‘침묵’은 정신적 수련의 최후 단계다. 다다르기 힘든 이상적인 단계. “침묵은 이런 뜻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완수한 끝에 마침내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노력의 최고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투쟁할 필요도 소리칠 필요도 없다. 그는 정적 속에서 완벽하게 원숙해졌다. 그는 더 이상 파괴당하지 않는 자, 온 우주와 영원히 함께 있는 자다.” 침묵은 극단의 경지다. “여자의 자궁 속에 안착한 남자의 씨앗”이 느낄법한 편안함! 최선과 최고가 머무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평온(serenity)이랄까. 침묵의 경지는 고정점이 아니다. “그 정상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심연의 위에 매달린 채 자랑스럽고 마법적인 주문을 노래 부르는 것이다.”

 

9.

인상 깊었던 대목 하나를 적어 둔다.

 

“나는 물질을 제압하여 그것을 내 마음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되도록 한다. 나는 식물, 동물, 인간, 신들을 마치 나의 자식인양 좋아한다. 나는 마치 온 우주가 내 몸인 양 내 주위에 깃들도 또 나를 따라 오는 것처럼 느낀다.” (p.189)

 

작품의 초반부에 나오는 대목인데 처음 읽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다시 읽다보니 의미심장했다. 후반부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용이 서로 연결되는 모양새인데 이를 보면 작가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책이 아님을 느끼시리라. (카잔차키스라는 작가의 성실함을 모르지 않지만, 이런 책들은 마치 현대미술을 대하는 기분을 들게 하지 않던가. ‘이거 정말 대단한 작품인 거야?’)

 

“너는 전투를 거듭하며 전쟁에 출정한 병사의 모든 의무를 수행했다. 너는 너의 몸이라는 작은 천막에서 싸웠다. 그러나 보라, 그 싸움터는 너무 비좁았다. 너는 숨이 막혔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뛰쳐나갔다. 너는 네 종족 위에 천막을 세웠고 너만의 손과 심장이 아니라 종족의 손과 심장이 가세했다. 너는 죽은 조상들을 되살려 피를 보충했고, 그런 다음에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자 모두와 함께 전쟁터로 출발했다. 갑자기 모든 종족이 너와 함께 움직였다. 인간의 성스러운 군대가 너의 배후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대지 전체가 군의 진지처럼 진동했다. 너는 까마득한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두뇌 속 전투 계획은 계속 가지를 쳐나갔다. 대치하던 모든 원정대는 네 가슴의 은밀한 진지로 합류했다. 너의 배후에 있는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군대가 싸우는 전선에 보급품을 보내기 위한 보급 부대로 조직되었다. 이제 온 대지가 너에게 매달려, 살의 살이 되고, 저 혼돈으로부터 소리 지른다.” (p.221)

  

10.

인용문에 대한 개인적 감상과 전체 소감을 덧붙임으로 글을 맺는다.

 

1) 먼저 유대 또는 연결에 대하여. 우주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에게만 함몰되면 세상을 잃을 것이다.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면 그와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리라. 카잔차키스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로부터 배우는 자들이야말로 위대함에 이르지 않던가. 니체가 떠오른다.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해 주는 가장 강력한 표지다. 내가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카이사르가 내 아버지일 수도 있으리라.”(<이 사람을 보라>)

 

2) 비유는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유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되 비유의 언저리를 확대 해석하면 오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우월함이 아니라(전투, 제압, 보급 등의 단어 때문에 하는 말이다) 타자와 자연과의 연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가 인생을 하나의 거대한 투쟁이라고 보긴 했지만 인간 우월주의를 강조하진 않았다. <신을 구하는 자>에서 이리 말하기도 했다. “대지의 목적은 생명이 아니다. 또 인간도 아니다.”

 

3) 이 책은 향상심을 가진 이들을 위한 책이다. 상승은 힘들다. 지금 일어서서 점프를 해 보라. 점프를 위를 향한 욕망의 발현이라고 해 두자. 이 욕망은 이내 좌절된다. 중력의 힘에 끌려 이내 땅으로 내려올 테니까. 나에게 점프는 한 인간의 성장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성장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과제가 자기를 넘어서는 일, 다시 말해 극기다. 타자와 연대하고 자연이 주는 에너지를 흡수할 줄 아는 이들이 ‘극기’라는 장기전에서 더 자주 승리하리라.

 

4) ‘낮은 여기’에서 ‘높은 저기’로 오르는 이들에게는 사다리가 필요하다. 의식의 사다리, 인식의 사다리, 열정의 사다리, 실천의 사다리, 의지의 사다리…! 어떤 책은 하나의 사다리다. 누군가의 영혼을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사다리! 카잔차키스의 <신을 구하는 자>도 그런 책이다. 그렇다면 향상심을 가진 이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가. 세상살이에 ‘반드시’가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생과 사 둘 뿐이리라. 하나를 더하자면 사랑의 실천을 끼워 넣고 싶다.) 인간은 책이 없어도 자기를 향상시킬 줄 아는 존재다. 니체는 말했다. “올라갈 사다리가 더 이상 없다면 너는 네 자신의 머리를 딛고 올라갈 줄 알아야 한다.”

 

5) 사다리 비유를 사유하고 실천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향상심은 자기를 향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 내면, 실력을 높여야지 높이만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명성을 향하는 마음이 앞설 수는 있지만, 평생 명성만을 쫓으면 거짓되거나 위험해진다. 세상엔 높이에 비틀거리며 고산병을 치르는 이들이 많다. 높이에 취하여 명성이 곧 자기 존재라고 착각하거나 위선이 탄로나 갑자기 추락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