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10.18 절실한 바람만 있을 뿐
  2. 2018.10.12 오늘 선택한 행복 (1)
  3. 2018.10.10 교감하는 작가가 생겼다

“마흔이 되어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왜 그런지 잘 몰랐다.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흐릿한 밤이 며칠 계속되면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몸은 피곤에 전다. 긴 잠 속으로 죽은 듯 빠져들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쉽던 일이 더 이상 쉽지 않게 되었다.” - 구본형


분명치 않은 이유라고는 했지만 구 선생님은 ‘모호함’과 ‘불안’이라는 단어로 마흔의 불면을 회상했다. 불면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어느 정도는 불면을 즐겼다. 한밤중에 일어나 음악을 들었고 고독을 즐겼다(그때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때때로 미래를 구상했다(마음 속 가장 먼저 떠오른 모습이 저술가였다).


불면이라는 불청객을 창조의 시간으로 전환시키는 선생님의 모습은 부러움과 위로를 동시에 안긴다. 불면증이 안긴 극도의 피곤한 일상을 지내셨으리라 생각하니 일종의 동질감이 먼저 느껴졌다. 글로 표현된 선생님의 불면은 막연한 ‘불쾌감’이나 ‘불안감’이었지 극심한 고통이나 외로움은 아니었다. 같은 불면증 환자로서 그가 처한 불면의 등급(?)이 내심 부러웠다.


불면증에 등급이 있다면 수면의 양과 질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태도 감안해야 하리라. (내면의 힘겨움으로만 따지면) 고민으로 잠이 오지 않는 경우는 3등급, 불안으로 잠이 오지 않음은 2등급이 되겠다. 고통 때문에 잠이 달아났다면 1등급이다. 고민, 불안, 고통의 구분선이 명료하게 존재하진 않겠지만 내게는 선연하게 차이가 느껴지는 세 단어다.


심장이 뛰고 마음이 고통스러워서 밤을 꼬박 새거나 새벽에서야 잠깐 눈을 붙이는 일은 고역이다. 뜬 눈으로 푸르스름한 새벽을 맞이하는 날엔 하루 종일 몽롱하게 지내게 된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다가 정신을 놓친다.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치기 일쑤다. 거리를 걷는데도 줄음이 쏟아진다. 요즘의 내 일상이다. 불면의 밤들을 벌써 3개월째 보내고 있다.


잠을 달아나게 만든 고통과 날마다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불면의 원인은 두 가지다. 상실의 슬픔 그리고 원통함이다. 상실의 괴로움이야 여러 번 체험하며 알아(?) 왔지만 억울함을 안고 사는 일이 이리 고통스러운지 미처 몰랐다. 고통에서 헤어나려고 수없이 다짐하지만 매일같이 쓰러지고 패배한다. 하루하루가 링이고 나는 날마다 패하는 권투 선수다.


대개 두세 시에 깬다. 잠이 깨면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한다. 뒤척이다가 결국엔 일어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때부터 미명이 밝아오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이 힘들다. 불면으로 맞는 새벽은 괴롭기 짝이 없다. 몹시 피곤하여 몸을 누이지만 눈을 감으면 잠이 달아난다. 온 몸을 몽둥이로 맞은 것도 같고 온 몸이 경직되어 한없이 뒤틀리기도 한다.


아침이 밝아 의식이 깨어나면 몸의 통증도 얼마간 사라진다. 눈이 시리고 몸이 찌뿌듯하지만 새벽의 몸 상태에 비하면 한결 낫다. 다행하게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네 시간 이상을 잔다. 여러 날을 연속으로 4시간 이상씩 잤던 적도 3개월 중 두 번쯤 있었다. 이것이 전부다. 나머지 날들은 괴로운 불면의 밤들이었다. 그제도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의식이 완전히 깨기 전에는 피곤에 전 몸이 따라주지 않고 의식이 깨어나면 마음이 도와주지 않는다. 몸은 불면으로 파김치처럼 시들어 있고 마음은 상실감과 원통함으로 쑥대밭이니까.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기란 아직 요원하다. 오늘 하루의 생존이 우선이다.


계획도 성찰도 무의미하다.

절실한 바람만 있을 뿐.


3개월 후 : 일상을 회복한다.

2개월 후 : 내 삶과 화해한다.

1개월 후 : 상실을 받아들인다.

오늘 : 살아남는다.


'™ My Story > 끼적끼적 일상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실한 바람만 있을 뿐  (0) 2018.10.18
오늘 선택한 행복  (1) 2018.10.12
마음아, 너는 어떠니?  (0) 2018.04.14
상실의 방을 명랑하게  (0) 2018.04.13
박효신, 집필 재개 & 명저  (2) 2018.04.06
은근히 설레입니다  (2) 2018.04.03
Posted by 보보

행복하게 ‘사는’ 일은 만만치 않지만 행복을 ‘맛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면에 가득한 슬픔에 침잠하는 대신 작지만 확실한 기쁨을 창조하면 된다. 상실과 고통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 대신 서랍 하나를 열어 깨끗이 정리하고, 대충 온 몸에 물을 끼얹는 대신 뽀득뽀득 비누칠 샤워를 정성스레 하는 일은 내게 행복이다. 행복이 깃들면 그 기쁨의 감정을 잡아채어 잠시 음미한다. 맛난 디저트나 그윽한 차를 맛보듯이 온 몸의 감각을 열어 향유하는 것이다.


‘아! 좋다.’


내 안에 슬픔과 외로움이 가득한데도 하루에 한 번은 이렇게 기쁨을 만끽한다. 행복한 삶이라고 해서 눈물이 없지 않듯 힘들고 불행한 삶이라 해서 웃음이 없지 않다.


오늘 선택한 행복은 조식이다. 할 일이 많은 날이라 간편하게 아침을 먹을 법도 했지만 느긋하게 조식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조바심을 내려놓고 한 시간을 뚝 떼어냈다.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향유했다. 갖가지 야채와 계란 요리를 먹었다. 커피 세 잔을 마시며 하루키의 소품 세 편도 읽었다(단편집 『반딧불이』에 실린 <세 가지의 독일 환상>). 마지막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계획하고 나니 딱 한 시간이 지났다.



'™ My Story > 끼적끼적 일상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실한 바람만 있을 뿐  (0) 2018.10.18
오늘 선택한 행복  (1) 2018.10.12
마음아, 너는 어떠니?  (0) 2018.04.14
상실의 방을 명랑하게  (0) 2018.04.13
박효신, 집필 재개 & 명저  (2) 2018.04.06
은근히 설레입니다  (2) 2018.04.03
Posted by 보보


“인생이 진정으로 꽃피는 시기는 마시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실컷 술을 마실 수 있는 기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그의 진지한 인생론은 아니다. 젊은 날 회상을 기록한 짧은 글에서 지나가듯이 던진 문장이니까. '젊은 날의 정열과 체력'을 향한 그리움이랄까 애틋함이 느껴진 글이었다. (그는 다른 글에서 자신의 첫 번째 좌우명은 “건강”이라고 썼다.)


진지한 발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짚어 두고 싶다. “어느 연령대를 살든 인생이 꽃필 수 있다!”고. 내가 이 말을 실제로 믿는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제 막 반평생을 살았을 뿐이니 정말 모르겠기도 하고, 한편으로 하루키의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도 있어서다. 오십 대에도, 칠십 대에도 인생이 꽃필 수는 있겠지만 노년의 활기와 정열은 젊은 날의 그것과는 미세하게(또는 눈에 띄게) 다르니까. 


하루키는 나이 듦을 받아들이며 살았다(그렇게 보인다). 받아들이지 못했더라면 소설은커녕 별다른 삶의 결실 없이 상실감과 외로움에 온 몸이 산화되었으리라. 이런 추측은 그가 젊은 날에 쓴 산문집을 읽으며 형성된 것이다. 그는 이별에 몹시 아파했고 죽음을 인식하고 살았으며 상실에 자주 고통스러워했다. 본인의 경험 얘긴 없었지만 자살에 대한 언급도 잦았다. 쓸쓸한 내용이 많았지만 그 글들을 읽으면서 하루키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다.

 

하루키가 나이 듦을 인정해 가면서도 젊음을 그리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서른 살 청춘이 “내가 너무 나이 든 것 같아”라는 말하더라도 하루키는 “나는 마흔이야”라고 핀잔을 주며 상대방의 감성에 찬물을 끼얹진 않을 것 같다. 하루키는 스물한 살에도 자신의 나이 듦을 애석해했다. “스물한 살의 나이는 충분히 젊지만 이전만큼 젊지는 않다. 스무 살이 젊음의 기점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젊음의 상실을 무서워했다. “우리는 해마다 날마다 나이를 먹어간다. 때때로 나는 한 시간마다 나이를 먹어가는 기분조차 든다. 걱정스럽게도 그것은 진실이다. 무섭다.” 나이 먹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인이 떠오른다. 그에 따르면 하루키 같은 사람은 ‘지나치게’ 예민하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지나침’은 종종 ‘깊이’의 재료가 된다. 이것은 지나침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타고 난 성향을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이해’다.

 

대답이 뻔한 질문 하나. ‘나이 듦을 무서우리만치 생생하게 인식하는 감성 덕분에 영혼을 울리는 문장이 탄생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하루키를 향한 동경과 주관적인 감탄 하나. ‘그토록 무서워하면서도 살아내었구나, 그는 결국 살아남았구나!’ 나이 듦에 심드렁한 사람보다는 예민한 사람의 생존이 어렵고 드물다. 그래서 반갑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인생길을 걷다 쓰러진 자리에서 교훈과 통찰을 주워 일어났을 테니까. 아프면서 깊어졌을 테니까.


사족도 하나. 오랫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루키가 아닌) ‘무라카미’라 불렀다. 언급하는 자리에 따라 ‘무라카미 씨’라고 말하기도 했다.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일본 문화를 들은 이후로 그의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하루키’라 부르기가 민망하고 어색했던 것이다. 오늘 부로 내 마음 속에서 ‘무라카미 씨’는 그냥 ‘하루키’가 되었다. 때때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한 사람은 쓰고 다른 한 사람은 읽음으로써 교감이 일어난다. 한 번의 만남도 없이.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