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12.14 한 해를 성찰하는 3단계 의식 (1)
  2. 2018.12.05 범람하는 글쓰기 강좌

“<올해의 10대 뉴스 작성하기>는 누구나 손쉽게 시도하는 방법이지만 결과물의 차이가 큽니다. 뉴스 작성이 ‘연말 이벤트’의 하나에 머물기도 하고 자기인식을 얻는 ‘깨우침의 장’이 되기도 하니까요. 3단계 역사의식을 실천할수록 더 많은 자기인식을 얻으실 겁니다.” (방법론만 읽으시려면 6번 글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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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포함하여 딱 20일이 남았습니다. 스무 날이 지나면 2019년이 됩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기 좋은 시절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돌아봐야 할까? 이 질문을 안고 오늘 아침을 보냈습니다. 꼭 돌아보아야 할까, 그냥 지나가면 안 될까? 성찰의 당위성 또는 타당성에 대한 회의를 끌어안고서 며칠 째 생각해서인지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얼마간을 글로 풀어내야 생각의 물꼬를 만날 것 같아 결국 오늘도 무언가를 끼적입니다.


1.
간혹 성찰을 폄하하는 시선을 만납니다. ‘젊은’ 행동파들은 종종 성찰의 중요성을 간과합니다. 성찰이란 행동의 훼방꾼에 불과하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보는 시간을 아까워하더군요. ‘부지런히 달려가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라니!’ 그들에게 성찰이란 행동이나 질주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행위입니다. ‘중년’의 행동파들은 다릅니다. 구슬(경험)도 꿰어야 보배란 걸 깨우쳤거나 생각 없는 행동으로 빚어진 과오를 맛보아서인지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2.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성찰을 폄하합니다. 비유컨대 성찰이란 차를 몰고 가다가 잠시 ‘정차’하여 목적지를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연료나 엔진오일이 부족하다면 채우고 갈림길에선 방향을 확인하는 거지요. 후진하거나 주차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찰은 퇴행이 아니라 더 효과적으로 진보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자기이해와 실천이 조화를 이룰수록 성장하겠지요. 자기이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앞으로의 날들을 잘 살아가기 위한 수단! “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돌아봐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입니다.


3.
성찰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거나 고통스러운 사건을 만났다면 성찰이 두려워집니다. 다시 그 사건의 현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요. 감정의 고통 또한 고스란히, 어쩌면 더 크게 느껴야 하니까요. 이럴 때의 성찰은 용기를 발휘한 결실이겠죠. 앞서 설명한 행동파와 신념파의 성찰 회피는 타고난 ‘성향’과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낯설거나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성찰을 멀리한 경우겠습니다. 이때에도 성찰을 시도했다면 자기인식이나 합리적인 논리와 가까워진 덕분이지 싶네요. 이상의 내용을 뒤집어 표현하면 이리 됩니다. 깊은 성찰이 드문 이유는 우리의 자기이해와 논리력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용기를 발휘하기도 어렵기 때문이겠죠.


4.
자기기만이 성찰을 방해합니다. 외면과 합리화는 대표적인 훼방꾼입니다. 외면 이야기부터 해 보죠. 불미스러운 사건은 자아를 둘로 분리시킵니다.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느끼는 자아 그리고 (삶은 계속되니까) 일상을 살아가는 자아! 두 자아는 삶의 다른 두 영역을 살아갑니다. 내면의 고통을 느끼며 개인적인 시간을 살고 최대한 힘을 발휘하여 대외적인 시간을 삽니다. 이중성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정직과 자기기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의식 없이 살려면 또는 자아 분열을 피하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첫째, 불미스러운 사건에 눈을 감으면 됩니다. 사건을 덮어버림으로 부조리한 진실을 자각할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거죠. 둘째,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적인 목소리에 재갈을 물려 앞으로의 일상에 몰입하자고 주술을 겁니다. 덮어버림과 재갈 물림 모두 ‘외면’이라는 자기기만입니다. 외면은 성찰 자체를 차단하지요.


5.
합리화는 성찰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기기만입니다. 인간은 감정적으로 선택하고선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는 존재입니다. ‘존재’라는 거창한 단어를 불러들인 이유는 합리화가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 중 하나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합리화는 불가피합니다.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엄격한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용납과 선처의 대상으로 봐야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합리화를 권장할 순 없습니다. 추구할 목표는 더더욱 아니죠. 합리화를 긍정해야 하는 이유는 합리화가 우리의 행복감을 높이기 때문이라면, 합리화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는 합리화가 우리로부터 지혜를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진실에 주목하지 않는 시선이 지혜로워지기는 힘드니까요. 진실에 눈 먼 시선은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기 십상입니다.


6.
십년 넘게 어른학생들과 인생 공부를 함께하면서 성찰을 강조해 왔습니다. 중요성만 강조해서는 곤란하여 수년 전부터는 성찰의 방법론과 철학을 역설했고요. 성찰의 방법론 하나로는 월말에 ‘이달의 3대 뉴스’를 쓰고 연말에는 ‘올해의 10대 뉴스’를 작성하는 겁니다. 누구나 손쉽게 시도하는 방법이지만 결과물의 질은 저마다 다릅니다. 뉴스 작성이 ‘연말 이벤트’의 하나에 머물기도 하고 자기인식을 얻는 ‘깨우침의 장’이 되기도 하니까요. 깨우침의 장으로 만드는 방법은 3단계의 역사의식을 배워가는 겁니다. 뉴스 하나하나를 작성할 때 적용할 지침입니다.


1단계 : 기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것. 더하거나 빼거나 기만하지 말 것. (정직하게 사실을 기술하지 않으면 이것은 자기 ‘역사’가 아니라 자기 ‘픽션’이 됩니다. 성찰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자기를 직시하는 자리겠지요.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체험하면 왜 많은 나라들이 역사를 왜곡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2단계 : 해석. 뉴스마다 인과관계를 파악할 것. 원인과 결과를 합리적으로 따져볼 것. 이것을 어떻게 성취했을까? 왜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까? 왜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이런 질문을 품고 이유와 원인을 최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찾아낼 것. 합리화를 덜어낼 것. (해석은 이성적인 논리적인 작업입니다. 지인과 친구들의 다양한 관점을 들으면 좋습니다.)


3단계 : 평가. 어떤 한 해를 보냈는지 올해의 가치를 매겨 볼 것. 자신의 가치관과 비전에 견주어 평가할 것. (해석은 객관적일수록 좋지만 상대적으로 평가는 주관적인 작업입니다. 자기 기준이 중요합니다. 자기 삶의 가치와 목표에 비추어 스스로 평가하면 됩니다. 정직한 기술과 논리적인 해석을 바라볼 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7.
얼마만큼의 시간 단위가 ‘돌아보기’에 적당할까요? 매 시간을 돌아볼 순 없습니다. ‘한 시간’은 몰입의 대상이지 돌아봄의 주기로는 비현실적입니다. 삶을 전혀 돌아보지 않다가 만년에 ‘평생’을 성찰하려면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겠지요. 많은 기억을 상실했을 테고요. ‘한 시간’과 ‘평생’을 양 끝으로 하는 ‘시간 단위 스펙트럼’에서 저마다에게 적합한 돌아봄의 주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겐 매주 그리고 연말이 좋습니다. 삶을 돌아보기에 맞춤한 시절입니다.


돌아봄의 가장 작은 단위는 하루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를 챙기는 형식이 ‘일기’겠고요. 회고록을 작성하는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찰의 가장 큰 단위는 한 해가 아닐까요? 한 해 이상의 세월을 돌아보는 경우가 드물어서 하는 말입니다.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지금이야말로 ‘성찰’을 실천할 적기입니다.



Posted by 보보


글쓰기 강좌가 범람합니다. 강물이 범람하면 강에 있지 말아야 할 것들이 떠다니더군요. 헌 신발, 폐기물, 조각난 목재, 부유하는 쓰레기들! 범람의 시대는 곧 주의를 요하는 시절입니다.


매년 증가하는 출간 종수와 수많은 글쓰기 강좌를 바라보다가 느낀 점 몇 마디를 적어 둡니다. 따옴표로 인용한 아래 문장이 글의 요지가 되겠습니다. ‘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저자의 권위와 희소성이 떨어지는 시대에 출간이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한 해 8만 종의 책이 출간되는 시대에 저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1.
글쓰기가 열풍입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책을 출간하려는 분들을 자주 만나는 요즘이네요. 글을 쓰겠다는 ‘욕망’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글쓰기를 권장하고 싶습니다. 글쓰기에 깃든 치유의 힘으로 자신의 아픔을 위로하고, 억울한 사정을 글로 표현함으로 고통을 달랠 수 있으니까요. 긴 글을 쓰다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더라도 포기하지 맙시다. 공부하면서 쓰면 되니까요. 새들은 무언가를 '잘 알아서' 노래하는 게 아닐 겁니다. '부르고 싶어서' 지저귀는 게 아닐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일 테죠. 쓰고 싶다면 한껏 즐기거나 공부하면서 쓰면 됩니다.


[Tip] 글쓰기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명저들이 있죠! 세 권이 떠오르지만 오늘은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권합니다.


2.
수요가 있는 곳에는 공급자들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수요가 많으면 다양한 수준의 공급자들이 참여하고요. 그들 중엔 하이에나 같은 공급자도 섞여 있을 테고요. 글을 쓰려는 욕망(수요)을 간파한 글쓰기 수업(공급)이 난무합니다. 예술가의 영혼이 아닌 장사꾼의 영혼을 지닌 선생들이 많아 보이기도 하고요. 자신의 필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보다는 강좌를 홍보하고 수강생을 모으려는 노력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선생이라면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쟁이의 눈에는 상스러운 수법이 훤히 보이는데 욕망이 간절한 수강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건가요?)


3.
모든 글쓰기 선생이 예술가(작가)의 영혼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예술가의 영혼을 가진 선생은 소명과 헌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일반인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침을 건네거나 두루뭉술하게 조언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어느 수준까지는 장사꾼의 영혼을 지닌 선생이 더 잘 가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화법이 뛰어나니까요. 수사적인 능력에다 학습력마저 갖춘 선생이라면 유용한 수업을 진행하죠. ‘저기 아래’에서 ‘여기 위’로 올라선 경험이 있고 자신을 오르게 만든 ‘사다리’를 파악하여 전달한다면 탁월한 선생이 될 테고요. 작가의 영혼이냐 장사꾼의 영혼이냐가 관건이 아닙니다. 훌륭한 장사꾼이 아니라 수준 낮은 장사치의 영혼으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Tip] 수강료가 터무니없이 비싸면 일단 의심하면 어떨까요? 책을 출간해 준다고 하면 좀 더 경계하고요. 물론 ‘필력’ 향상이 아니라 ‘출간’이 목표라면 그들의 조언을 따르면 되겠죠.


4.
잠깐 목표를 점검하는 일도 나쁠 건 없겠죠. 목표를 달성해도 예상만큼 기쁘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요. ‘출간’을 목표로 글쓰기 수업을 찾으신다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저자’의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잖아요. 10여 년 전 첫 책을 출간했을 때, 우리나라는 한 해 4만 종을 출간하는 ‘출판대국’(한 출판인의 표현)이었습니다. 4만 종을 내던 당시에도 ‘대국’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더 놀랍습니다. 한 해에 8만 종을 출간하는 나라가 됐으니까요(2017년). 


독립출판이 늘고 전자책 출간도 쉬워졌습니다. 저자가 되는 문턱이 낮아졌다는 말입니다. 출간 종수가 비약적으로 늘어가는 동안 독서 인구는 꾸준히 줄었습니다. (독서 인구의 감소는 통계가 필요 없습니다.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체감으로도 느껴지니까요.) 읽지도 못한 채로 지인의 책 출간을 축하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겠죠. 언젠가 한 정치인의 출간기념회에 참석하기로 했던 지인이 행사를 앞두고 가기 싫어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출간기념회 기피 현상이 정치의 세계를 벗어나 좀 더 확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들이 계속 증가한다면 말이죠.


5.
올해(2018) 읽은 최고의 칼럼은 소설가 박민규의 <백 년 동안의 지랄>입니다. “백 년 전의 조상님들은 꿈꿨을 것이다. 양반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들의 후손도 꿈꿨을 것이다. 대졸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러나 우리가 실지로 행한 일은 모두가 양반이 되고 모두가 대졸자가 되는 길이었다. 정부의 보조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 똑같은 성격의 일을 스스로, 백년 넘게 대를 이어, 자신의 피땀과 사비를 들여 이룩해 왔다는 사실이다. 정말 미안한 얘기긴 하지만, 나는 이것을 ‘지랄’이란 단어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다.”


구한말 시대를 살았던 조상들 대부분이 양반이 되는 가짜 족보를 샀습니다. 그리하여 전체 인구의 99%가 양반인 나라를 만들었죠. 100년 뒤에는 모두가 대학 진학을 부추겨 세계 최고의 대학진학률을 이뤄냈습니다.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1991년 33.2%였던 대학진학률은 2001년도에 최초로 70%를 넘어섰다가 2008년을 전후로 최고치인 80%를 경신했고 2017년에는 70% 정도까지 내려왔습니다.) 다시 박민규 씨의 글입니다. “양반이고 대졸자인 우리가, 양반인 데다 대학을 나왔는데도 그 어떤 대접도 못 받는 후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모두가 양반이 되어 아무도 양반이 아닌 세상에서, 다 같이 대졸자가 되어 누구도 대졸자 대접을 못 받게 된 세상에서 말이다.”


[Tip] 저도 질문을 품게 됩니다. ‘저자가 점점 더 많아지는 시대에 출간이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한 해 8만 종의 책이 출간되는 시대에 저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6.
(공급자든 수요자든) 문제는 욕심에서 발생합니다. ‘욕망’이 아니라 ‘욕심’ 말입니다. 욕망은 하고자 하거나 갖고자 하는 탐심입니다. 욕망이 곧 그의 고유함이겠죠. 저마다 다른 욕망을 갖고 있으니까요. 욕망이 우리를 추동합니다. 욕망이 우리는 어딘가로 이끕니다. 욕망에는 역동성, 생산성, 창조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반면 욕심에는 이러한 긍정적인 에너지가 없습니다. 욕심은 분수에 넘치도록 탐하는 마음입니다. 날씬해지고자 하는 바람은 욕망이지만, 식사량을 줄이지 않고 몸무게를 줄이겠다는 마음은 욕심입니다. 욕망은 우리를 향상시키지만 욕심은 우리에게 자주 근심과 번뇌를 안깁니다.


[Tip] 3천만 원짜리 과외를 받더라도 날마다 연습하지 않으면 피아니스트가 되기 힘듭니다. 훈련 없이는 뛰어난 실력도 없으니까요. 쉬운 길을 택하면서 고차원의 기술을 익히려는 마음은 욕심이지 싶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제 마음이 욕망인지, 욕심인지 살펴봅니다.


7.
책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출판사의 ‘안목’과 책방 ‘큐레이션’의 중요성을 곱씹게 됩니다. 안목 있는 출판사가 출간한 책들은 여전히 훌륭합니다. (바다출판사가 최근 수년 동안 출간한 단행본들과 잡지는 눈부십니다. 글항아리가 펴낸 책들의 깊이는 여전하고요.) 품격 높은 안목을 더욱 가꾸어가는 출판사들의 존재가치는 영원하겠죠. 독립책방의 큐레이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여과기능 없이 분야별로 진열하는 대형서점들과 달리 독립책방이 저마다의 색깔, 깊이, 테마, 취향을 좇아 구성한 큐레이션은 독자들의 문화 수준을 높일 테니까요. 


글쟁이로서의 바람도 있습니다. 자신을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은 유익하고 고상한 일입니다. 글쓰기를 배우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으려는 ‘욕심’ 대신 필연적인 훈련과정을 기꺼이 실천하겠다는 ‘욕망’을 품는다면 배움의 결실이 커지겠지요. 만약 제가 청강한다면 전체 글쓰기 강좌 중 상위 10% 안에 들 탁월한 수업을 찾으려 할 겁니다.


[TIP] 은유 작가의 글쓰기 수업이라면 권하고 싶네요. 이것은 직감입니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왠지 느낌이 좋습니다. 아래의 글쓰기 책들은 제가 읽은 명저들이고요.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바버라 애버크롬비 『작가의 시작』
앤 라모트 『쓰기의 감각』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