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10대 뉴스 작성하기>는 누구나 손쉽게 시도하는 방법이지만 결과물의 차이가 큽니다. 뉴스 작성이 ‘연말 이벤트’의 하나에 머물기도 하고 자기인식을 얻는 ‘깨우침의 장’이 되기도 하니까요. 3단계 역사의식을 실천할수록 더 많은 자기인식을 얻으실 겁니다.” (방법론만 읽으시려면 6번 글로 가세요.)


*

오늘을 포함하여 딱 20일이 남았습니다. 스무 날이 지나면 2019년이 됩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기 좋은 시절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돌아봐야 할까? 이 질문을 안고 오늘 아침을 보냈습니다. 꼭 돌아보아야 할까, 그냥 지나가면 안 될까? 성찰의 당위성 또는 타당성에 대한 회의를 끌어안고서 며칠 째 생각해서인지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얼마간을 글로 풀어내야 생각의 물꼬를 만날 것 같아 결국 오늘도 무언가를 끼적입니다.


1.
간혹 성찰을 폄하하는 시선을 만납니다. ‘젊은’ 행동파들은 종종 성찰의 중요성을 간과합니다. 성찰이란 행동의 훼방꾼에 불과하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보는 시간을 아까워하더군요. ‘부지런히 달려가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라니!’ 그들에게 성찰이란 행동이나 질주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행위입니다. ‘중년’의 행동파들은 다릅니다. 구슬(경험)도 꿰어야 보배란 걸 깨우쳤거나 생각 없는 행동으로 빚어진 과오를 맛보아서인지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2.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성찰을 폄하합니다. 비유컨대 성찰이란 차를 몰고 가다가 잠시 ‘정차’하여 목적지를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연료나 엔진오일이 부족하다면 채우고 갈림길에선 방향을 확인하는 거지요. 후진하거나 주차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찰은 퇴행이 아니라 더 효과적으로 진보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자기이해와 실천이 조화를 이룰수록 성장하겠지요. 자기이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앞으로의 날들을 잘 살아가기 위한 수단! “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돌아봐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입니다.


3.
성찰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거나 고통스러운 사건을 만났다면 성찰이 두려워집니다. 다시 그 사건의 현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요. 감정의 고통 또한 고스란히, 어쩌면 더 크게 느껴야 하니까요. 이럴 때의 성찰은 용기를 발휘한 결실이겠죠. 앞서 설명한 행동파와 신념파의 성찰 회피는 타고난 ‘성향’과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낯설거나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성찰을 멀리한 경우겠습니다. 이때에도 성찰을 시도했다면 자기인식이나 합리적인 논리와 가까워진 덕분이지 싶네요. 이상의 내용을 뒤집어 표현하면 이리 됩니다. 깊은 성찰이 드문 이유는 우리의 자기이해와 논리력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용기를 발휘하기도 어렵기 때문이겠죠.


4.
자기기만이 성찰을 방해합니다. 외면과 합리화는 대표적인 훼방꾼입니다. 외면 이야기부터 해 보죠. 불미스러운 사건은 자아를 둘로 분리시킵니다.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느끼는 자아 그리고 (삶은 계속되니까) 일상을 살아가는 자아! 두 자아는 삶의 다른 두 영역을 살아갑니다. 내면의 고통을 느끼며 개인적인 시간을 살고 최대한 힘을 발휘하여 대외적인 시간을 삽니다. 이중성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정직과 자기기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의식 없이 살려면 또는 자아 분열을 피하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첫째, 불미스러운 사건에 눈을 감으면 됩니다. 사건을 덮어버림으로 부조리한 진실을 자각할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거죠. 둘째,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적인 목소리에 재갈을 물려 앞으로의 일상에 몰입하자고 주술을 겁니다. 덮어버림과 재갈 물림 모두 ‘외면’이라는 자기기만입니다. 외면은 성찰 자체를 차단하지요.


5.
합리화는 성찰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기기만입니다. 인간은 감정적으로 선택하고선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는 존재입니다. ‘존재’라는 거창한 단어를 불러들인 이유는 합리화가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 중 하나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합리화는 불가피합니다.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엄격한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용납과 선처의 대상으로 봐야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합리화를 권장할 순 없습니다. 추구할 목표는 더더욱 아니죠. 합리화를 긍정해야 하는 이유는 합리화가 우리의 행복감을 높이기 때문이라면, 합리화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는 합리화가 우리로부터 지혜를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진실에 주목하지 않는 시선이 지혜로워지기는 힘드니까요. 진실에 눈 먼 시선은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기 십상입니다.


6.
십년 넘게 어른학생들과 인생 공부를 함께하면서 성찰을 강조해 왔습니다. 중요성만 강조해서는 곤란하여 수년 전부터는 성찰의 방법론과 철학을 역설했고요. 성찰의 방법론 하나로는 월말에 ‘이달의 3대 뉴스’를 쓰고 연말에는 ‘올해의 10대 뉴스’를 작성하는 겁니다. 누구나 손쉽게 시도하는 방법이지만 결과물의 질은 저마다 다릅니다. 뉴스 작성이 ‘연말 이벤트’의 하나에 머물기도 하고 자기인식을 얻는 ‘깨우침의 장’이 되기도 하니까요. 깨우침의 장으로 만드는 방법은 3단계의 역사의식을 배워가는 겁니다. 뉴스 하나하나를 작성할 때 적용할 지침입니다.


1단계 : 기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것. 더하거나 빼거나 기만하지 말 것. (정직하게 사실을 기술하지 않으면 이것은 자기 ‘역사’가 아니라 자기 ‘픽션’이 됩니다. 성찰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자기를 직시하는 자리겠지요.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체험하면 왜 많은 나라들이 역사를 왜곡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2단계 : 해석. 뉴스마다 인과관계를 파악할 것. 원인과 결과를 합리적으로 따져볼 것. 이것을 어떻게 성취했을까? 왜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까? 왜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이런 질문을 품고 이유와 원인을 최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찾아낼 것. 합리화를 덜어낼 것. (해석은 이성적인 논리적인 작업입니다. 지인과 친구들의 다양한 관점을 들으면 좋습니다.)


3단계 : 평가. 어떤 한 해를 보냈는지 올해의 가치를 매겨 볼 것. 자신의 가치관과 비전에 견주어 평가할 것. (해석은 객관적일수록 좋지만 상대적으로 평가는 주관적인 작업입니다. 자기 기준이 중요합니다. 자기 삶의 가치와 목표에 비추어 스스로 평가하면 됩니다. 정직한 기술과 논리적인 해석을 바라볼 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7.
얼마만큼의 시간 단위가 ‘돌아보기’에 적당할까요? 매 시간을 돌아볼 순 없습니다. ‘한 시간’은 몰입의 대상이지 돌아봄의 주기로는 비현실적입니다. 삶을 전혀 돌아보지 않다가 만년에 ‘평생’을 성찰하려면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겠지요. 많은 기억을 상실했을 테고요. ‘한 시간’과 ‘평생’을 양 끝으로 하는 ‘시간 단위 스펙트럼’에서 저마다에게 적합한 돌아봄의 주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겐 매주 그리고 연말이 좋습니다. 삶을 돌아보기에 맞춤한 시절입니다.


돌아봄의 가장 작은 단위는 하루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를 챙기는 형식이 ‘일기’겠고요. 회고록을 작성하는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찰의 가장 큰 단위는 한 해가 아닐까요? 한 해 이상의 세월을 돌아보는 경우가 드물어서 하는 말입니다.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지금이야말로 ‘성찰’을 실천할 적기입니다.



Posted by 보보

“대재앙이 다가온다면 당신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1922년, 파리의 저명한 신문 <비타협>이 여러 인사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생기는 갑작스러운 삶에 대한 애착을 설명함으로 답변을 대신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삶은 갑자기 놀라운 것으로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살아있음은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연애, 연구거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지! 언젠가 할 거라는 확신으로 끝없이 미루는 우리의 게으름은 진실을 숨겨 버립니다.


만약 미루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협이 생기면 세상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아, 대재앙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갤러리를 방문하고, X양의 발아래 우리를 던지고, 인도로 여행을 떠날 텐데요.


실제로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다시 일상적인 마음가짐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요. 무신경이 소망을 죽입니다(Negligence deadens desire).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대재앙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죽음이 당장 오늘 밤에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지구의 멸망 없이도 우리가 인간의 필멸성을 상상할 수 있다면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일상을 재편할 테지요.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습관적인 믿음, 다시 말해 무신경한 부주의를 던져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시도하지 못했던 수많은 가능성에 도전하지 않을까요? 


알랭 드 보통이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 (How to love life today)"으로 건넨 이야기들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상상은 현재를 아끼고 몰입하는 비결이지 싶습니다. 저는 이사를 떠나려 할 때마다 그간 살았던 동네가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언젠가 이 지구를 떠날 때에도 그러겠지요.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상상입니다.(2014. 10. 30)

Posted by 보보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 『그리스인 조르바』 8장 中 (이윤기 역)




유재원 교수님과의 대화는 너무나도 지적이어서 설렘과 흥분을 맛보곤 합니다. 내 안의 지적 욕망이 모두 기립하여 춤을 추거든요. 잠시 ‘지성인’이 된 느낌입니다. 오늘 아침에 누린 한 시간의 모닝 리추얼은 잠깐이나마 나를 ‘수행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독과 침묵의 시간 덕분입니다. 창밖을 바라보니 가을비가 내리네요. 이예은의 <Autumn Leaves>를 듣기에 맞춤한 날입니다. 지금의 난 재즈를 감상하는 ‘예술 향유자’입니다. 




카잔자키스의 말처럼 인간의 영혼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지나 봐요. 짜릿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 또 다른 무엇이 내 영혼을 눈부시게 만들까? 여러 지인들과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 그리고 몇 권의 책이 떠오르네요. 가을이 떠나기 전에 그들을 찾아 나서야겠어요. 그들과 만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만 이번에는 생각에만 머물지 않으려고요! 다르게 살아야 다른 결실을 얻을 테니까요. 


Posted by 보보

우리는 세상의 모든 미덕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하고 체험합니다.

 

'얄팍한 관계'만 맛본 이들도 우정을 알고 체험했다고 말하지만 '지상 최고의 친밀함'을 맛본 이들 역시 우정을 알고 체험했다고 말합니다. 표현은 같아도 실상은 다릅니다. 얄팍함이든 절친함이든 우정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지만 둘은 서로 다른 관계라 할 만큼 상호 교감이나 신뢰의 정도에서 차이가 크니까요. 교양인과 초등학생이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더라도 서로 다른 언어생활을 영위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정, 정직, 용기, 감사… 이러한 미덕들을 처음 듣는 사람은 없죠. 자주 들었고 얼마간은 실현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 미덕들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아는지, 어떤 수준으로 경험했는지는 캐묻지 않은 채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하죠. 하나의 미덕을 모른다는 사실은 큰 문제는 아닙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이중의 무지) 상태야말로 문제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미덕이 드문 이유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실현하기란 어려우니까요.

 

우리는 ‘깊은 미덕’을 만났는데도 자신이 체험한 ‘얕은 수준’의 잣대에서 바라봅니다. 때로는 서둘러 판단하고 맙니다. “이건 나도 잘 알아.” 또는 “이건 새로운 건 아닌데!” 라고 말합니다. 아쉬운 반응입니다. 지금껏 알지 못한 경지를 체험할 기회를 놓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지성을 닦거나 지혜에 다가서는 길은 새로운 단어를 발견하려는 정열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미덕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인식하고 진득하게 체험하는 여정일 겁니다. 오늘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아는가, 무엇을 알고 싶은가?’ 라고.

어떤 것보다 먼저 사랑과 우정을 새롭게 알기를,

그리고 감사를 더욱 잘 알기를 기도하면서.

Posted by 보보


“오늘날 첨단 디지털 기기들이 전 세계 사람들의 주의를 흩트려놓고 있다. (…) 디지털 기기가 요구하는 순간적인 관심이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고 원하는 대상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 즉 우리의 집중력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저명한 대니얼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이 자신의 저서 『포커스』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 말이다. 우리의 집중력이 어떠한 현실인지 파악하기 위해 굳이 세계적 심리학자의 말에 기댈 필요도 없다.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의 다양한 유혹과 교류가 집중력을 빼앗고 있음은 약간의 진솔한 성찰만으로 가능하니까.


골먼은 이런 연구 결과를 전한다.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은 20~40퍼센트의 시간 동안 다른 곳들을 돌아다닌다. 더 많이 돌아다닐수록 당연히 이해도가 떨어진다.” 산만한 주의가 집중을 떨어뜨린다. 비단 독서 뿐이겠는가. 집중력은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성과, 행복, 인간관계, 내적 안정 등 거의 모든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집중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려 연마할 가치가 충분한 능력이다. 계속 희소해지는 능력이고, 좋은 삶에 필수적인 능력이니까. 그러니 제안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집중력에 관한 제안 하나를 건네는 걸 이해해 주시리라. 나는 다음의 3단계 노력을 날마다 실천하고 있다. 나 역시 집중력 빈곤자기에.


첫째, 자신의 업무를 창조적 업무와 반응적 업무로 구분하라. 자신의 역할을 살펴 핵심 과업과 덜 중요한 과업으로 구분해도 되겠다. 보고서 작성은 창조적 업무고 이메일이나 SNS 회신은 반응적 업무다.


둘째, 프라임 타임을 결정하라. 하루 중 에너지가 가장 충만한 때로 두어 시간 선정하면 된다. 아침 2시간도 좋고, 오전 한 시간 오후 한 시간으로 정해도 좋다.


셋째, 집중하라. 일이든 독서든 대화든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라. 주의가 산만해져도 괜찮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주의가 산만해지는 자신을 주의하면 된다. 주의에 관한 주의, 그것이 집중이다.


시작은 작고 수월해야 한다. ‘30분 집중하기’부터 시작해도 좋다. 집중력은 점점 더 희소한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 집중력은 점점 강력한 경쟁우위가 되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굳이 경쟁력 운운할 필요도 없겠다. 집중력이 커질수록 삶의 질이 달라지니까.


덧. 집중력을 다룬 책 한 권을 추천하고 싶다. 본문에선 언급한 『포커스』는 집중과 주의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 신뢰 있는 주장을 체계적으로 담은 게 책의 미덕이다. 보다 실천적인 제안을 읽고 싶다면 『집중의 힘』(조슬린 글라이 편/ 모멘텀)이 나을 것이다. 오류를 무릎쓰고 단순화하면, 집중의 정체를 연구하는 이는 『포커스』를, 직장이나 삶의 현장에서 당장 집중을 실천하려는 이는 『집중의 힘』을 잡으면 될 것이다. 소개는 두 권이지만, 추천은 한 권인 셈이다. 


Posted by 보보

나는 비전가였다. 자연스럽게 과거형 동사로 표현하게 된다. 하루이틀의 생각이 아니지만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다시 비전가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떠한가? 비전가라 하기엔 부끄럽고 부족하다. 겸양이 아닌 현실이다. 세상을 향한 공헌이 아닌 내 작은 세계(나, 가족, 우정, 지인들)로 한정해도 마찬가지다.  

20대를 이상주의자로 살았다. 현실은 잘 알지 못했기에 한껏 이상을 품었다. 원대하게 꿈꾸었다. 내가 원했던 직업을 갖게 되어 기쁘지만, 더 많은 꿈들이 실현되지 못하고 가슴에만 남았다. 매년 책을 출간하고 싶었고 자주 여행을 다니고 싶었지만, 그리 살지 못했다.

30대는 현실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리 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삶이 나를 현실인식의 여정으로 이끌었다. 일과 사랑에서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다. 상실과 아픔도 많이 겪었다.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한 젊은 이상주의자의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후회스러운 선택들이 떠오른다. 너무 많은 책들을 사들였고, 순간적인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고, 많은 시간을 눈물로 보내고 말았다.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어리석은 채로 지나온 시간들이 아쉽다.

절절하게 한스러운 일도 있다. 30대 중반에 절친한 친구와 사별한 일이 그렇다.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삶의 무상함이 찾아와 3년이 지난 지금도 힘겹다. 내 삶을 잠시 되돌아본 이유는 앞을 내다보기 위함이다. 나는 다시 비전가가 되고 싶다.

비전가는 현실주의자와는 다르다. 바라보는 지향이 다르고, 선택의 기준이 다르다. 현실을 고려하는 선택과 이상을 추구하는 선택은 전지의 양극처럼 서로를 밀어내곤 한다.  몽상가와 비전가도 다르다. 몽상가는 꿈꾸는 사람이나, 비전가는 꿈을 실현한다.

이상주의자와 비전가도 다르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에 눈이 어둡지만 비전가는 현실을 직시한다. 삶의 고통스러운 면을 경험하지 않고, 세상의 어두운 구석에 눈을 감고서 이상주의자로 살기란 얼마나 쉽던가.

현실을 기만하며 긍정을 발휘한다고 해서 비전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낙관주의자일 뿐이다.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여 성과를 달성해야만 비전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성취가일 뿐이다.

비전가는 자신의 원대한 이상을 품은 동시에 꿈을 실현하게 만드는 과업에 뛰어드는 사람이다. 그들은 과감하게 꿈을 꾸고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한다. 꿈을 실현을 위해서는 현실인식이 필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비전가는 자신의 이상을 부양하기 위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활동한다. 비전가는 현실인식과 이상추구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지 않는다. 가슴에 이상을 품고 두 발로 현실의 땅을 탐험한다. 비유컨대 비전가는 허공에다 성을 짓고 그 아래에 주춧돌을 쌓아가는 사람이다.

비전가들이 종종 허풍쟁이로 보이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한 비전을 보고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람들의 평판이 아니라 시간만이 비전가를 구분한다.

힘겨웠던 3년이 떠오른다. 지난 날의 힘겨움에도 이면은 있다. 그 날들은 삶의 현실에 눈뜬 시간이었다. 이십 대의 이상주의에다 삼십 대의 현실 인식을 장착했으니 이제는 비전가가 될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위대한 비전가는 좌절하고 절망해도 여전히 자신의 꿈을 향해 고개를 든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보련다. 필요 이상의 위로를 구하지 않고, 실제 이상의 엄살을 부리지 않으며.

다시 꿈을 꾸련다! 수없이 꾸었다가 좌절한 꿈을 다시 꾼다. 이때 필요한 것은 좌절의 과거를 잊는 뻔뻔함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의 떨림과 두근거림을 맛보며 살고 싶다. 가슴 속에 꿈을 지닌 자의 열정을 쫓아 보고도 싶다.

아직은 내 삶과 글에 비장함이 감돈다. 긴장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실패와 자격지심이라는 중력이 나를 자꾸 아래로 끌어당긴다.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 엄숙하고 심각하다.

하나씩 하나씩 마음 속 소원을 실천하다 보면 명랑과 웃음을 되찾으리라. 가슴 깊은 곳에 허전함이 있을 뿐 지금도 날마다 웃는다. 나는 가슴 깊은 곳의 빈 자리를 기쁨과 웃음과 의미로 채워넣고 싶은 것이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을 행복하게 살고 내일을 희망하는 인생! 절망과 무상함의 사막에 기쁨과 희망의 꽃을 피워내기! 과연 원대한 비전이다. 삼십 대에 엄마, 아빠, 선생님 그리고 절친을 잃은 나에게는 정말 그렇다.

가만히 읊조린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듯이,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보자. 이리 말하고 나니 떨린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낯선 회의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내가 다름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정신이 비전가의 모습이리라. 무모할수록 노력하고, 허망할수록 찾고, 의심스러울수록 행진해 봐야지. 오늘 밤에 회의가 찾아와도 아침해와 함께 다시 꿈꾸어야지. 깊게 웃고 다시 춤추는 그날까지.

"나는 춤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 니체




Posted by 보보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나는 너희들이 가고 있는 그 길을 가지 않으련다!

너희들은 내게 초인(위버멘쉬)에 이르는 교량이 아니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

영혼과 마음이 중요하다면서 신체적 건강을 간과하는 이들이 있다.

종종 신체 컨디션이 떨어져 울적해하면서도 여전히 영혼만을 중요시한다.

자신의 일상이 스마트폰에 의해 가장 급격한 변화를 겪었으면서도

철학이 세상을 바꾼다면서 물질 세계의 저력을 무시한다.

마음 먹은 대로 살아가지 못하면서도(대지의 법칙을 모르니 당연지사다)

세상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면서 일체유심조만을 강조한다.

답답하고 아쉬운 일이다. 세상의 반쪽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아쉬움!


결코 영혼과 정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니체처럼 "우리는 영혼이자 육체다"라고 시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니체는 대지와 신체를 찬미했다. 니체는 이렇게 썼다.

"너는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바로 자기(das Selbst)다."



[사족 : 읽을 시간이 좀 더 있는 분들을 위한]


1.

지난 세월 동안 신체적 아름다움을 간과해 온 날들이 아쉽다. 몸매 좋은 남자들이 수많은 여성의 눈길을 사로잡을 때 나는 무얼 했다는 말인가! 이것은 감탄이 아니다. 탄식이다. 나는 당시의 내 거처를 알고 있다. 도서관과 서점이 나의 놀이터였다. 어쩌자고 그리 많은 시간을 책들과 함께 보냈을까! 놀이터는 복수(plural)여야 한다. 책방 뿐만 아니라 체력단련장에서도 즐겁게 놀았어야 했다.


2.

내가 신체와 대지를 간과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서른 무렵부터 물질과 대지의 세계를 나 역시 찬미했다. 힘이 드는 과정은 질색이라 무거운 바벨을 들지 않았을 뿐 건강 관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식습관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썼다. 덕분에 건강한 식습관을 갖게 되었다. 나는 운동보다는 '활동' 예찬론자다. 많이 걸었고 자차 운전을 멀리했다. 한계는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근력이 줄어드는데 활동만으로는 근력을 키울 수가 없다. 최소한의 운동으로(힘이 드는 과정은 질색이니), 최소한의 필요 근력을 키우자.


3.

초인(위버멘쉬)는 "모든 생에 적대적인 형이상학적 가식을 버리고 사실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그리하여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원회귀가 야기하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인간"(정동호)이다. 위버멘쉬는 신이 아니지만, 범인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 자기극복의 끝판대장이다. 위버멘쉬는 지금의 내게 위로와 목표를 제시한다. 위버멘쉬가 될 정도의 비범함은 없지만, 지금 여기를 벗어나고픈 욕망은 품고 있다. 그 욕망이 꿈틀거린다.

Posted by 보보


건강 식단은 잘 이어지고 있다. 1일 3과일 먹기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끼니 역시 빠짐없이 균형식으로 챙겨 먹었다.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 일은 원래도 없었으니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에 대한 언급은 필요 없으리라. 앞으로는 더 건강한 식습관을 누리고 싶다. 6대 영양소에 대한 정교한 이해로 더 균형 있는 식단을 만들어가야겠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콜린 캠벨 저)를 조금씩 꾸준히 읽으면서 단백질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업그레이드할 생각이다. 


사실 건강식이야 오래 전부터 지켜온 습관이라 특별할 건 없지만, 운동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스쿼트와 플랭크를 한 달 보름 가까이 했더니 효과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뱃살이 줄었다. 플랭크를 견디는 시간도 늘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3분은 해내고, 가까스로 버티면 4분도 가능하다. 4월 19일부터는 '접시돌리기'도 시작했다. 운동을 하는 실제 시간은 짧지만(20분 내외), 운동하는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보자. 5월의 효과를 기대하며.


<신체 에너지 향상을 위한 5월의 목표>


- 『무엇을 먹을 것인가』 Part 1 읽기

- 6대 영양소 섭취를 습관화하기

- 푸시업에 최선을 다하기

- 플랭크 5분 시도하기 (3회 : 7일, 14일, 28일, 세 번의 일요일)



Posted by 보보

1.

화요일에 와우 독서수업이 있었다. <몸과 영혼의 에너지 발전소>를 읽은 소감을 나눴다. 몇몇 대목에 대해서 심도 깊은 토론도 했다. 책의 저자들(토니 슈워츠, 짐 로허)은 탁월한 책을 썼다. 자기경영에 대한 통찰이 깊고, 구체적인 사례가 풍성하다. 이들의 통찰 하나만 소개하자면, 저자들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것은 세 가지다. 자신을 전율시키는 비전을 가질 것, 자신에 관한 진실에 헌신할 것 그리고 꾸준히 실천할 것! (아, 책 얘기를 하니 할 말이 쏟아지는구나. 서평을 하나 써야겠다.)

 

2.

나는 23년째 모 은행의 고객이다. (24년인가?) 그 은행에서 인문학 특강을 했다. 중요한 파트너가 될지도 모를 컨설팅 사의 의뢰라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준비에 신경을 썼다. 교안을 업데이트한 것. (구체적인 자료의 시각화에 힘썼다.) 근무 후  저녁에 3시간 동안 진행되는 특강이라 만만찮은 강연이다.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 “일찍 마쳐주세요. 대선 토론 봐야 해요.” 압박이 아닌 부드러운 요청의 말투로 느껴졌다. “다 함께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조금 일찍 마쳐볼게요.” 나는 열심히 진행했다. 강연 후에 적어 둔 간략한 메모는 이렇다. “교안 업데이트를 완료했다. 꽤 선전했다. 청중 분들의 피드백만 좋다면 희열!” (강연에 대한 셀프 피드백의 기준은 이렇다. 희열 - 선전 - 선방 - 절망)

 

3.

목요일과 금요일은 학습조직 교안 제작에 몰입했다. 일찌감치 매달렸으면 결과물에 더욱 만족할 텐데! 아쉽기는 하나, 마무리되고 나니 홀가분하다. 덕분에 오랜만에 편안한 휴일을 보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싶은, 아니 나아져야 할 나의 치부다. 그것은 중요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습관이다. 매번 그리 살다보니 이제는 ‘습관’이라 표현해야 할 정도로 반복적인 패턴이 되어 버렸다. 부끄럽지만 들여다보아야 할 주제다. 더 늦기 전에 고치고 싶다.  

 

4.

토요일에는 독서 수업을 했다. 대상 도서는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이다. 수강생 분들이 책을 열심히 읽고 토론을 성실하게 준비해 와서 고마웠다. 텍스트를 세 번씩 읽고 오신 분이 여럿이었다. 우리는 한 페이지를 두고 한 시간 가까이 토론하기도 하고, 책장을 여기저기 오가며 저자의 메시지를 찾으려 노력했다. 나는 독서 수업을 할 때 행복해진다. 연말이면 내 식견을 따라 '올해의 책 Best 10'을 선정할 텐데, 『인생의 발견』은 상위권에 오르지 싶다.


요즘 ‘내가 책을 잘 읽는 편인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사실일까? 착각이면 또 어떤가 싶다가도(인간은 착각하는 존재니까) 이것만큼은 착각이 아니면 좋겠다. 나는 정말이지 책을 잘 읽는 독자이고 싶으니까. 서재인에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서재인이 되지 않고서 지성인이 되기는 쉽지 않을 터! 자연스레 그리고 새삼스레 다짐하게 된다. '독서 실력을 업그레이드하자!' 독서가로서의 최고 목표는 '니체와 푸코 읽기'다. (그 다음은 벤야민이다.)


책을 잘 읽는다는 느낌이 착각까지는 아닐지라도, 주관적인 판단일 수밖에 없음도 깨닫는다. 나에게 니체 읽기는 어려운데, 세상에는 니체를 잘 읽어내는 이들이 부지기수일 테니까. 현실인식이 짙어지니 의욕이 솟는다. (이것이 나의 기질이다. 어느 사회심리학자는 칭찬보다 진실한 피드백에 자극받는 이들을 '안정지향(prevention focus)'이라 칭했다. 내가 그런 부류다.) 지성에 관한 나의 꿈은 교양인이 되는 것이다. (통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리버럴 아츠주의자다.


5.

바쁜 한 주였다. 폭풍 같은 일정들이 지나갔다. 책 한 장 읽을 여유조차 갖기 힘들었다. 절정은 주말이었다. 새벽부터 오후 4시까지 워크숍 교안 작성에 매달렸다가 잠시 눈을 붙인 후 저녁 강연에 참석했던 금요일! 아침부터 시작된 수업과 저녁 뒤풀이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한 토요일! 그러고서 맞이한 오늘의 이 꿀맛 같은 휴일! 시장이 최고의 반찬이듯, 열정적인 노동이 휴식을 아름답게 만드는구나.

 

오늘은 아침의식을 자발적으로 건너뛰었다. 오후에 있던 약속마저 연기되어 종일 편안한 하루가 됐다. (진작 취소되었더라면 하루짜리 여행을 하고 왔을 텐데, 약속일에 임박한 취소여서 아쉽다.) 아침에는 느긋하게 신문을 읽었다. 모처럼만의 여유다. 대추토마토를 씻고, 오렌지와 사과 껍질을 깎았다. 4월 들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3종류의 과일을 먹었다. 건강을 위한 작은 노력을 실천하는 중이다.

 

오후에는 프로야구를 시청하다가 낮잠을 잤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즈음에 커피 한 잔의 여유가 그리워 카페를 찾았다. 『인생의 발견』 한 챕터를 읽었다. 챕터마다 영감을 안긴다. 읽을 때마다 사유거리가 풍성해져 아껴 읽고 싶은 책이다. 커피를 마시며 한 주를 성찰했다. ‘성찰’은 늘 나의 자기경영을 돕는다. (성찰을 주제로 특강을 열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가오는 한 주를 위한 계획마저 세우고 나니 행복해진다. 좋은 하루를 보냈다는 만족감!  


'™ My Story > 거북이의 자기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0) 2017.05.30
4월의 성찰 : 신체 에너지  (2) 2017.05.02
2017년 16주차 성찰일지  (0) 2017.04.23
모처럼만의 하루 성찰  (0) 2017.04.18
이번주가 전환점이 될까  (4) 2017.03.24
2017년 10주차 강연일지  (0) 2017.03.13
Posted by 보보

주간성찰이 습관화되니 일일성찰에도 욕심이 생긴다. 날마다 할 생각은 없다. 왠지 끌리거나 여유가 되는 날 또는 성찰의식이 차올라 잠이 오지 않는 날에만 끼적여 보련다. 마음 가는 대로! 일주일의 첫 날인 오늘(4월 18일)을 어떻게 보냈나.

1.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기차>를 두 번 읽었다. 어젯밤에 한 번, 오늘 아침에 한 번! <기차>는 오코너의 대다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의 미국 남부’라는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단편이다. 시대적 배경이 작품 이해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소설들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제안이 절실해진다. “항상 역사화하라!” 단편 하나 읽는데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야 하다니! 오코너 읽기의 어려움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오코너 읽기는 새로운 지식 습득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즐거움을 느끼려면 마음의 여유와 지적 호기심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작품의 배경은 미국 테네시 주다. 나는 열 쪽 남짓의 단편을 읽으며 구글지도에서 테네시 주의 주요도시를 찾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미국 남부의 문화에 대한 글을 찾아 읽기도 했다. 이 즐거운 작업을 일과가 시작되면서 중단해야 했다. 이럴 때 드는 생각! ‘내 직업이 영문학 교수였으면…’

2.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던 병원에 다녀왔다. 이것만으로도 뿌듯한 느낌이 든다. 건강관리에 꾸준히 신경 써서 신체적 에너지를 한껏 끌어올리고 싶다. 한 달 넘게 스쿼트와 플랭크를 실행하고 있다. 4월 들어서는 '1일 3과일'을 거른 날도 없다. 활력 넘치는 삶을 위해 이들보다 더욱 노력해야 할 목표는 어깨 통증 해소다. 자세 교정과 꾸준한 운동으로 꼭 치료하고 싶다. 올해는 건강검진과 치과 진료도 놓치지 말아야지! 하나의 실행이 또 다른 실행을 부른다는 느낌이 든다.

3.
모처럼 저녁 약속이 없는 날이라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3시간 가까이 집중하여 해야 할 일 하나를 완수했다. 뿌듯함은 찰나였다. (1초 아니면 3초?) 하루를 살뜰하게 보내지 못하고 늑장 부리다가 완료한 일이었기에, 양심이 성취감을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결국 <기차> 서평쓰기, 와우들 독서축제 읽기, 블로그 업데이트 등 몇 가지 일을 완료하지 못했다. 항상 계획을 높게 세우는 편이라 하루치 과업을 모두 완수하는 날은 드물다. 이를 감안해도 오늘은 아쉬운 날이다. 해야 할 일은 가까스로 해냈지만, 하고 싶은 일은 모조리 미완으로 남았다. 자기경영이 시시했던 날의 당연한 모습이리라.


'™ My Story > 거북이의 자기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의 성찰 : 신체 에너지  (2) 2017.05.02
2017년 16주차 성찰일지  (0) 2017.04.23
모처럼만의 하루 성찰  (0) 2017.04.18
이번주가 전환점이 될까  (4) 2017.03.24
2017년 10주차 강연일지  (0) 2017.03.13
여덟 권이라는 놀이터  (2) 2017.03.01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