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문학비평가 이명원 선생의 책 제목이다. 마음이 엄청 짜다는 말인가, 무슨 의미지? 도서관과는 어떤 관계고? 의문은 <내 안의 소금밭>이라는 글을 읽으며 풀렸다. 두 페이지짜리 짧은 글(책에 실린 상당수의 글이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서가에 꽂힌 오래된 책을 보면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심'이라는 단어와 글의 말미에 "마음이 소금밭"인데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을 "고통으로 속이 꽉 찬 개그맨이 사람을 웃겨야 된다는 아이러니"에 빗댄 걸 보면, 고통스러운 내면을 뜻하는 것 같다. 그리고서 이렇게 글을 맺었다. "내 안의 소금밭을 부지런히 갈기 위해서라도, 그 짜디짠 인생에 정직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허균의 말을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붓두껍을 닫는다고 문인이 죽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글을 쓸 당시에 이 걸출할 비평가의 개인사는 고통이 짙게 드리웠나 보다고 생각했다.그는 광대놀음 같은 글쓰기를 잠시 쉬고 싶었나 보다. 고통에 집중하고, 자기 인생에 정직하기 위해서라고 밝히면서. 그런데도 책은 계속 읽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가지 않던 도서관에 오랜만에 들른 까닭도 기분이 내키거나, 책을 읽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마음이 소금밭'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독서는 그에게 일종의 안정제였던 것!


염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의 소금밭 비유는 제대로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만약 '마음이 소금밭이어서(또는 이기 때문에)'라고 표현했다면 보다 직접적이고 의미 전달도 명확해진다. 반면 덜 문학적이 된다. "마음이 소금밭인데"는 다양한 해석을 부른다. '소금밭'이라는 현실과 도서관에 간 사건의 연관성을 다양하게 모색하게 된다. 소금밭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다, 라는 의지의 발현으로까지 해석하면 과장일까.


말이 조금 엇나갔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책을 읽는 행위가 독자에게 안심, 치유,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독서할 때, 그의 내면을 단정짓기가 어려워진다. 어떤 이는 한가로운 시간을 맞이하여 여가 생활이나 무위도식한 취미로 책을 읽겠지만, 누군가는 절절한 자기 극복의 의지로 책을 집어들었거나 또는 처절한 자기 위로의 일환으로 책을 읽기도 할 테니까.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선생의 말을 보자.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는가 하면, 독서가 가진 위로의 힘을 주장한다. "누군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이는 나만의 이유가 아니다. 누구나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상할 때 혹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 직전에도 책을 읽으면 위로 받는다. 기분이 전환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픈 상황에서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덜 아프게 된다."


정말 누구나 독서를 통해 위로를 얻는지는 모르겠다. 책을 전혀 읽지 않던 이들도 그러한지 궁금하다는 말이다. 나는 늘 생애 처음으로 독서하는 이들이 첫 독서 경험을 통해 영감, 위로, 에너지를 얻으려면 적합한 책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비독서인들이 삶의 괴로움을 만났을 때 자신에게 도움 될 책을 만날 확률이 늘 책을 읽어온 독서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 적합한 한 권을 만나기야 한다면, 독서의 위로 능력을 의심치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다양하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고, 서로 다른 것에서 위로를 얻는다. 누군가는 옷을 사면서 고통을 경감시키고, 누군가는 여행으로 자신을 달랜다. 어떤 학생은 음악을 끄고 공부하고, 어떤 학생은 공부할 때마다 음악을 켠다. 이러한 인간의 다양성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삶이 힘들 때에는 서점이나 도서관에 어슬렁거려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럴 마음이 아니다, 나는 지금 힘들다'고 말한다면, 나도 이렇게 말할 것만 가다. 저도 삶이 잘 굴러가서가 아니라, 힘들고 아파서 책을 읽습니다, 라고.


몸이 아프면 약을 먹기 위해서라도 밥 한 술을 입에 넣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삶이 힘들 때, 아픔을 견디고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면서 힘을 얻는다. 책 한 권으로 문제를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문제를 가진 채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다. 책이 상처가 없던 원래의 삶으로 되돌려주지는 못하지만, 상처를 싸매는 법과 상처를 안고 앞으로 걸어갈 힘을 얻을 수는 있다. 문학비평계의 황제들을 비판한 도서 『타는 혀』로 의미 깊은 논쟁을 촉발시켰던 걸출한 비평가도, 삶의 방식에 관한 주관이 또렷한 여성학 연구자도, 안심을 얻거나 아파서 책을 읽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위로다.


덧#1. 독서를 해 왔다면, 자신을 위로할 만한 책을 찾아낼 촉이 있으리라. 그러니 책을 읽지 않던 분들을 위한 글을 덧붙인다. 첫 책에서 기대할 만한 위로를 얻지 못하더라도 "첫 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을 기억하면서 두번째, 세번째 책까지는 읽어 가시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책을 주변의 독서가나 전문가로부터 추천 받으면 그나마 선택의 범위를 좁힐 수 있다.  


덧#2. 이명원 선생은 소금밭이어서 당분간 글쓰기를 쉬었다. 글쓰기가 위로를 주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고통스러울 때, 매문이나 기고를 위한 글쓰기를 하기는 힘들다. 치유나 성찰을 위한 일기쓰기처럼 자신을 위한 글쓰기는 독서만큼이나 안심과 위로를 준다. 어떠한 고통이냐에 따라 글쓰기를 잠시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으리라. (개인적인 경우겠지만, 나는 하드디스크의 자료를 유실했을 때 한 달 이상 동안 노트북을 켜지 않고 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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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비늘로 나를 반겨준 공천포 앞바다


무작정 제주에 왔다. 편도 항공편으로, 숙소 예약도 없이.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성수기가 아니니 숙소는 수두룩했고 렌터카 하루 이용료는 백반 값보다 저렴했다. 이번 여행은 첫째 날 점심 약속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 일정도 없다. 계획된 일정이 없을 뿐이지, 어딘가가 나를 부를 테고, 나는 무언가를 하면서 지낼 것이다.

 

서귀포시와 남원읍 사이에 위치한 공천포 식당에서 모듬물회를 먹었다. 소라와 전복이 들어간 물회는 상큼하면서도 신맛을 잘 먹지 못하는 내게도 맛났다. 식사는 세 명의 여인과 함께했다. 제주에 사는 와우팀원, 그녀를 찾아온 인도네시아에 사는 또 다른 와우팀원 그리고 엄마를 따라 하늘을 날아온 예쁜 아이였다.

 

우리는 창밖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멋진 남자 사장님이 친절하기도 하셔서 인상에 남는 곳이다.) 두 시간 후, 제주도민이 된 와우팀원은 신랑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일어나야 했다. 그 집에서 묵고 있는 인도네시아 아낙도 함께 나섰다. 햇살 좋은 오후 세 시를 향하여 가는 시각에 우리는 헤어졌다.

 

떠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야에서 사라진 후 마음에 들었던 카페를 찾아갔지만,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겨 문을 닫는단다. 아쉬움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 식당을 찾으려고 지도를 검색했을 때, ‘쇠소깍’과 ‘남원큰엉해안경승지’가 가까이 있음을 확인했었다. 가보았던 여행지라 목적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해안경승지 방면의 남원읍을 향해 해안도로를 달렸다.

 

드라이브를 즐기다 보면 이내 카페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건축학 개론>에 등장했던 카페 <서연의 집>이 근처에 있음을 알았지만 마음 끌리는 대로 드라이빙하는 방식으로는 찾을 수는 없었다. 결국 30~40분을 달리다가 해안가에 정차했다. ‘남원 카페’라는 키워드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상위에 3개의 카페가 떴다. 서연의 집, 와랑와랑, 소년감성 카페샐리!


 

세 카페 중 동선이 좋은 곳을 선택했다. 이름도 예쁘고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 보이는 <와랑와랑>이 5분 거리였다. 도착했더니 예상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오래 머물기는 미안한 아담한 공간이고, 사람도 많으리라 예상하여 일부러 큰엉해안경승지를 들렀다 오는 바람에 한 시간 남짓 밖에 앉지 못했다. 아쉬웠다. 카페를 좋아하는 내겐 다시 찾고픈 명소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화지만, 불현 듯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정확한 목적지가 없었다. 이 방향으로 가면 마음에 드는 카페가 나오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으로 출발했다. 결과는 시간 낭비였다. 바람과 낙관만으로는 <와랑와랑>처럼 외진 명소를 찾을 확률이 낮다. 어쩌면 많은 날들을 이렇게 살아온 건 아닐까? 명확한 비전이나 목표 없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내 인생살이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느꼈다. 긍정적이고 용기 있는 출발이 파라다이스 발견으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확률적으로는 방황에 그치는 경우가 더 많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오늘의 배움을 잊지 말자. 내가 어떤 곳에서 행복한가를 알고 여러 명소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목적지를 정한다면, 비전과 목표의 유익을 만끽하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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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이나 목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카페에서 커피잔을 들며 옛 직장 선배가 물었다. 얼마 전 이 질문을 주제로 50분짜리 특강을 했었다. 자신 있는 주제였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의견을 나누어야 할 여러 주제가 있었다. 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존재했지만, 질문을 던지는 선배의 표정이 진지했다. 나는 장광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정성을 다해 짧게 답변했다.

 

“비전과 목표의 장점은 분명하죠.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집중할 수 있고 낭비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잖아요. 하지만 목표 지향적인 삶은 환경 변화에 둔감하고 외부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어요. 헨리 민츠버그는 의도적 전략(Deliberate Strategy)과 창발적 전략(Emergent Strategy)이란 개념으로 ‘계획적인 삶’과 외부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삶’의 균형을 강조했어요. 한 마디로, 비전과 목표를 세우되 외부 환경을 관찰하라 정도가 되겠네요.”

 

어디에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무엇이 균형인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이다. 치우치면 그르친다. 목표 수립은 삶을 돕지만 목표에만 치우치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 세운 목표가 인생 전체를 고려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조화란 서로 다른 것들의 어우러짐이다. 의도적 전략(비전, 목표 수립)과 창발적 전략(환경 관찰과 기회 포착) 모두를 구사한다면 멋진 삶을 이룰 것이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균형은 언제나 필요하다. 앞서 선배가 던진 질문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다. 친한 사이라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대화 주제는 분명했다. 효율적인 의견 나눔을 위해 유인물까지 준비한 만남이었다. 질문은 주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곧 가치를 주제로 한 모임을 이끌어야 했던 선배에겐 중요했다. 준비된 의제를 잠시 밀쳐 두고 창발적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의외에 대화에는 고작 2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진솔하고 생산적인 대화는 관계가 빚어내는 선물이다. 미리 계획한 주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차단해서도 안 되고, 준비된 회의 안건이 있는데 무조건적으로 즉흥적 대화로만 빠져서도 곤란하다. 두 가지 전략을 유연하게 활용해야 한다. 삶을 돕는 도구도 마찬가지다. 성실한 독서는 삶을 돕지만 능동적인 행동도 삶을 빛낸다. 사유 없는 행동은 위험하고, 행동 없는 사유는 허망하다. 생각과 행동 중 무엇을 앞세워야 할까는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이 앞서나가든 다른 하나를 얼른 뒤따르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탁월함의 관건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는 이론가를, 조르바는 행동가를 대표한다. 어느 날 조르바가 말했다.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소리쳤다. ‘조르바 말이 옳아! 옳고말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어.’ (p.139)

 

두목은 이미 지금까지의 삶의 양식을 바꾸기로 결심한 터였다. 더 이상 책벌레이고 싶지 않았다. 행동하는 삶을 열망했다. 책을 쉽사리 버리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양식을 권하는 조르바의 조언이 중요함을 인식했다.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새로운 양식으로 더욱 균형 있는 인생 식단을 구성하겠다는 고귀한 의식이다. 계획적인 준비나 그때그때의 상황 판단이나 모두 우리 삶을 돕는다. 균형이 서로를 보완한다. 균형 감각, 다시 말해 모순적 가치의 추구야말로 지혜다.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 - 조셉 캠벨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누가복음 6:26

“영적인 것을 사랑하면 세속적인 것을 얕보지 않으리라.” - 조셉 캠벨

“우리는 동시에 좌측과 우측으로 움직일 것이다.” - 제리 브라운

 

비전과 목표만이 아니라, 모든 미덕이 중요하다. 모든 미덕으로의 개별적인 몰입! 그것이 균형이다. 비전과 목표 수립은 중요하다. 균형이라는 지혜의 반쪽을 차지하니까! 균형은 획득하기 어려운 가치지만,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삶을 빛낸다. 균형의 획득은 두 다리를 얻는 것과 같다. 한 발로는 껑충껑충 뛰어야 하지만, 두 발로는 보다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달려갈 수 있다. (연지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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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 당신은 말이오. 당신 나름대로 먹는 걸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소만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까마귀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까마귀에게 일어난 일이라니, 그게 뭡니까, 조르바?” “말씀드리지요.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거지요. 그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어기적거릴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 - 『그리스인 조르바』(p.100)

 

조르바가 자기다움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까마귀가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렸다”에서 중요한 대목은 ‘거들먹거림’이 아니다. 거들먹거리든, 겸손을 떨든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비둘기처럼’이 관건이다. 까마귀는 자신이 아닌 존재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조르바에게 삶이란 자신의 내면세계와 일치해야 했다. 삶은 자기다워야 했다. 다른 사람처럼 사는 것은 ‘뒤죽박죽’ 인생이 되고 만다. 자기답게 걸으며 당당하게 살아야 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고 해서 인격적 삶이 된다거나 고상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다움의 영역이 아니라 인격, 태도, 사고방식의 문제다. 자기답게 살아도 욕을 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자기답게 살아야 할까?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어기적거림, 삐걱거림, 뒤죽박죽이 사라진다. 그래야 어기적거리지 않고 곧게 걸을 수 있다. 삐걱거림이 없어야 오래 걷는다. 오래 걸어야 많이 보고 느낀다. 곧게 걷는 자들이 자기를 직시하는 법이다. 반성과 교정은 걸어본 자들의 전유물이다. 인생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변화와 성장의 여정이다.

 

선의를 갖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도 어기적거림이 찾아들 수 있다. 스무 살의 나는 의욕이 충천했고 높은 이상을 품었다. 멋진 인생을 살고자 내가 추구할 가치를 세웠다. 한 성공철학서의 제안을 쫓아 14가지의 지배가치(자신의 행동을 지배할 가치)를 수립했다. 자의식이 강한 천성을 타고나 나의 내면과 모조리 불일치한 가치들은 아니었지만, 나의 본질에 가깝기보다는 멋진 말들의 향연이었다.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끌어온 언어의 조합에 더 공을 들였다. 결과는 어기적거림이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 뒤죽박죽 인생은 모면했지만, 까마귀 같은 모습도 연출됐다. 2~3년 후, 나는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이번에는 미국의 교육 사상가 파커 파머가 나를 이끌었다. 그의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는 책이 스물다섯 살 청년을 번개처럼 일깨웠다.

 

“세상에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도덕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인 삶이란 베스트셀러 처세서의 차례를 뒤적여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을 일일이 체크해 가며 교양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살다보면 우리가 너무나 미숙한 나머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어떤 가치를 버팀목처럼 세우고 그것에 의지해야 하는 순간이 있긴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순간들이 자주 되풀이 된다면 잘못된 것이다. 남의 인생을 살려고 하거나 추상적인 규범에 의존해서 살려는 사람은 십중팔구 실패하게 마련이다. 나아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p.15)

 

극단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단순한 도덕주의자’였다. 남의 인생을 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나는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살지는 못했다. 생각은 이상적이었고, 꿈은 추상적이었다. 추상적인 가치를 힘써 추구하는 일은 제법 대견한 일이지만, 달려갈 푯대가 모호해서인지 종종 실패했다. 파커 파머는 ‘까마귀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한 법을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밝혀 주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아무리 숭고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걸러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부여된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우리 안의 자아는 침범을 당하면 우리에게 저항할 것이다.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때로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우리 인생을 방해할 것이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제는 나의 두 발로 나에게 걸맞은 보폭과 모양새로 걷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어기적거릴 때가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 감을 때까지 어기적거리는 실수를 하게 될 테니까. 어기적거림에서 벗어나 얼른 당당함을 회복하면 그만이다. 파커 파머의 교훈들은 언제나 내게 위로와 방향을 건넨다. 그는 말한다. “소명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선물”이라고! “우리는 내면의 소리만 빼고 그 밖의 곳에서 들리는 말에는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고. (연지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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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을 넘겼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신체적인 어른들도 정서적, 사회적, 정신적 성장이 없다면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천 번을 흔들려도’ 어른이 되지 않는가 하면, ‘열 번의 흔들림’으로도 단단해지기도 한다. 해마다 똑같이 나이를 먹지만, 성숙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이는 무엇으로 어른이 될까?


얼마 전, 친구와 그의 30개월 된 아들과 함께 베이커리 카페에 갔다. 아이는 상황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짜증을 냈다. 먹을 때에는 조용했고, 만화를 볼 때에는 즐거워했지만, 원하는 상황이 아니면 참지 못했다. 아이는 참을성이 없다. 우리 주변에는 점잖다가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짜증을 내고 절제력을 잃는 어른들이 많다.


귀여운 아들 녀석이 빵을 먹다가 크림을 흘렸다. 아빠가 아이를 안고 있었으니, 나도 모르게 달려가 물티슈와 냅킨을 가져왔다. 아이가 흘렸지만, 어른이 닦았다. 아이의 실수나 잘못은 관대하게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범죄도 성인범죄자와 다르게 처벌 받는다. 아이에게는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책임지기를 회피하는 어른들도 많다.


아이는 순수하다. 다른 이들의 상황을 헤아리거나 배려하지 못한 채 인간의 타고난 본성대로 산다는 말이다. 아이는 이기적이다. 교육 받지 못하면, 아이는 자기 먹거리를 나누지 않는다. 부모가 나눠먹는 행위를 칭찬하지 않거나, 이기적인 행동마저 귀여워만 한다면, 배려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자라난다. 이타적 행위와는 거리가 먼 어른들이 부지기수다. 아쉬운 일이다.


1) 어른은 참을 줄 안다. 덥거나 배고프다고 짜증을 입에 담는다면, 참을성이 없는 것이다. 순간적인 충동에 지갑을 열었다가 이튿날에 후회한다면 신중함과 더불어 참을성을 키워야 한다. 새로 시작한 일이 힘들다고 하루 만에 관둔다면 둘 중 하나다. 참을성이 없거나 그 일이 정말 맞지 않거나.


애인이 헤어지자고 했다고 집에다 불을 지른다면, 참을성 여부를 떠난 미친 짓이지만, 핵심 원인은 참을성의 부재다. 핸드폰을 잠시도 내려놓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은데, 앞으로 참을성이 더욱 희소해질까 걱정이다. 부모가 되면 그나마 좀 더 어른이 된다. 아이 앞에서 “왜 이렇게 더워, 짜증 나”라고 말하는 20대는 있어도, 그런 엄마들은 드물다.   


2) 어른은 책임질 줄 안다. 성숙한 어른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의식하고, 소임을 완수하려고 애쓴다. 지각 없는 부모, 능력 없는 상사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지만, 책임감이 없는 부모와 상사는 용납하기 힘들다. 모두에게 불행을 부르기 때문이다.


책임지기는 일상에서 연습할 수 있다. 주도적으로 선택하기는 좋은 연습이다. 연인과의 데이트 코스를 계획하고 선택하는 일, 하다못해 함께 관람할 영화를 선택하는 일도 책임을 지는 훈련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상대방의 원성을 살 위험과 실수할 가능성에 직면할 용기가 선택을 이끈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어른이 되려는 노력이다.


3) 어른은 남들을 배려할 줄 안다. 다른 이들의 형편에 무감한 채로 자신의 기쁨과 고통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어른이 아니다. 감정 표현이 덤덤한 어른은 있어도 타자에 무관심한 채로 성숙하기란 힘들다. 성숙한 사람들은 많이 듣고, 적게 말한다. 말을 하더라도 타인의 관심사에 맞춘다. 배려는 성숙의 가장 확실한 표지다.


순수한 선의 만으로는 진정한 배려가 될 수 없다. 성숙한 배려는 (나의 마음 편함이 아니라) 상대의 원함에 맞출 줄 아는 인간이해로부터 나온다!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가 즐거워하면서 또는 기꺼워하면서 대답할 질문 하나를 묻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이타심이나 배려심이 있는가를 자문해야 한다는 표지다.


어른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하소연을 한다. “어른 되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에게 의지나 열망이 엿보이면 이렇게 대답한다. “맞습니다. 성숙은 손쉽게 얻어지지 않아요. 지름길은 없지만, 희소식도 있습니다. 어른 되기의 힘겨움은 어른이 되지 않은 채로 지내면서 만나는 고통보다는 덜할 거예요. 지금 당신이 겪는 많은 고통들이 미성숙에서 비롯된 문제들이니까요.”


인생살이는 종종 기쁨도 선사하지만, 만만치 않은 순간도 많다. 아이와 같은 태도로는 행복을 구가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어른이기를 바란다. 해마다 성숙하기를 꿈꾼다. 노력을 해야 하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숙하고 싶다. 미성숙한 사람들의 눈빛에는 종종 불안감이 깃든다. 자신감이 없어서 행동이나 선택이 오락가락 한다. 기본적인 배려조차 못할 때가 많아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반면, 성숙한 어른들은 고상하고 그윽하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어른들만이 진정한 자유와 공헌의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이 나를 추동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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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성과와 행복을 높이는 비결


1.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일은 가능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시에 책을 읽기는 불가능하다. 멀티태스킹은 신체적 활동과 정신의 작용 사이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의력을 요구하는 두 가지 일은 동시에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업무는 정신적 사고나 주의력을 요한다. 지식근로자들이 자신의 업무를 멀티태스킹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컴퓨터의 멀티태스킹 기능도 여러 창을 띄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 작업을 하려면 해당 창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때 다른 창은 비활성화된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멀티태스킹이 아니라 스위칭(재빠른 바꾸기)이라 불러야 한다. 나는 삶의 질을 높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한다. 멀티태스킹이든 스위칭이든, 세 가지를 놓치기 때문이다. 집중력, 친밀함 그리고 행복!


2.
멀티태스킹은 우리를 기만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기에 자칫 생산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착각이다. 생산적인 방식이 아니라 산만한 방식일 뿐! 드러커를 비롯한 수많은 전문가들이 ‘집중’이야말로 생산력을 높이는 핵심 역량이라고 강조했다. 멀티태스킹은 효율을 넘어 효과성과 삶의 질을 추구하려는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집중력을 앗아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집중력을 익히지 못한 이들에게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생산성이 정말 시시하다는 사실과 생산성이 엄청나게 높아질 가능성이 남았다는 사실!


3.
한가위 연휴 마지막 날, 다섯 명의 가족이 카페에 왔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정면으로 이는 테이블에 앉은 덕분에 자연스레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남자와 아이 그리고 여자 셋이었다. 여자는 장모님, 아내, 처제였다. 아이는 남자 품안에 엎드린 채로 잠을 잤다. 성인 어른 넷은 한동안 자신의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대화는 없었다. 10분쯤 지나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몸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머물렀다. 물을 마시러 오가는 사이에 슬쩍 장모님의 핸드폰을 보았다. 화면에는 포털사이트의 프로야구 순위 목록이 있었다. 요즘에는 같은 사무실에서도 카톡으로 업무를 주고받는다는데, 이들이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는 않았다. 카페에 머무는 동안 핸드폰을 보는 시간이 8할이었고, 대화는 2할 정도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함(잦은 스위칭)은 대화를 방해한다. 


깊은 관계가 선사하는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여러 카톡창을 잽싸게 들락거리며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친밀함인 줄 안다. 매튜 켈리는 친밀함의 7단계를 제시하면서 날씨를 묻는 진부한 관계를 1단계, 사실을 공유하는 관계를 2단계로 보았다. 반면,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는 관계는 3단계다. 사실의 교환은 안전하지만, 의견의 교환은 위험할 수 있다. 의견이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니까. 의견 교환 없이는 친밀함도 요원하다.


단계를 뛰어넘어 친밀함의 7단계를 살펴보자.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소원을 이해하여, 상대가 소원을 이뤄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하고 돕는 관계가 7단계다. 스위칭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면, 격려하고 돕기는커녕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공감하고 지지하는 일은 위대한 관계다. 그만큼 관심과 주의 그리고 노력을 요한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에 휘둘리기 십상이고, 정보화 시대는 점점 더 우리의 집중력을 앗아가고 있으니.


4.
행복이란, 한 번에 하나의 일에만 몰입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다시 말하건대, 행복은 ‘지금 무슨 일을 하는가’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느냐’에 좌우된다. 최근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들이 이를 증명하는 연구 결과도 내놓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붙들고 산다면, 당신의 인생 앞에 방황과 모색이 펼쳐질 것이다. (방황과 모색은 필요하고 어떤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방황과 모색만 있는 인생은 괴롭고 힘들다.)


‘지금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답하고, 그 일에 집중하라. 이것이 성과와 기쁨을 얻는 최고의 비결이다. 마치 다른 비결은 필요 없다는 듯이 한 번에 하나의 일만 수행하라. 정신이 산만해져도 괜찮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집중하는 사람은 없다. 저만치 주의력이 달아나는 게 보인다면, 다시 주의를 불러들이면 그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책상에서의 명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체험하다가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 집중의 삶을 산다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분별하는 감각도 키워진다.


5.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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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블랑은 커피 맛이 준수하다. 빵도 맛나다. 오늘도 마늘빵과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빵 접시는 비워졌고, 커피는 남았다. 식어도 맛난 커피다. 아껴마시던 중 날파리 한 마리가 커피 잔 안으로 날아들어갔다. 얼른 잔을 들었지만, 날파리가 커피에 빠졌다. 이미 젖은 날개의 안간힘으로 작은 동심원을 그리는 모습이 처량하기도 괘씸하기도 했다. 이런...!! 커피는 포기해야 했다.


아쉬움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럴 시간에 책 한 자라도 더 읽거나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었다. 하루를 오롯이 생산적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카페에 앉아 일하는 시간만큼은 불처럼 일하는 나다. 집중하여 일하다가 나도 모르게 커피를 마셨다. 두 모금째 마시다가 불현듯 날파리가 떠올랐다. '으악 날파리!' 나는 두 모금째 마셔 입 안에 머물던 커피를 잔에다 뱉어냈다. 두 눈 뜨고 초파리를 찾았지만, 녀석은 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치워야지'라고 생각했다가 벌어진 참사다. 우연이 빚어낸 소소한 일상이지만, 카페에서 초파리를 마신 남자는 의미심장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점심 약속 장소가 종로이기에, '오늘 반디앤루니스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미 영업 종료일이 지났구나!'


남자는 9월 13일에 영업이 종료된다는 얘길 지난 달에 들었다. 남자에겐 아련한 추억이 있는 장소였기에 '시간 되면 가 봐야지' 했었다. 시간이 나지는 않았고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남자는 자신의 미루는 습관을 바꾸고 싶었다. 유사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주가 추석 명절이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차' 싶은 순간이 있었다. 명절 직전에 날아온 신문에서 "답답한 고속도로, 우회도로 안내" 기사를 가위로 오려두었는데, 가져오지 않은 게다. '나중에 읽자'는 생각으로 훑어보지도 않았다. 길지는 않다고 해도, 기사를 오려내고 챙겨둔 시간이 무용지물이 됐다. 다행하게도 막히지 않은 시간대를 선택하여 달렸기에 정체 구간은 없었지만, 실행력 제로의 이 남자에게는 이 또한 교훈이었다. 휴게소에서 몇 마디를 기록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미뤄왔던가. 무언가를 지금 당장 한다면, 내 삶이 바뀔 것이다. '언젠가' 읽을 거리를 위해 '현재'를 투자해 스크랩을 했는데, 정작 읽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그 때 투자한 '현재'의 시간이 아깝다. 미래를 대비한 시간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저 내가 놓쳐버린 시간이 되고 말았다. 준비는 중요하지만, 그 준비 역시 지금 당장 해야 한다.


좋은 결실을 위한 준비는 필요하지만, 준비가 미루기를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 나처럼 '아직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준비만 하거나, 언젠가 좋은 때를 기약하며 미루기에 빠져들고 마는 이들에게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리스트 같은 것들도 지금 당장 해야 할 리스트로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닐까?"


반디앤루니스 방문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고, 우회도로 기사 스크랩을 챙기지 않았다고 해서 낭패를 본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교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일도 지금 당장 하지 않고, 미루고 미루다가 기회를 놓치곤 했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나부터가 달라져야 했다. 지혜가 '타이밍'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적시에 하지 않으면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결국 시간 부족으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못하게 될 때도 있다. 언젠가 나의 버킷 리스트를 보면서, 내 능력의 한계를 아쉬워할지언정 '진작에 시도했어야 했는데' 라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초파리, 스크랩한 우회도로 기사, 이미 문을 닫은 반디앤루니스 종로점이 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한다. "무언가 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하라!"


"나는 무슨 일이든 당장 하는 걸 좋아했다." 괴테의 말이다.

괴테처럼 빠른 실행력의 소유자로 살고 싶다.

이것만큼은 해내고야 말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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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사람들은 서로 다른 대상에게 끌린다. 어떤 이는 몸에 해로운 음식에 끌리는가 하면, 다른 이는 건강한 음식에 매혹된다. 사람들이 지닌 욕망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수준 높은 욕망은 유익한 결과를 선사하지만, 수준 낮은 욕망은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다. 저급한 욕망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일보다 고급한 욕망을 향해 나아가려고 절제하는 일이 더욱 유익하다.


규율의 수립과 실천은 절제를 돕는다. 규율은 자유의 박탈이 아니다. 오히려 저급한 욕망의 노예였던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이끈다. 고급한 욕망에 익숙해지도록 나를 훈련시킨다. 규율은 좋은 것인가? 오직 규율만을 쫓으면 삶이 각박해지고 몸이 고단해지고 낭만이 사라진다. 무엇보다 규율은 자유를 질식시킨다. 하지만 규율 자체는 중성적이다. 얼마간의 자유로움을 앗아가지만, 수준 낮은 욕망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면 자유는 좋은가? 오직 자유만을 쫓으면 게을러지고, 건강을 해치거나 체중이 불어나기 십상이다. 자유도 중성적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냐, 무엇을 향한 자유냐에 따라 자유의 가치가 달라진다. 나의 관심은 자유와 규율의 취사선택이 아니다. 자유의 수준을 높이고, 규율의 유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롭게 살아도 저급한 욕망으로 전락하지 않는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삶의 목표다.


몸은 패스트푸드를 좋아할까? 건강한 샐러드를 좋아할까? 몸은 우리가 더 자주 건네준 것들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타고나는 음식 취향은 없다. 몸이 익숙해진 결과일 뿐이다. 몸에 해로운 음식을 맛나게 먹는 일은 입의 즐거움일 뿐이고, 건강한 음식을 억지로 먹는 일은 고행에 가깝다. 건강한 음식을 맛나게 먹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경지다. 몸이 건강한 음식을 좋아하도록 스스로를 절제해 나간다면 그 경지에 이르리라.


탐식가는 설탕, 조미료, 소스의 맛을 알 뿐이지만, 미식가는 설탕, 조미료, 소스에 감춰졌던 음식 본연의 맛을 발견한다. 욕망에 눈 먼 '탐식'에서 건강한 음식을 즐기는 '미식'으로의 전환처럼, 자신을 다독여 더 유익한 대상을 좋아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성숙이다. 더 큰 기쁨을 위해,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 '자유'와 '규율'이라는 상반되는 가치를 통합시키면, 행복한 규율과 유익한 자유를 맛보게 된다.


기쁨을 위해서는 자유가, 효과적인 구속을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하다. 항상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저급한 욕망에 초연하게 되면, 규율 따위는 팽개칠 수 있으니까! 저급한 욕망에 휘둘리는 상태에서 고급한 욕망을 추구하는 상태로 도약하기 위해 잠시 규율을 활용하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장하게 되면, 더 고품격의 욕망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 땐 다시 규율 속으로 자유롭게 걸어가야 하리라.(연지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보보
훌륭한 강연을 듣고 왔다. 내용이 충실했고 강사는 지혜로웠다. 강의 진행 방식과 부드러운 태도도 인상 깊었다. 강연이 진행되는 내내, 청중과 호흡했고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할까』의 저자,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의 강연은 왕복 2시간의 이동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책을 출간한 지 얼마되지 않은 저자의 강연은 종종 실패로 이어진다. 강연이라는 독립적인 학습의 장(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처사에 화가 날 때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보세요"라는 말을 남발하거나(이러면 강연회의 의미가 사라진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면(발걸음한 시간이 아까워진다), 홀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김호 대표는 강연을 책의 내용에 유기적으로 연결시킨 동시에 강연 자체를 독립적인 학습의 장으로 만들었다. 강연은 입장 시에 배부된 10장의 카드로 진행되었다. 카드는 유인물이었고, 강연의 핵심 내용이었다. 추후에는 학습자료가 되었다. (카드는 청중을 위한 훌륭한 배려였고, 효과적인 홍보물이었다 - 카드의 뒷면에는 책의 이미지가 인쇄되어 있기에.)


10장의 카드는 거절에 관한 10가지의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유익한 내용이라 글로 정리했다. 다섯 가지는 번호를 매겨가며 순서대로 정리하고, 후반부 다섯 가지는 글 속에 버무렸다. 때로는 강사가 제시한 언어로, 때론 나의 언어로 썼다. 김호 대표님의 지혜와 나의 견해가 뒤섞인 글이지만, 대표님께 기댄 바가 크다.


1) 거절을 잘하려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어른인가?" 신체적 경제적으로 어른인 이들도, 심리적으로는 어른이 아닐 수 있다. 자기 의견과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솔직하게 전달할 줄 아는 이들이 (심리적) 어른이다.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얻은 가장 가슴 아픈 교훈은 내가 어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젠 어른으로 살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거절에 관한 책을 집필한 강사의 말이다.


2) 라이프 스타일로서의 민주주의(Democracy as a Lifestyle)를 추구하라!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문화가 '라이프 스타일으로서의 민주주의'입니다." 강사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로 나아갈수록 개인들이 주체로 존재하기가 수월해진다. 개인들이 다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할수록 거절의 힘이 키워질 거란 생각도 했다.



3) "거절은 결국 '선택의 힘'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숙고하고 선택한 대로 진솔하게 발언하는 것이 거절이다. 강사는 '사회적 증거의 저주'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옆 사람이 알아봐 주는 선택안(사회적 증거)만을 추구하며 산다면,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터닝포인트는 대개 수입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시간의 확대를 선택한 경우더라는 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적 증거와는 반대의 선택을 한 사람들은 점점 더 삶의 질을 높여갔으리라.


4) 강사는 거절을 돕는 세 가지 개념을 소개했다. <미움 받을 용기>의 "과제의 분리"! 왜 거절을 못할까? 거절을 당한 당사자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다. "과제의 분리"란, 합당한 거절을 했다면 나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하는지는 그 사람에게 달린 과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현명함을 추구하면 그만이다. 스탠리 밀그램의 "대리자적 자세"! 권위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대리자적 자세로는 선택의 주도권과 사유의 기회를 잃게 된다. 마틴 셀리그먼의 '학습된 무기력'! 거절을 못 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고 극복할 의지마저 잃게 된다. 심지어는 "(다른 여지가 분존재할 때조차) 어쩔 수가 없었다"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5) "평생 거절의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는 2015년 뉴욕대 졸업식에서 남긴 말이다. 그의 말처럼, 세상 어디에나 거절이 존재하고, 우린 언제나 거절을 당할 수 있다. 강사는 말했다. "거절을 삶의 디폴트 중 하나로 여기세요." 거절을 당했다면, 우리가 무언가 행동하고 도전했다는 의미다.   


강연 분위기는 더욱 진지해졌다. 나부터 몰입했기에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못했다. 강연을 들으면서 질문도 생겼다. 거절의 달인이라고 해서 배려할 줄 모르거나 공동체성에 무책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거절을 잘 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한껏 헌신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거절을 어떻게 배려나 경청과 조화시켜야 하는지 궁금했다. 나의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이 후반부의 강연은 흡족한 답변이 됐다.


자신을 살리고 상대를 배려한, 훌륭한 거절은 지혜와 용기의 산물이다. 거절이 항상 지혜로 탄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배려와 섬김을 모르는 이기주의도 거절을 낳으니까. 책과 강연에서 강사가 다루는 거절은 이기적인 거절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거절이다. 개인주의적 거절이라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강사는 개인주의가 공동체성과 공존할 수 있음을 그래프로 보여주었다.


한국은 개인주의 지수는 18점으로 가장 낮다. 집단주의가 강하다는 뜻이다. 일본의 개인주의 지수는 46점, 독일은 67점, 미국은 91점이다. 이제 커뮤니티 지수를 보자. 커뮤니티 지수란, 어려울 때 마음 편하게 연락하는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YES"라고 대답한 비율이란다. 개인주의와 커뮤니티 지수는 비례했다. 개인주의가 가장 높은 독일과 미국이 커뮤니티 지수도 높았다. 이기주의는 공동체를 헤치지만,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살린다.


좋은 거절은 이기주의가 아닌 개인주의에 기반한다. 개인주의적 거절은 자기 주장에 능할 뿐(Assertiveness) 공격적이지(Aggressiveness) 않다. 자기 의견의 주장(개진)과 상대방 마음 이해(연대)를 동시에 추구하는 이상적인 거절이 개인주의적 거절이다.


마지막 카드에 적힌 키워드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다. 연약한 정신은 자신의 취약성을 직면하지 못한다. 강인한 정신만이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피드백을 요청하고, 개선해 나간다. 거절을 하지 못하며 살아왔다면, 우선 그러한 삶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강사는 강조했다. "(거절 못하는 삶을) 내가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이야, 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문제 해결도 없습니다."



강연은 끝났고, 사람들의 표정은 흡족해 보였다. 신선한 공기가 주는 상쾌함처럼, 강연은 가슴과 머리를 기분 좋게 했다. 한 대목만 의아했다. 강사는 도입부에서, 인분 교수 사건처럼 권위자의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하는 여러 사례를 소개한 후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실험(대리자적 자세)도 잠깐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음의 말로 도입부를 정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강사의 말처럼 회사에서나 가정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타인의 명령이나 의견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사례들은 강사의 사례와는 '정도의 차이'가 너무 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거절을 잘 하는 축에 속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입부는 '극단적 사례'라는 생각과 '경각심으로 이끄는 괜찮은 사례'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고개를 갸우뚱했던 도입부를 제외하면, 강연의 내용과 강사의 교수법에 모두 만족했다. 나는 마음이 없는 자리에 끌려가서 '이것도 나름 의미 있지' 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거절은 나의 화두나 관심사가 아닌데도, 후기까지 적은 이유는 (내용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김호 대표님이 빚어낸 90분짜리 강연 예술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무슨 내용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렸다. 청중에게 배포된 카드는 교육 효과를 높였고, 강연 내용은 이론과 사례가 조화를 이루며 청중들에게 전달되었다. 오늘의 청중을 고려하여 정돈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사는 차분했지만 강했고, 강연은 조용히 진행됐음에도 울림이 컸다. 이런 강연이라면 매주 찾아다니고 싶다. (연지원)

Posted by 보보

1.

괴테에 관한 단상의 글 한 편을 적었다. 마음에 드는 글이지만, 공개(포스팅)는 후일로 미뤘다. 일부 구절이 울적함을 자아낼 여지가 있어서다. 내가 울적하게 읽히는 건 괜찮으나, 독자에게 울적함을 안기기는 싫다. 울적함의 언저리 한켠에는 낙관과 희망도 담아냈지만, 세심하게 읽어야만 잡아낼 정도의 섬세한 표현이었다. 포부이긴 하나, 강한 다짐도 또렷한 결심도 아니었던 게다.


자욱하게 낀 안개 속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빛을 상상해 보자. 나의 긍정과 희망은 그런 빛과 같다. 안개 속이라 찾기 힘들고, 희미하여 없는 듯도 하다. 이런 희망을 강하게 표현하면 실체와는 거리가 멀어질 터였다. 그럼에도 분명 존재하긴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듯 현실이 나의 이상을 조금씩 잠식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희망을 간직한 비전가로 남을 것이다.



2.

비전가로 살겠다는 말은 현실에 무감각해지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인식을 더욱 예리하게 연마할 것이다. 현실인식의 힘이 강력해져, 일상 어느 곳에서나 이상보다는 현실적인 제약이 눈에 밟히더라도, 나는 현실인식이 비전가의 장애물이 아니라, 도구임을 잊지 않겠다. 섬세한 현실인식이 뒷받침된 이상은 더욱 원대해진다. 섬세가 원대함에 이른다. 괴테는 '현실과 이상의 조화'라는 비전실현의 연금술을 상상력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내가 말하는 상상력이란, 현실의 터전을 떠나지 않고 또한 현실과 이미 알려진 것을 목표로 삼아, 예감할 수 있고 추정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네. 이러한 상상력은 예감한 것이 실현 가능한가의 여부를 검토하고 이미 알려진 다른 법칙과 모순되지 않는가의 여부도 검토하는 거네. 이러한 상상력에 이르려면, 생명세계에 깊이 통달하고 여러 법칙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냉철하고 박식한 머리를 가져야만 한다네."(박영구 역) 1830년 1월 27일 수요일, 괴테가 에커만에게 한 말이다.


3.

현실적 이상주의자가 되려면, 과감하게 결정하고 자신의 선택에 집중해야 한다.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도, 이상을 추구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착상 만으로는 부족하다. 집중해야 생산성이 오른다. 몰입이 결과를 만든다. 용기있게 나아가서 열정으로 끝맺어야 한다. 괴테는 대화가 곁들여진 에커만과의 점심 식사에서 '마르티우스'라는 한 자연과학자를 높이 평가하며, 그에 관한 애정어린 견해를 펼쳤다.


"그의 착상은 대단히 중요하다네. 내가 그에게 좀더 바랄 수 있다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좀더 집요하게 파고들라는 거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을 너무 벌이지 말고, 하나의 사실을 법칙으로 발표할 만한 용기를 가지라는 거네."(박영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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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8일은 괴테가 탄생한지 267년이 되는 해다. 괴테(1749~1832)는 여전히 현재적이다. 아마 영원히 그러하리라. 괴테 탄생의 날에 나는 다시 괴테를 읽고 싶어졌다. 아니, 괴테의 전작을 읽어야겠다. 출발점은 『괴테와의 대화』로 삼았다. 7년 만의 재독이다. 당분간은 괴테와 함께 문학과 삶을 사유하자! 상상으로도 즐거워진다. 이것은 독서인 동시에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전이다. 괴테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열정과 지혜를 선사하기에! 또 하나의 일을 벌이고 말았으니, 괴테의 조언을 따르지 못하게 됐는데도 묘한 기쁨이 찾아든다.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