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에 해당되는 글 278건

  1. 2016.11.25 음악이 위로다 (2)
  2. 2016.11.24 깨달음이 위로다 (6)
  3. 2016.11.21 더 나은 하루를 위한 여행 (2)
  4. 2016.11.20 서른여덟 살의 유언장
  5. 2016.11.18 내가 꿈꾸는 죽음 (2)
  6. 2016.11.10 다시, 행복유통업자 되기! (8)
  7. 2016.09.19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8. 2016.08.26 잠깐의 그윽한 여행
  9. 2016.08.02 [서울 이곳은] 넓고 자유로운 마음
  10. 2016.06.20 용기의 전사 라케스처럼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을 검토해 보아도, 바그너 음악이 없었다면 나는 내 유년 시절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음악이 위로다. 음악은 종종 사람의 영혼을 치유한다. 나는 과장과 기만 없이 말할 수 있다. 이상은의 '삶은 여행'을 들으며 위로를 얻었다고, 노래 한 곡이 나를 깊이 위로했다고 말이다.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마다 이 노래를 수백 번 들었다.



니체는 자신의 치유자에 대한 요구도 밝혔다.

"나는 음악이 10월의 오후처럼 청명하고 깊이 있기를 바란다."


나 또한 음악을 비롯한 예술을 향한 기대와 바람이 있다. 나는 유미주의를 좋아하지만, 유미주의자를 지지하진 않는다. 예술이 삶의 지혜와 인류의 비전을 담아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에게 바란다. "당신이 지닌 최상의 표현력을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활용해 주세요." 나는 예술이 고귀하고, 그윽하고, 다양하고, 소외되고, 지혜로운 것들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위로와 공감이 필요하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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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고통에 사로잡혀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 소수가 인류의 의미를 결정 짓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힐데 쟁어에게 보낸 편지(1931)에 담긴 말이다. 고통 속을 헤매던 나는 이 말에 깊은 위로를 얻었다. 깨달음이 위로다. 나는 삶이 고통스럽고 힘겨울 때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아무 책이나 읽었던 건 아니다. 선별은 하되, 읽고 또 읽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깨달음을 통해 내 삶을 견디려는 안간힘이었다.



헤세는 1920년의 일기에 이런 글도 썼다. "훗날에 돌아보니, 겉보기에 순조로웠던 시기보다 힘들고 어리석었던 시기가 내게 더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성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자라나는 가지만 건드리지 말고 더 깊이 뿌리 내려야 한다."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리라. 내게 필요한 것은 인내, 용기, 천착이다. 인생의 전체 스펙트럼에서 지금의 시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되면, 견디기가 조금은 나아진다.



헤세는 힘써 추구할 푯대도 제시해 주었다. "당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면, 당신은 그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좋아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엔 당신은 그들의 잘못으로 그들을 사랑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그래서 원문을 찾아보고 싶은 이 구절을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잘못을 보고서 힐난하거나 결별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으로서 그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극복할 수 있도록 지지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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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끝났다. 편도 항공권을 예약하여 제주에 와서 5박 6일을 지냈다. 어떤 여행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소비된 비용보다는 지나간 시간이 더 아깝다. 세월은 다시 벌어들일 수도 없으니까. 삶이 소중하다면, 하루야말로 삶의 소중함을 실현하는 장(場)이다. 나는 더 나은 하루를 살기 위해 여행한다.

 

제주에서 꼬박 다섯 날을 보내고 나니 시간의 대차대조표를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서 얻은 의미와 배움을 헤아리며 시간을 들일 만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비오는 날의 금능으뜸원해변

1.

가장 커다란 결실은 ‘금능으뜸원해변에서의 다짐’이다. 11월 18일, 시간은 저녁이지만 해가 저물어 캄캄한 바닷가를 걸었다. 나는 의식을 떼어내어 해변을 거니는 삼십 대 후반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내면도 들여다보았다. 그는 슬픔에 빠진 표정이었고, 자신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려는 의지도 품고 있었다. 남자는 두 곡의 노래를 부른 후 단상에 잠겼다.

 

남자의 내면에는 두 세계가 싸우고 있었다. ‘꿈과 희망’이 ‘삶의 덧없음’과 대결했다. 대결은 필요했다. 꿈과 희망은 열정을 안기고, 삶의 덧없음은 시간의 소중함을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는 최근 2년 동안에는 ‘삶의 덧없음’이 승리했음을 알고 있었다. 체념한 채로 무기력하게 보냈던 시간들을 아쉬워하면서도 변화의 전기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남자는 밤하늘과 바다의 경계에 섰다. 바다의 끝을 알지 못했고, 하늘의 시작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섬(비양도)의 불빛이 보였다. 밤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불빛도 발견됐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구름 뒤에는 별빛이 존재한다. 그 별빛이 지금도 빛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남자는 위로를 얻었다. 밤하늘에도, 구름 뒤에서도 빛나는 별빛!

 

남자는 ‘꿈과 희망’을 선택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로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사고 실험도 했다.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 본 것이다. 최소한으로 줄이니 열 명이었다. 가족이 넷이었고, 친구와 지인들이 여섯이었다. 간단한 생각인데, 남자는 삶의 초점이 맞춰지는 기분을 느꼈다. 한기가 들어 차로 돌아왔다. 한 시간 동안의 액자 여행은 그에게 평온을 안겼다.

 

2.

금능 해변에서의 단상은 여행을 하면서 ‘제주에서의 일곱 가지 결심’으로 이어졌다. 구체적인 계획은 가슴에 남겨둔 채로 목록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나의 공간을 설렘으로 채우자(공간 정리). 2) 연말을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자(보은의 삶). 3) 출간을 위한 도움을 구하자(한계 도전). 4) 제주에서 한 달을 살자(낭만적 일상). 5) 포틀랜드로 여행을 떠나자(후반전 준비). 6) 재테크를 공부하자(날개 달기). 7) 손택, 카프카, 카잔차키스, 김영하를 읽자(전문성 강화).


앤트러사이트는 커피맛도 환상이었다

 

3.

서울로 돌아가려던 토요일, 친하게 지내는 부부(인생의 선배들이다)를 만나는 바람에 이틀을 더 묵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그 분들 덕분에 혼자서는 누리지 못할 인상 깊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를 배려했고, 여행의 순간순간을 즐겼다. 오전에는 제주대학교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날의 고전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었다.)

 

오후에는 모병원의 원장님, 조국 교수님과 함께 담소를 나눴다. (대화에 끼어들어 나의 의견도 내어보고 싶었지만, 테이블에는 다른 인사 분들도 많이 계셔서 나는 유심히 듣는 쪽을 택했다.) 이후에 진행된 교수님 강연도 알찼고, 다시 제주대 학생들을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조금 어색했지만, 유익하고 즐거웠다. 학생들의 고민을 듣고 건넨 나의 제안(최선의 3단계, 시간지향 스케줄링)은 나부터 적용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튿날엔 두 분을 모시고 한림읍의 카페 ‘앤트러사이트’에 갔다. 놀랍도록 창의적인 카페다, 영감을 주는 곳이다 등의 칭찬을 했던 터라 내심 실망하실까 염려했는데, 두 분이 흡족해하셔서 무척 기뻤다. 우리는 애월, 한림, 한경, 대정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달려 모슬포 항에 도착했다. 방어가 제철이라 갈치조림과 방어회를 먹었다.

 

제주공항에 모셔다 드리고 나니, 다시 혼자가 되었다. 렌트카를 몰고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생각했다. ‘혼자만의 여행과 함께하는 여행의 조화가 이뤄져 좀 더 유익한 여행이 되었구나. 주말 내내 흐린 날씨에도 여행이 빛났던 건 두 분 덕분이야. 학생들에게 건넸던 조언이 고스란히 내 삶의 해결책이기도 함을 잊지 말자.’ 이제 한 시간 후면 서울행 비행기를 탄다. 당분간은 멋진 하루들을 보낼 것 같다. 여행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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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슬퍼 마세요. 나는 고통과 슬픔, 외로움이 없는 곳으로 갑니다. 다만 행복을 누릴 기회마저 사라진다는 사실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나의 죽음이 여러분께 슬픔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떠나니까요. 제가 조금 일찍 간다고 생각하시면서, 나의 죽음을 통해 삶의 진실과 비밀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회한과 원통함 속에서 한 줄기 평온이라도 누리기 위해 평생동안 나를 위로했던 노래 '삶은 여행'을 들으며 이 글을 씁니다.


삼촌과 숙모의 은혜가 바다처럼 깊어요. 내 어린 시절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의 배려가 없었다면 제 삶에는 또 다른 그늘이 드리워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결혼을 했더라면 두 분께서 저를 키운 보람을 더 느끼셨을 거라는 생각에 늘 죄송했어요. 이를 생각할 때면 눈물이 나곤 합니다. 끝내 그 보람을 안겨 드리진 못했네요. 할머니! 할머니께 또 하나의 고통과 슬픔을 안겨 드림이 나를 괴롭힙니다. 딸과 그 딸의 아들을 잃으신 할머니의 비통함을 하늘과 대지가 위로해 주기를 제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기도할게요. 할머니의 저를 향한 신뢰가 저를 여러번 옳은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얘길 강연장에서 하면 몇몇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요.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감동의 눈물을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꼭 경찰공무원이 되어서 찬란한 30대를 살아가기를 바란다. 형을 잘 따라주어 고마웠어. "형은 완벽한 줄 알았는데, 전화 받는 건 왜 이렇게 못 하노?" 이 말은 내게 기쁨이었고, 부끄러움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고맙기만 하다.


OO아, 너와의 만남은 내 삶에 큰 축복이었어. 사랑하는 만큼의 행복을 안겨주지 못해 부끄럽고 나 자신이 원망스럽네. 오해와 격정이 뒤엉켰던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한스럽구나.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더불어 성장했던 순간들은 커다란 행복이었지만, 이별은 힘겨운 고통이었어. 내게 삶이 조금 더 주어진다면, 너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여 네가 함께 해 줄지는 모르지만, 마음마저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온 몸을 할퀸다. 부디 내가 진실로 사랑했음을 기억해 주렴.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다시 너를 만날거야. 그 땐 함께 살자. 나누고 싶은 말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괜한 오해를 하여 그로 인해 네가 힘들어할까 눈물로 삼킨다. 시간이 남으면 따로 편지를 쓰고 싶다만, 신이 내게 그런 행운을 허락하실지 모르겠다. 언제나 건강하길 기도할게.


어머니! 제가 어머니가 세상을 사셨던 정도만큼 살다가 떠납니다. 만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보다 오래 살기 시작하면서 저는 형언하기 힘든 기분을 느낍니다. 아버지, 어머니보다 오래 살고 있음에서 오는 감정은 두려움과 처연함입니다. 내 인생이 어머니처럼 덜컥 끝날까봐 두렵고, 당신의 삶이 떠올라 처연한 게지요. 어른이 되면서부터는 엄마 없는 삶이 제 인생에 어떤 그늘을 드리웠는지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있어요. 어머니가 떠나신 영향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크고 깊었어요.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제 삶은 다른 모양이 되었겠지요. 나는 그 삶이 참 궁금해요. 한 번 뿐인 삶을 엄마 없이 살아서 억울하고 슬플 때가 있습니다. 엄마를 만나면 그 얘기를 좀 들어주세요. 죽기 전에 단 하루만 엄마랑 지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그 녀석과도 그런 하루를 갖고 싶고요.)


바보 같은 놈아, 잘 있냐. 내가 눈을 감으면 너를 만날 수 있는 거야? 보고 싶다, 이 자식아! 너가 떠날 때, 마지막 인사를 못해서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고는 있냐? 네가 떠나지 않아도 필멸성을 모르지 않는 나인데, 너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욱 명징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고통이자 힘겨움이었어. 너를 만나면 욕을 한 바가지 할 거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니, 이 말을 남긴다. 사랑한다, 이 놈아! 정말 다시 만나고 싶다. 와우들에게도 마음을 남깁니다. 여러분들과 함께했던 십년 남짓의 세월이 제 삶에 커다란 위로였습니다. 함께 공부하고, 여행하고, 고민했던 날들이 제 부족한 인생의 의미 있는 결실입니다. 나를 찾아주시고, 의미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함께 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되었네요. 우리가 함께 배운 시간들이 눈 앞을 스쳐갑니다. 여러분 덕분에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인사를 드리지 못한 나의 소중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 면면들이 떠오르네요. 손이라도 맞잡고 인사하고 싶지만, 제겐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아요. 마음을 다해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장례가 끝나면 마음이 끌리는 몇 분은 저를 안동으로 데려가 주세요. 병산서원 앞 낙동강에다 내 육신의 재를 뿌려 주세요. 누군가가 '삶은 여행', '언젠가는', 'Say it', '막스 리히터의 봄', 'Limbo Jazz'를 순서대로 들려주면 고맙겠습니다. 이 날이 축제가 되기는 힘들겠지요. 그리 말하는 이들의 넉넉함과 낭만을 존경하지만, 내게 죽음은 축제가 아닙니다. 그리 되도록 애쓸 뿐이지요.


여러분과 헤어지는 날, 눈물로 저를 배웅해 주실 분이 계시겠지요? 누군가의 눈물이 제게는 위로가 될 것 같아요. 그 눈물이 이튿날에는 미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래 슬퍼하지는 마세요. 나는 세상 속 일개인에 불과하고, 여러분에게는 앞으로의 삶이 있으니까요. 나의 죽음에서 여러분의 삶을 보기를 원해요. 몇몇 분들이 저와의 사별로 큰 슬픔에 잠길까 걱정입니다. 먼저 떠나서 미안해요. 여러분의 마음과 기억 속에서 동행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저로부터 상처와 아픔을 받았던 분들에게 염치없는 부탁을 드립니다. 저의 작은 실수와 부족함마저도 용서해 주셔서 나의 마지막 여정에 평온을 허락해 주세요. 용서는 우리 모두를 위한 희망과 위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겐 책이 많습니다. 읽고 싶은 책들을 가져 가시기 바랍니다. 읽는 열심보다 사들인 욕심이 커서 깨끗한 책들도 많고, 괜찮은 책들도 더러 있을 겁니다. 저와 더 오래 교감하지 못해 아쉬운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는 제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일부라도 책을 실현했다면 좋겠네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의 주인공은 제 모습과 거의 일치합니다. 제가 평생 고치고 싶었던 모습이지만요.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또 나누고 싶었던 지혜들은 <그리스인 조르바>, <인생수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포트폴리오 인생>, <학습하는 조직>에 많이 담겼습니다. 멋진 삶을 위한 실용적 제안들은 스티븐 코비가 넘치도록 선사했지만, 말콤 글래드웰과 다니엘 핑크도 권하고 싶네요. 저는 아마추어 인문주의자였습니다. <인문학의 미래>(월터 카우프만), <저항의 인문학>(에드워드 사이드)이 제 푯대였습니다. 제가 어제까지 읽은 책은 영국의 고전학자 키토가 쓴 고대 그리스에 관한 책입니다. '그리스 비극'을 더 깊이 읽기 위해서였죠.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들을 덧붙이고 싶네요. 나는 카뮈와 카프카를 읽을 때마다 위로나 동질감을 느끼거나 달려갈 방향을 알게 될 때가 많았습니다. 김현 선생과 손택의 박력을 닮고 싶었고요. 결국 닮아내진 못했으니, 부러워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습니다. (더욱 신중히 선택하면 좋을 텐데, 지금 생각나는 책들이라도 적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지요.) 


책 말고는 드릴 것이 없는데. 글이라도 있어 위로가 됩니다. 나는 많은 글을 썼습니다. 세상에 발표하지 못하고 유실한 글들은 나의 큰 고통이자 회한거리였지요. 예술성이든, 깊은 지혜든, 무언가를 창조한 작가이기를 꿈꾸었지만 끝내 잡글만 쓰다 간 글쟁이로 존재했음이 아쉽습니다. 블로그에라도 나의 전모를 공유하지 않은 것이 이제야 불찰로 느껴지네요. 인문주의자로서의 글, 와우리더로서의 글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유실의 불운이 블로그를 덮치지는 못했으니까요. 앞으로는 글로 만납시다.


노무현 대통령님처럼 짧은 유언을 쓰고 싶었는데, 글이 길었습니다. 아쉬움이 많아서는 아닐 겁니다. 인문주의적 사유는 필연적으로 긴 글로 이어질 때가 있거든요.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죽음 앞에서는 미련과 아쉬움이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삶은 언젠가는 끝난다! 이 말이 제 삶의 마지막 2년 동안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삶이 불쑥(!) 끝나기 전에 많이 웃고, 사랑하고, 더욱 건강하시기를 당부합니다. (연지원 올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른 여덟 살의 그리스 여행(델피)


서른 여덟 살의 그리스 여행(메테오라)


서른 여덟의 행복했던 순간


서른 여덟 살의 가장 행복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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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까지는 살고 싶다. (물론 더 오래 살면 좋지만, 일차적 바람이 60세까지는 사는 것이다. 희망 최고령은 87세다. 삶의 후반부를 함께 살아온 여인과 함께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바람과 87이라는 숫자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이렇게 괄호 안에다 묶어둔다.)


화장을 하여 가루가 된 유골은 병산서원 앞 낙동강에 뿌려졌으면 좋겠다. 그 날, 낙동강변에는 비발디의 곡을 재해석한 막스 리히터의 <봄>이 흘렀으면 좋겠다.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 이들이 열 명은 되었으면 좋겠다. 죽은 후 영혼의 눈으로 강을 따라 안동, 김천, 대구를 둘러보고 싶다. 바다에 이르면 영혼의 눈도 감았으면 좋겠다.


단 하루도 아프지 않고 죽으면 좋으련만, 그런 축복이 나를 찾아줄지는 미지수다. 외할머니는 딸의 묘에 갈 때마다 이리 말씀하신다. "내가 너무 오래 사네. 영화야, 나는 자는 잠에 데려가래이." 할머니도 나도 낮잠을 자다가 스르륵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잠드는 그 순간에 마음에 걸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이야 남겨둘 순 있겠지만, 돈빚 없이 말빚 없이 홀연히 떠나고 싶다. 살면서 저지른 부끄러운 일이야 넘쳐나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원한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에게 용서받고 떠나는 죽음을 꿈꾼다. 


강물과 함께 떠났으니 나의 묘비는 없으리라. 다만 누군가가 남길 말을 부탁할지도 모르니 마음 속의 묘비명을 지어두긴 해야겠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내게 적격일 텐데, 묘비명만큼은 나답게 짓고 싶다. 세 개의 후보 중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20년 후에나 결정할 수 있을지도.)


"나는 필연의 터 위에서 자유의 집을 지었다."

"삶은 황홀이었다(또는 좋았다). 죽음은 어떨까?"

"생이여 고맙다. 나를 찾아와 주어서! 죽음이여, 너는 왜 벌써 왔니?"



*


죽음에 대한 사유야말로 덧없다. (죽음 이후의 날들은 내 알 바가 아니고, 죽음 이전에는 누구나 삶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죽음 사유를 글로 남긴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에는 의미 있지 아닐까? 하나는 갑작스레 삶이 끝났을 때 유가족에게 고인의 뜻이 전해지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죽음 사유를 통해 살아갈 이유와 열정을 발견하는 경우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 사유가 항상 존재의 의미와 생의 열정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리라. 줄곧 죽음을 시에 등장시킨 최OO 시인은 삶의 허무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내가 꿈꾸는 죽음' 따위의 글을 왜 썼냐고 궁금해하지 마시라는 뜻이다. 어쩌다 생각해 보게 됐고, 마음에 끌려서 글자로 옮겼을 뿐이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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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서른여섯 살 때의 일입니다. 운전 중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날의 통화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주로 농담조로 이뤄지는 우리의 통화인데, 그 날 친구의 목소리는 유난히 차분했습니다. 친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일단은 너만 알고 있어라. 내가 몸이 많이 안 좋네. 나도 이겨내려고 노력할 텐데…… 암일 수도 있단다.” “병원에서는 뭐래?” 친구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고, 나는 화를 내면서 다그쳤습니다. 한참 후에나 대답을 들었죠. “췌장암일 가능성이 있다는데, 정확한 건 큰 병원에 가야 알 수 있다네.”

 

1990년부터 이십 오년 동안 우정을 이어온 절친한 친구가 췌장암일 수도 있다는 말은 나를 충격에 몰아넣었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서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22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학교 수업 도중에 엄마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서 집으로 가는 길에서, 동생과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내면서 엄마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던 날이 떠오른 겁니다. 그 때의 절절함으로 친구의 몸에 찾아온 종양이 제발 암이 아니기를 기도했지요. 인생은 때때로 가혹합니다. 간절한 바람에도 “NO”라는 선언을 내리곤 하니까요.

 

정밀 진단을 받은 결과, 친구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고 난 보름 후에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죠. 지난한 항암 치료가 시작됐고요. 친구는 치료를 받을 때마다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친구의 친형이 동행했고, 서울에 올 때마다 나도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첫 번째 항암제였던 젬스타빈은 별반 도움이 못 되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암제를 바꿀 때마다 친구는 희망과 기운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Rebirth! 다시 일어서리라.” 친구의 카카오톡 프로필 메시지입니다.

 

투병 생활을 시작한지 8개월이 되어갈 무렵, 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휴양도 하고 가족과 시간도 보내려는 생각이었죠. 여행은 무산되었습니다. 떠나기 직전에 몸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병원에 입원했거든요. 며칠 입원으로 몸을 추스르고 퇴원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러던 차에 친구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와우팀원을 만나던 중이었죠. “오빠, 저 이제 어떡해요? 의사가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래요. 한 달 정도 남았다고 하네요.” 머릿속의 세포가 모두 빠져나와 아득히 먼 곳으로 달아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정신이 아찔했죠. 그날부터 매일 친구의 병원에 갔습니다.

 

날마다 병원에 가서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강연이 있는 날에는 두어 시간을 머물렀고 일정이 없는 날에는 일곱 여덟 시간을 보냈죠. 친구는 진통제를 맞아야 겨우 몇 시간 깨어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진통제를 맞으면 많은 시간을 잠에 취해 보내야 하고, 맞지 않으면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날들이었습니다. 친구가 깨어나면 잠시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친구의 얼굴은 야위어 갔습니다. 한 번은 내일을 기약하며 병원을 나서려는데, 친구가 “잠깐만” 하고 나를 불러 세우더군요. 그가 슬로우 모션으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침상 곁에 서서 지켜보았습니다. 일어나 앉더니, 기름지고 헝크러진 머리를 매만졌습니다.

 

“매일 아픈 모습만 보였는데, 오늘은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서.” 어색한 양반 다리로 침대에 앉아, 친구가 건넨 말입니다. 얼굴에는 고통을 참는 표정이 스쳐갔습니다.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켰습니다. 웬일이라는 투로 친구의 아내가 농담을 건넸고, 나 역시 “와! 매일 이렇게 인사하면 좋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우리의 말에 고마움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이렇게 앉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섭섭함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 후, 병실에서 친구와 단 둘이 있을 때였습니다. 친구가 심각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더군요. “어젯밤에는 아픈 게 좀 다르더라. 지금까지와는 분명히 다르게 아팠어. 아무리 못 살아도 2년이나 최소한 6개월은 더 살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이번 주가 마지막일까 봐 겁난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맺었습니다. 나의 모든 감각과 지혜를 동원하여 그를 공감하는 동시에 희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괜찮다, 아직은 아니야’ 하는 안도감과 동시에 ‘마지막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거야’라는 진심을 전해주려고 애썼습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지금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물었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의 가족들이지.”

 

당시의 내가 할 일은 가슴 속에 존재하는 깊은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혹시라도 맞이할지 모를 이별의 순간을 준비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하는 그에게 가까스로 말을 꺼냈습니다. “친구야,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인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잖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거 알지?” 그는 두려움인지 슬픔인지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어찌될지 모르니 준비도 해야 하는 것도 알잖아. 내 의견 하나를 전할 텐데, 듣고 니 생각을 말해 줄래?” 친구는 꼬박꼬박 고개로 끄덕여 주었습니다. “소영이, 진영이를 위해 동영상을 찍는 건 어때? 나는 세월이 지나니깐 엄마랑 마지막 인사를 못한 것도 아쉽고 목소리나 얼굴 표정이 가물가물해지더라.”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잠시 동안 울고 난 친구가 말했습니다. “알겠다, 고맙다.”

 

다시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친구는 오스피스 병원으로 옮겼고, 면회를 갈 때마다 옆 병상에 계시던 어르신이 자리를 비우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았고요. 생각해 보면, 뜨거운 여름이었을 텐데 날씨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어느 날, 친구가 마지막 숨을 힘겹게 몰아쉬는 모습을 보아야 했을 뿐입니다. 친구는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가족들과 제가 지켜보고 있었음을 인식하면서 눈을 감았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만 25시간 전에 의식을 잃은 후,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뜨거나 의식이 돌아온 기척은 없었으니까요.

 

삼일장을 치르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한 달 동안 드나들던 병원 생활은 끝났지만, 슬픔과 고통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울증 증상이 찾아왔던 것도 같습니다. 삶은 무의미했고, 하루하루가 무서웠습니다.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기가 겁이 나기도 했죠. 현관문을 닫으며 ‘오늘 내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녀석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과 무의미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습니다. 긴 슬픔과 고통이 시작되었죠.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방향도 잃었고요.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는 수준으로 몇 달을 보냈습니다.

 

20대의 나는 직업적 정체성을 ‘행복유통업자’라고 생각했지만, 친구와의 사별은 나의 정체성마저 바꾸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의 그 낭만적인 직함을 지웠습니다. 내 삶에는 누군가에게 유통할 행복이 없다고 느껴졌고, 모든 사람들의 곁에 존재하는 행복을 발견하려는 의욕도 없어졌으니까요. ‘불행예방업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훨씬 삶의 진실에 가까워 보였죠. 내 인생에 행복이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불행을 다시 경험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가끔씩 누군가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할 때면 이러한 심경 변화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녀석이 세상을 떠난 후의 명절은 잿빛이 되었고, 고향 가는 길은 눈물겨운 생각들이 동행합니다. 명절이면 할아버지 제사상에서 밥을 먹은 뒤, 두 곳의 산소에 갑니다. 엄마의 묘에 들렀다가 친구의 납골당을 향할 때면 ‘나는 이제 삼십 대 후반인데… 어찌하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친구의 사진을 보고 나올 때면 마음이 슬퍼지고 인생이 무상해지지요. 엄마와의 사별로부터 헤어 나온 시기가 언제인지 가늠해 보기도 하고(이건 긍정의 에너지입니다), 친구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놓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평생 함께 할 줄로 생각했던 녀석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을 직격하면, 마음은 온통 쑥대밭이 됩니다.

 

친구는 너무 빨리 떠났습니다. 가족 같은 친구였죠. 그와의 우정은 에로틱을 뺀 사랑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 시절엔 일 년에 330~40여일을 만났고, 같은 대학교에서 진학하여 함께 캠퍼스를 거닐었습니다.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복수 전공을 선택했지요.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밤에 만나서 자정을 넘겨가며 술잔을 기울이며 희망찬 인생을 꿈꾸었고, 하루의 노고를 서로 격려했습니다. 그가 떠난 슬픔은 여전합니다. 친구는 나의 슬픔을 보며 얼마간 위로를 받겠지만, 내가 영원히 슬퍼하길 바라진 않을 겁니다. 친구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상황을 뒤바꾸어 생각하면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아있고 내가 떠나야 했다면,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상욱아, 너와 함께 젊은 날들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고, 너처럼 멋진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서로에게 진실한 우정이었는데 너무 빨리 떠나서 미안하다.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는데……. 친구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 주어 고맙다. 아픔을 만져 주어 고맙다. 울고 싶은 날이면 울면서 나를 기억해 주렴. 하지만 이튿날에는 슬픔을 잊고 열심히 네 인생을 살아주길 바란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정을 다해 행복을 누리고 네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그 날, 우리의 우정처럼 삶도 아름다웠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사랑한다. 친구야, 진하게 고맙고 정말 미안하다. 나 같은 우정을 다시 만나기를 바래. 나는 바람 되어 구름 되어 세상도 떠돌고 네 삶도 지켜줄게. 친구야, 안녕!”

 

나를 향한 친구의 마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길었던 슬픔과 우울을 거두고 다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가 떠난 후 2년 4개월 동안의 허망하고 무기력했던 날들을 친구가 분명 좋아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찌하여 이제야 깨닫는 걸까요? 휴우.) 나는 다시 행복유통업자가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삶의 무자비한 면을 생각하면 이러한 결심이 순진하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지만, 수많은 현자들이 희망과 도전과 행복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추구하라고 권고한 이유가 있겠지요. 문득 내 인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슬픔, 무기력, 나태함 속에서 수많은 날들을 보냈으니까요. 오늘밤엔 나의 인생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약속합니다.

 

“친구야, 평생 너를 잊지 못할 거야. 내가 너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의 만남을 이어가는 거야. 비록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손을 맞잡고 악수도 할 수 없지만, 내가 눈을 감는 그 날까지 영혼의 교감을 이어갈 수 있어. 친구야, 사랑해! 나, 예전처럼 잘 살아갈게. 너에게 전화해서 ‘상욱아, 우리 한 번 뿐인 인생 잘 살아보자” 하면서 서로를 격려했던 순간들이 눈물 나게 그립지만, 그럴수록 더 힘을 내어 우리가 쌓았던 우정에 걸맞은 삶을 살게. 친구야, 네가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거기선 아프지 않고 평온하리라 믿는다.”

 

*


일생에 적어도 한 두 번은 삶의 심술을 만납니다. 인생이 거대한 힘으로 우리를 고통으로 밀어 넣는 거죠. 우리의 행복이 전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여전히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더 행복해질 가능성, 더 강인해질 가능성, 더 평온해질 가능성! 물론 더 악화될 가능성도 남아 있지요. 우리는 나아질 가능성을 선택해야 합니다. 악화될 가능성을 두고 절망의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양쪽 모두 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장을 갈망해야 합니다. 언덕에 오르는 자동차를 상상해 보세요. 기어는 중립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올라갈 가능성과 뒤로 밀려난 가능성이 모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고통이 어느 정도 아물고 상처와 화해를 하고 난 후에는 힘차게 엑셀을 밟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로 밀려날 겁니다. 가파른 삶의 언덕을 만나더라도 절망하고 슬픔에 빠지는 대신, 자신의 영혼과 온 몸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언덕에 올라 새로운 풍광을 바라볼 날을 기대하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프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힘을 내야 합니다. 나는 그리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태양은 떠오르니까요.

 



Posted by 보보


1.
어디에도 삶의 의미가 없었다. 부모님의 사랑은 기억조차 희미하고, 가장 편하고 친했던 친구는 그리움이 됐다. 부모님은 내가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세상을 떠나셨고, 37살의 친구는 췌장암에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 말았다. 존경하던 스승은 폐암으로 예순이 되기 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움이 나를 외면한 느낌이 드는 내 삶의 실존들이다.
고통은 그치지 않았다. 

작가를 꿈꾸는 내게 글쓰기는 일상이다. 메모와 기록은 습관이다. ‘노트북 데이터 유실’은 엄청난 불운일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일이 내게 벌어졌다. 어제까지 쓰던 자기경영 일지와 십년 동안 기록해 왔던 와우스토리랩 수업 노트가 없어졌다. 스무 살 이후 매일같이 써 왔던, 언젠가 책으로 내고 싶었던 글들도 나를 떠났다. 강연을 위한 PPT 자료도 사라졌다. 친구를 잃은 충격에서 조금씩 헤어나오기 시작한 2014년 9월 22일에 벌어진 일이다.
 
2.
나는 힘들고 슬펐다. 수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은 희미해졌지만, 고통스러운 감정 하나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사실 그것이 감정인지 논리인지조차 모르겠다. 어떠한 상태였다고 말해 두자. 그것은 공허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나의 관심이 아니었다. ‘왜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고, 시간이 지나도 떠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또렷해졌다.

질문이 나를 괴롭히는 동안에도 삶은 지속되었다. 사람들과 만나 별 문제 없는 것처럼 대화도 나눴다. 그렇게 살아가고 멀쩡하게 귀가한다는 사실이 종종 생경하고 놀라웠다. 공허감이 극심했을 때는 집을 나서며 ‘오늘 밤 내가 다시 이 문을 열고 들어오게 될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무섭고 슬펐다. 조금 덜한 때에는 상실의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살다보면 누구나 상실을 만난다. 나는 그 상실을 조금 일찍 경험했을 뿐이라고 달래곤 했지만, 그러한 달램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십중팔구 그의 부모님이 존재하거나 등장했다. 그것이 드라마든 다큐멘터리든 TV 속 인물은 부모와 통화를 하거나 함께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눈다. 부모는 어디에나 있었다. 나의 삶을 제외하고! 

슬픔은 나를 관통하여 지나갔지만, 공허감은 어디론가 흘러가지 않고 내 안에 머물렀다.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존재의 의미를 잃은 느낌이었다. 공허감과 무의미가 함께 나를 괴롭혔다. 이는 어느 특정한 날의 모습이 아니다. 매일의 일상이었다. 날마다 눈물을 흘렸고 밤마다 불면으로 힘들었다. 혼자일 때에는 괴로움이 더욱 짙어졌다. 

3.
실존주의자들은 목적과 의미 없이 세상에 내팽개쳐진 인간 실존의 무상함을 직시했다. 어느 날, 눈을 떠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육체 덩어리가 누워 있음을 발견하는 감정을 사르트르는 '구토'로 표현했다. 그는 인간 실존의 공허를 『구토』라는 소설로 승화했지만 나는 평범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술로의 승화는커녕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갈 뿐이었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제쳐두고, 그저 살아보자고 생각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묻는 질문은 언젠가 내면의 힘이 채워지면 소환하리라 다짐하며 밀쳐 두었다. 당시엔 밀쳐두기가 나름의 노력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얼마간 도움이 되었다. 삶의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공허와 의미 상실감에 함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일상을 그럭저럭 살아냈다.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최소한의 돈도 벌었고(때때로 궁색하긴 했다), 띄엄띄엄 글도 썼다(올해는 ‘리버럴 아츠’를 집필했다), 새로운 와우도 맞이했다(와우 10기와 함께 스토리 과정을 마쳤다). 

사랑하는 가족과 하나뿐인 친구가 세상을 떠나고 연인과도 헤어진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날들이다. 기꺼이 나의 고뇌를 들어준 우정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가족과 고통을 나눌 수 있다면 덜 외로울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한 가지 문제만은 여전히 나를 맴돌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독했다. 삶의 의미와 자살 문제였다.

4.
자살은 심각하기는 해도 당시의 내겐 우울한 주제는 아니었다. '왜 살아야 할까? 죽어도 되나?' 이것은 피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었다. 절박한 문제였다. 당장 일주일 동안 생업을 접어 두고 고민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처럼 중요한데도 긴급한 일에 떠밀려 ‘삶의 의미와 자살’을 더 진지하게 파고들지 못한 채로 2년을 보낸 것이 나의 치명적인 실수요, 삶의 아이러니였다.

나의 불찰이지만, 죽음을 부정적인 사안으로만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 거들었다. 나는 삶의 의미, 특히 자살 문제를 불안이나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것 또한 고독의 원인이었다. 카뮈가 나의 위로자였다. 카뮈는 삶의 의미 문제를 덮어두고 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대표작 『시지프 신화』를 이렇게 시작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카뮈의 나약함이 아니라, 그의 섬세하고 숭고한 정신을 보여준다. 진솔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삶의 의미와 자살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에 무감각한 존재일수록 의미 상실의 고통을 덜 느낀다.

삶의 목적성이 낮은 학생들이 삶의 목적성이 높은 학생들보다 약물에 연루될 가능성이 두 배가 높다(베티 루 파델포드, 1973). 그들이 약물에 현혹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약물 사용자들이 비사용자들보다 삶의 의미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의미 상실을 세심하게 포착하고 더 고통을 겪었다.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상실감에 굴복하여 약물에 의존하거나 또는 예술로 승화하든지 삶을 예술처럼 살거나.

5.

카뮈는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자살은 아니다. ‘안 된다’가 아니라 ‘아니다’가 중요하다. ‘안 된다’는 도덕에 묻힌 무(無사)유에서 나오는 말이다. ‘아니다’는 나의 사유가 이끌어낸 결론이다. 카뮈도 스스로 사유했다.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카뮈에게 자살은 비겁이었고 삶이 밝다는 긍정은 나약했다. 그는 삶의 무의미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삶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이 되고자 했다. 삶의 실존을 직시하면서도 긍정성을 추구했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했다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반항하는 인간은 자신의 지난한 운명조차 행복하게 수행한다. 오늘 굴려 올린 돌을 내일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굴레 속에서도 하루치 성취에 기뻐하고 즐겁게 수행하는 영혼이다. “시지프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카뮈를 읽으면,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애를 품고 자유와 열정으로 살아할 힘을 얻는다. 


카뮈가 삶의 의미까지 해결해 준 것은 아니다. 의미는 스스로 찾아야 할 문제다. 몇 달 전부터 나는 열정을 회복하고 싶었다. 내 인생의 르네상스였던 1998년~2002년, 2007~2012년을 다시 불러들여 다시 한 번 삶의 절정을 맛보고 싶었다. 갈망하기는 했지만, 방법을 몰랐다. 문득 이십 대 초반의 나를 구원했던 책들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십 수 년 전의 나를 만나 그때의 열정을 (회상의 세계에서) 목격하면 좋지 않을까? 그때 읽었던 책들 중 일부의 텍스트는 다시 나를 추동하지 않을까?



6.

한가위 명절에 고향으로 떠나면서 책을 챙겼다. 20대 10년 동안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다. 가장 먼저 챙긴 책이다. 존 맥스웰의 『생각의 법칙』은 나의 패러다임이 지혜로운지 점검할 책으로 포함됐다. 빅터 프랭클의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는 직관이 선택한 책이다. 표지에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대응하는 것이다.” 나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싶었다. 가볍게 읽을 책 한 권을 더했다. 스물다섯 살의 내가 밑줄을 긋고 메모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명절에만 읽을 책이 아니었다. 명절에 조금씩 훑어보고 도움이 되는 책이라면 당분간 숙독할 책들이었다. 마지막에 얹은 책은 제외했다. 두 개의 장을 읽은 결과, 이미 익숙한 내용인데다가 나를 고무시키지도 못했다. 『7가지 습관』은 달랐다. 서너 페이지만 읽어도 동기가 부여되고, 한 개 챕터를 읽고 나니 나의 문제점들이 보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던 문제에 걸려들기도 한다. 나는 “전혀 효과적이지 못한 채로 바쁘게만 살았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갑판 의자를 정돈”했던 날들이었다. 


7.
『7가지 습관』은 빅터 프랭클의 말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른 이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이 질문을 받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인생이 던지는 질문을 받는 존재다.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만이 그 대답이다.” 나는 내 인생에 책임을 져야 했다. 책임을 외면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심오한 질문에는 보다 능동적으로 달려들어 대답을 고심해야 함을 직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임감이 큰 아이였다. 나의 강점을 더욱 발휘할 시기가 왔다.

『소리 없는 절규』의 한 챕터를 읽었다. 카뮈의 말이 나왔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삶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카뮈, 빅터 프랭클, 스티븐 코비가 나를 도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미 상실의 문제는 나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현대 사회를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지만, 의미에 대한 욕구는 예외라고, 프랭클은 말한다. 그리고 전통적 가치의 준수를 강요받지 않는 젊은이들이 장년층보다 실존적 공허로 인한 고통을 더 많이 받는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

“30대 이전 세대가 센터를 찾아오는 이유를 특징지어 보면, 목적 상실감(purposelessness)이다.” - 캐롤 마샬


8.
때로는 이해가 위로를 준다. “전통의 붕괴는 실존적 공허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다. 나의 공허감은 지금껏 써왔던 글과 수업 기록 그리고 자기경영을 위해 일상을 메모하고 읽은 책들을 정리한 데이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막연히 느껴왔던 터라, 전통의 붕괴가 공허감과 연결된다는 말이 나를 위무했다. 친구와의 사별은 친구와 유가족에게는 청천벽력이었고, 내게도 극도의 고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내 개인사의 상실이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도 이어가야 했을 가치 있는 전통(개인기록과 원고들)이 붕괴됨으로 나는 갈 길을 잃었다. 아직 해결 방법을 모르지만, 유효한 진단 하나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프랭클은 1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더 큰 위로와 용기를 안겨 주었다. “프로이트는 보나파르트 공주에게 보낸 서신에서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요구하고 있다면, 그는 아픈 사람'이라고 썼다. 그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것이 정신적 질환을 드러냈다고 보기는 힘들다. 누군가 삶의 의미를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 추구는 진정한 인간 존재가 되는 데에 필수적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독특한 특징이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의 의미에 개의치 않지만, 인간은 다르다.”

9.
십대 중반에 부모님을 여읜 후 나는 수년 동안 정신적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연약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면의 혼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드러내지 않음이야말로 연약함의 표지인지도 모르겠다.) 지혜를 찾으려고도 노력했다. 스무살 무렵, 나는 외부 활동으로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혼란이 이기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스스로 혼란과 방황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감행했다. 인생의 방향성을 찾기 위해 대학을 휴학하고서 사명과 목표 찾기에 애썼던 날들이 대표적이다.

제2의 부모님(외삼촌과 외숙모님)과 공동체 생활은 애정결핍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었다. 하나의 문제가 남았다. 의미와 방향 찾기는 외부로부터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그 문제를 운 좋게 헤쳐 나갔다. 독서의 도움이 가장 컸다. 인생은 유도나 권투 경기가 아니다. 의미 찾기는 단 한방의 펀치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생은 육상 경기에 가깝다. 인생은 100m 경기이자 마라톤이다. 때로는 전력을 다해야 하고, 때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목적지를 향해 지난하게 달려가야 한다. 때로는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야 하고, 때로는 은근한 끈기와 지구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는 인생이라는 경주를 현명하고 강인하게 달려가는 선수가 되고 싶다. 이 글은 “어디에도 삶의 의미가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지금도 내 인생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스티븐 코비와 함께 사명선언문을 작성하면, 얼마간의 의미와 방향성을 찾을 것 같다는 희망도 생겼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파리(의미요법)을 통해 ‘의미를 향한 의지’를 회복할 것도 같다. 아직 읽지 못한 책에 대한 기대도 있다. 삶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점검하는 일에 존 맥스웰의 도움도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 모든 책들이 구원의 빛을 제시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1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나 다를 테니까. 

10.
2016년 내 삶의 의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삶의 의미 찾기” 그 자체다. 의미가 생기니 기쁘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도 좋다. 내겐 오늘 하루의 의미, 이번 한 해의 의미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그 정도면 살아갈 노력을 기울일 이유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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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한 잔의 커피다. 처음으로 맛보면 쓰고, 급하게 들이키면 뜨겁다. 커피를 즐기게 되면 그윽한 향기에서부터 빠져든다. 적당하게 식으면 느긋하게 한 모금씩 음미하면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젊은 날엔 이상에 취해야 아름답다. 성인이 되면 실존에 눈을 떠야 멋지다. 서른, 마흔... 예순이 되더라도 한 걸음씩 꿈꾸는 세상으로 차근차근 다가서면 된다.


커피는 자유다. 한 잔의 커피는 일상을 떠나는 잠깐의 여행이다. 삶도 자유여야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이상을 향해 춤을 추며 걸어가는 자유로운 몸짓이다.


커피는 그윽하다. 어린아이는 그윽한 맛을 모른다. 미숙한 어른들이 인생을 모르듯이. 커피 맛을 모르면 마키아또와 바닐라 라떼에 미혹된다. 찰나의 달콤한 욕망은 늘 우리를 엿본다.


자유와 그윽함은 그렇게 멀어져간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커피를 향유했고 머그잔은 비었다. 자유와 성숙을 향한 여정에 한 모금의 힘을 얻었다. 소소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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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1994년에 방영된 드라마 <서울의 달>의 테마곡 <서울 이곳은>의 첫 소절이다. 살다보면 때때로 위로를 주는 노랫말이다. 도전적인 경험 앞에서 망설일 때, 고향보다 서울이 낯설게 보였을 때, 삶을 잘못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 나는 이 소절을 부르곤 했다. 종종 영화 <박하사탕>의 명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도 떠올리면서.


서울에 올라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열차를 타고 서울에 접어들 때, 특히 서울역을 앞두고 한강을 건너갈 때 낯섬에서 오는 서글픔이 들었다. '내가 타지에 왔구나...' 사는 곳이 낯설 때의 서글픔은 평생을 고향에서만 사는 사람들이 이해할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낯섬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서울 이곳은>은 이럴 때마다 내 귓가를 맴돌았다.


서울 생활은 15년이 지났다. 고향보다 서울이 익숙해진 지도 오래되었다. 서울 곳곳의 맛집은 알아도 고향에서는 유명 음식점도 모르기 일쑤다. 교통이나 도로 상황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사투리는 여전하나 마음은 서울시민이다. 딱 한 곳만이 나를 낯설게 만든다. 한강! 한강에 가면 나는 내가 이곳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서울 이곳은>이다. 


왜 한강일까. 노랫말 어디에도 '한강'은 없지만, 드라마에서 한강은 상징적인 장소다. 달동네(지금의 옥수동 지역)에 사는 두 청년(한석규와 최민수) 그리고 두 여인(채시라와 김원희)은 사랑의 관계로, 원수지간으로 서로 뒤얽힌다. 다툴 때마다 달동네 빈 공터로 나간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그래서 뜻밖의 통쾌함이 찾아드는 공간이다. <응답하라 1994> '서울 이곳은' OST가 한강을 배경으로 시작됨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이라.



*


누구에게나 열정적인 경험이 있다. 나는 그리 믿는다. 드러커는 자서전의 첫 머리에서 "시시해 보이는 인물도 자신의 관심주제로 가면 열정적으로 변하더라"고 썼다. 나도 그러하리라. 다섯 번 이상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지만, 노래로 가면 다르다. 수백 번 이상을 들었던 노래가 수두룩하다.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 서태지의 노래들, 특히 1집과 2집은 전곡을 수백 번 들었다. 모두 합치면 수천 번이 될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이상은의 몇몇 곡들도 100번은 훌쩍 넘게 들었다.


많이 듣다 보니 그 노래가 나의 영혼이 되었다, 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곡이 있을까 싶다. 나도 궁금하다. 어떤 음악은 내게 영향을 미쳤고, 당시의 순간을 이해하거나 나의 삶과 화해하는데 도움을 받긴 했다. 이상은의 '삶은 여행'으로부터 얻은 위로는 분명 따로 포스팅해야 한다. 변진섭의 '숙녀에게'가 준 싱그러운 감정은 삶의 선물 같다. 김광석이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삶을 새로운 태도로 살게 만든다. 삶을 이해하거나 잘 살도록 만드는데 일조하는 도움이라면 아무리 작더라도 가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직접 만들거나 부른 노래는 아니지만, 30년 동안 음악을 즐겨 들으면서 떨림으로 만났던 곡을 말하려는 생각을 서른 즈음부터 가졌던 것 같다. 행동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약점이다. 오랫동안 생각은 실천되지 못했다. 어떤 곡들을 다룰지는 머릿속에 정리된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실천은 더뎠다. 생각은 진지해도 실천하는 마음은 가벼워야 행동이 빠를 텐데... 그래서(!) 결심했다.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실천하기로!


첫 곡은 <서울 이곳은>이었다. 첫 곡에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가장 많이 들었던 곡도 아니고, 가장 사랑하는 곡도 아니다. 이 글을 써야겠다 마음 먹었을 즈음,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이 노래를 들었을 뿐이다. 나는 그때, 인천의 주안동 도로를 주행하던 중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듣게 되는 좋아하는 노래는 내게 축복이다. 나는 그 곡 하나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이처럼 진한 행복이 공짜라니!) 실제로 글을 쓴 것은 '작고 가벼운 실천'을 권한 EBS 김민태 PD의 권고도 계기가 됐다. 일면식도 없지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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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르치는 사람이 나보다 더 젊은가 또는 아직은 유명하지 않은가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소이다. 소크라테스님, 나는 그대에게 나를 맡길 테니 그대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나를 가르치고 내 의견을 반박하시되,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한테 배우시오. 그대와 내가 함께 위험에 빠졌을 때 자기가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그대가 자신의 용기를 입증한 그날부터 그대는 내게 그런 분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그대는 좋으실 대로 말하고 우리의 나이 차이 따위에는 개의치 마시오." (『라케스』,  천병희 역)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라케스』에 나오는 말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하나씩의 미덕을 다룬다. 『라케스』는 용기를 주제로 하는 대화편이다. 라케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404년) 때 활약한 아테네의 용감한 장군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군을 지휘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장군은 사망하기 한 두 해 전에 소크라테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인용문이 그의 일부다. 플라톤이나 라케스를 설명하려는 건 아니다. 책을 읽다가 떠오른 여섯 분에 관해 몇 마디를 쓰고 싶다.


최근 7개월 동안 진행된 열 번의 글쓰기 수업이 끝났다. 참여했던 여섯 분은 모두 나보다 연배가 높고, 하나같이 배움을 사랑하며, 더 나은 삶을 향하여 성장하기를 열망하는 중년의 청춘들이다. 라케스처럼 선생의 나이를 개의치 않고 전심을 다해 배우셨다. 남보다 늦은 나이에 배움을 시작하거나,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배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소크라테스 역시 용기란 중무장한 보병에게만이 아니라, “욕망을 수행하는 상황”이나 “두려움이 수반되는 상황”에서도 필요한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수업은 하루 종일 진행되었다. 우리는 꽤 많은 배움을 주고받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도 쌓여갔다. 마지막 수업에서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쓰기 수업도 좋았지만, 사람들마다 다른 성격 유형을 배웠던 것도 저는 정말 좋았어요.” 열 번째 수업은 수료를 기념하여 경주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을 잠시 잊고 ‘함께하는 즐거움’에 집중하면서 이틀을 향유했다. 배움과 애정이 깊어진 만큼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이기보다는 허전함과 아쉬움으로 다가온 이들도 계셨다. 그분들조차 아쉬움을 잊으려고 애썼다.


여행 첫날밤에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상대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다른 이를 배려하느라 좀처럼 내면을 내보이지 않던 분이 속내를 꺼내어 준 덕분이었다. 한참 동안 듣고 있던 나도 끼어들어 논의를 심화시키기도 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발언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더욱 이해하고 인간이해에 대한 또 하나의 배움을 얻었던 시간이었다. 진솔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라케스는 이러한 용기도 갖춘 사람이었다.


“토론에 대한 내 생각은 이중적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는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토론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나는 어떤 사람이 미덕이나 지혜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가 진실한 사람이고 자기가 말한 대로 살아간다면 그의 언행일치와 조화를 보면서 크게 기뻐합니다. (중략) 반면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짜증나게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말을 잘할수록 나는 그를 더욱더 미워하게 되어 나를 토론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답니다.”


라케스에게서는 용기의 여러 면모 중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할 줄 아는 용기가 돋보인다. 그는 언행일치의 덕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는 짜증 날 때가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짜증나지 않는 척하며 견뎌내는 일은 라케스와는 거리가 멀다. 라케스와 소크라테스는 토론의 결과로 용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용기는 고상한 미덕입니다. 용기는 일종의 혼의 인내인데, 어리석음을 동반한 인내는 용기가 아닙니다. 지혜를 수반하는 인내라야 고상하고 훌륭해지니까요.”


묵묵하고 착한 인내만 해오던 이들이 용기 있는 발언을 시작할 때, 나는 전율한다.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목격하면서 용기라는 미덕도 후천적으로 배울 수 있음을 감동하고 절감한다. 경주여행은 끝났고, 글쓰기 수업도 마쳤다. 선생도 학생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여행은 어제 일이 되었고, 수업은 과거가 되었다. 나는 우리가 배운 미덕들 중에 용기도 포함 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용기가 “욕망을 수행하는 상황”이나 “두려움이 수반되는 상황”에서 필요한 미덕이라면, 수업이 끝난 후 글쓰기를 이어가는 일과 혼자 있을 때에도 한결같이 공부하는 일은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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