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종인 역, <신을 구하는 자> The Saviors of God

(카잔차키스 전집 『향연 외』에 수록)

 

1.

강력한 책이다.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비범하기에 그렇다. 감히 선언하자면, 향상심이 강하고 자기 성장을 위해 실제적인 고민과 노력을 해 온 이들에겐 위로와 자극 그리고 달려갈 푯대를 선사하리라. 부연 설명 없이 선언과 명제만 나열되어 있기에 모호하게 읽힐 대목이 많지만, 두어 번 읽어도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난해하진 않다. 내겐 곱씹어 새길 문장이 한 둘이 아니었다. 거듭하여 읽고 싶은 책이 됐다. 사실 두 번째로 읽는 중인데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대체 한 번은 읽을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2.

<신을 구하는 자>는 카잔차키스(1983~1957)가 1923년에 쓴 책이다. 작가 자신을 위한 책이다. 마흔이 된 카잔차키스는 인생철학을 정리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구상했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신을 구하는 자>를 탈고한 직후부터 『오디세이아』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예술로 형상화할 계획을 세웠고 <신을 구하는 자>를 쓰면서 다듬은 생각들을 『돌의 정원』이라는 소설에 흩뿌려 놓았다. (에세이를 통해 생각을 정돈하여 전하고, 소설이라는 예술로 형상화했다는 점은 카뮈의 작업 방식과 닮았다. 누가 선취했는지는 모르지만.)

 

3.

철학적 에세이와 소설로의 예술화를 병행한 방식이 의미하는 바는 최소한 두 가지다. 첫째 톨스토이나 발자크처럼, 카잔차키스는 유미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오직 예술(唯美)’만을 외치지 않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소설가였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거나 사회를 관찰했으며 개인의 자기실현을 돕기 위해 소설이라는 예술을 탐구했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은 유미주의라는 구분이 무의미하다. 작품 자체가 매우 아름다우니까! 다시 말해 놀랍도록 예술적이면서도 유미주의 너머의 가치(종교, 시대, 삶과 인류)를 담고 있으니까.)

 

둘째, <신을 구하는 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해를 돕는 중요한 텍스트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여 둔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렇다. 카잔차키스도 두 권의 저서를 특별하게 여겼다. 카잔차키스 전문가인 ‘키먼 프라이어’는 이렇게 썼다. “<신을 구하는 자>와 <오디세이아>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지목하면서 후세 사람들이 이 두 작품으로 자신을 기억해 주기 바랐다.” (키먼 프라이어! <신을 구하는 자> 영역본 번역자다. 한국어판에도 30쪽에 달하는 그의 작품 해설이 실렸는데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요긴한 텍스트다.)

 

4.

『신을 구하는 자』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철학서에 가깝다. 칸트처럼 논리와 체계를 세우는 철학서나 플라톤처럼 대화를 통해 하나의 개념을 탐구하는 철학서는 아니다. 니체처럼 아포리즘으로 구성한 철학적인 선언이다. 이 책에서 유익을 얻으려면 달콤한 사탕을 즐기듯이 문장들을 음미하면 될 것이다. 사탕은 딱딱하다. 입에 넣은 순간엔 맛도 느껴지지 않지만 혀로 굴리며 조금 빨고 나면 달콤해진다. 깊은 사유를 담은 딱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물고 빨면 달달해진다. 다른 점도 있겠다. 사탕을 오래 빨면 혀가 얼얼해지지만, 일급의 사유들을 오래 음미하면 그윽해진다.

 

5.

<신을 구하는 자>는 프롤로그, 준비, 행진, 환상, 행동, 침묵 이렇게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내가 이해한 대로 저자의 전체 메시지를 표현하면 이렇다. “너 안의 향상심을 발견하고 더욱 키워라. 전사처럼 스스로와 투쟁하여 극기하라.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깨달아 행동으로 실현하라. 정신적인 성장도 놓치지 마라. 자기실현의 완성은 침묵이다. 내가 말하는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다.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최고의 경지를 뜻함이다. 투쟁도 소리칠 필요도 없는 경지!”

 

6.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카잔차키스는 ‘준비’ 장에서 인간의 세 가지 임무를 선언한다. 첫 번째 임무는 운명애(amor fait)다! “쓸데없이 저항하지 않고 마음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 여러 가지 제한을 인정하고 아무 불평 없이 일하는 것 - 이것이 인간의 첫 번째 의무이다. 불안정한 심연 위에다 원만하면서도 환한 마음의 지역을 구축하라. 아주 씩씩하면서도 근면한 자세로 그런 지역을 구축한 다음, 그 지역의 군주처럼 우주를 도리깨질하고 키질하라.”

 

두 번째 임무는 “고뇌 속에서 피를 흘리고 그 고뇌를 심오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중에 오고 또 가장 커다란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 이것이 세 번째 임무다.” 삶의 부조리와 허무 그리고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나아가라는 선언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지만 그래도 용감하게 당신의 뱃머리를 그 심연 쪽으로 돌려놓으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당신의 의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7.

‘행진’은 네 단계로 이뤄진다. 에고, 종족, 인류 그리고 대지다. 우리의 의식을 에고에서 벗어나 인류와 대지까지 확장시켜 주는 장이다. ‘환상’ 장에서는 향상심을 추종하되 홀로 투쟁하지 말고 동료들과 연대하고 역사적 위인들과 연대하길 권한다.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그리고 대지의 힘을 얻으라고 권한다.

 

이 모든 선언과 투쟁은 결국 행동하기 위함이리라. “이론의 가장 거룩하고도 궁극적인 형태는 행동이다.” “행동은 구원으로 가는 가장 넓은 문이다.” 여기에서 카잔차키스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한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 중 하나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이고 때론 보통명사다. “우리는 신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었다. 심연, 신비, 신비, 절대 암흑, 절대 광명, 물질, 정신, 절대 희망, 절대 절망, 침묵.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불렀다. 이 이름만이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우리의 가슴을 심오하게 울리는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8.

마지막 단계인 ‘침묵’은 정신적 수련의 최후 단계다. 다다르기 힘든 이상적인 단계. “침묵은 이런 뜻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완수한 끝에 마침내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노력의 최고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투쟁할 필요도 소리칠 필요도 없다. 그는 정적 속에서 완벽하게 원숙해졌다. 그는 더 이상 파괴당하지 않는 자, 온 우주와 영원히 함께 있는 자다.” 침묵은 극단의 경지다. “여자의 자궁 속에 안착한 남자의 씨앗”이 느낄법한 편안함! 최선과 최고가 머무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평온(serenity)이랄까. 침묵의 경지는 고정점이 아니다. “그 정상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심연의 위에 매달린 채 자랑스럽고 마법적인 주문을 노래 부르는 것이다.”

 

9.

인상 깊었던 대목 하나를 적어 둔다.

 

“나는 물질을 제압하여 그것을 내 마음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되도록 한다. 나는 식물, 동물, 인간, 신들을 마치 나의 자식인양 좋아한다. 나는 마치 온 우주가 내 몸인 양 내 주위에 깃들도 또 나를 따라 오는 것처럼 느낀다.” (p.189)

 

작품의 초반부에 나오는 대목인데 처음 읽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다시 읽다보니 의미심장했다. 후반부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용이 서로 연결되는 모양새인데 이를 보면 작가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책이 아님을 느끼시리라. (카잔차키스라는 작가의 성실함을 모르지 않지만, 이런 책들은 마치 현대미술을 대하는 기분을 들게 하지 않던가. ‘이거 정말 대단한 작품인 거야?’)

 

“너는 전투를 거듭하며 전쟁에 출정한 병사의 모든 의무를 수행했다. 너는 너의 몸이라는 작은 천막에서 싸웠다. 그러나 보라, 그 싸움터는 너무 비좁았다. 너는 숨이 막혔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뛰쳐나갔다. 너는 네 종족 위에 천막을 세웠고 너만의 손과 심장이 아니라 종족의 손과 심장이 가세했다. 너는 죽은 조상들을 되살려 피를 보충했고, 그런 다음에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자 모두와 함께 전쟁터로 출발했다. 갑자기 모든 종족이 너와 함께 움직였다. 인간의 성스러운 군대가 너의 배후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대지 전체가 군의 진지처럼 진동했다. 너는 까마득한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두뇌 속 전투 계획은 계속 가지를 쳐나갔다. 대치하던 모든 원정대는 네 가슴의 은밀한 진지로 합류했다. 너의 배후에 있는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군대가 싸우는 전선에 보급품을 보내기 위한 보급 부대로 조직되었다. 이제 온 대지가 너에게 매달려, 살의 살이 되고, 저 혼돈으로부터 소리 지른다.” (p.221)

  

10.

인용문에 대한 개인적 감상과 전체 소감을 덧붙임으로 글을 맺는다.

 

1) 먼저 유대 또는 연결에 대하여. 우주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에게만 함몰되면 세상을 잃을 것이다.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면 그와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리라. 카잔차키스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로부터 배우는 자들이야말로 위대함에 이르지 않던가. 니체가 떠오른다.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해 주는 가장 강력한 표지다. 내가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카이사르가 내 아버지일 수도 있으리라.”(<이 사람을 보라>)

 

2) 비유는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유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되 비유의 언저리를 확대 해석하면 오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우월함이 아니라(전투, 제압, 보급 등의 단어 때문에 하는 말이다) 타자와 자연과의 연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가 인생을 하나의 거대한 투쟁이라고 보긴 했지만 인간 우월주의를 강조하진 않았다. <신을 구하는 자>에서 이리 말하기도 했다. “대지의 목적은 생명이 아니다. 또 인간도 아니다.”

 

3) 이 책은 향상심을 가진 이들을 위한 책이다. 상승은 힘들다. 지금 일어서서 점프를 해 보라. 점프를 위를 향한 욕망의 발현이라고 해 두자. 이 욕망은 이내 좌절된다. 중력의 힘에 끌려 이내 땅으로 내려올 테니까. 나에게 점프는 한 인간의 성장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성장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과제가 자기를 넘어서는 일, 다시 말해 극기다. 타자와 연대하고 자연이 주는 에너지를 흡수할 줄 아는 이들이 ‘극기’라는 장기전에서 더 자주 승리하리라.

 

4) ‘낮은 여기’에서 ‘높은 저기’로 오르는 이들에게는 사다리가 필요하다. 의식의 사다리, 인식의 사다리, 열정의 사다리, 실천의 사다리, 의지의 사다리…! 어떤 책은 하나의 사다리다. 누군가의 영혼을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사다리! 카잔차키스의 <신을 구하는 자>도 그런 책이다. 그렇다면 향상심을 가진 이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가. 세상살이에 ‘반드시’가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생과 사 둘 뿐이리라. 하나를 더하자면 사랑의 실천을 끼워 넣고 싶다.) 인간은 책이 없어도 자기를 향상시킬 줄 아는 존재다. 니체는 말했다. “올라갈 사다리가 더 이상 없다면 너는 네 자신의 머리를 딛고 올라갈 줄 알아야 한다.”

 

5) 사다리 비유를 사유하고 실천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향상심은 자기를 향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 내면, 실력을 높여야지 높이만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명성을 향하는 마음이 앞설 수는 있지만, 평생 명성만을 쫓으면 거짓되거나 위험해진다. 세상엔 높이에 비틀거리며 고산병을 치르는 이들이 많다. 높이에 취하여 명성이 곧 자기 존재라고 착각하거나 위선이 탄로나 갑자기 추락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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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아한 선동이 더 강렬하다

앙투안 콩파뇽 『인생의 맛』 Antoine Compagnon, Un Ete Avec Montaigue

 

1.

이리도 품격 있는 선동이라니! 몽테뉴의 삶과 사상을 40개의 에세이로 풀어낸 책 『인생의 맛』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목표’가 독자들을 몽테뉴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썼다. 1592년에 사망한 몽테뉴는 에세이의 원형인 『수상록』을 남겼다. (인문주의와 개인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상록』을 펼치고 싶었던 순간이 도대체 몇 번일까! 마흔 번에 가까웠으리라. 모든 글을 읽을 때마다 몽테뉴가 궁금해진 셈이다. (수년 전 ‘몽테뉴 스터디’도 했기에 전혀 모르진 않지만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에 『인생의 맛』을 지인에게 추천했는데, 그는『수상록』의 추천 번역본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몽테뉴를 읽고 싶다는 것이다. 『인생의 맛』을 읽은 두 명의 마음이 움직인 셈이다. 이발이중이다. (모수는 적지만) 앙투안 콩파뇽은 독자를 단박에 몽테뉴로 이끈 탁월한 선동가였다. 과장된 동작이나 호기로운 목소리는 없었다. 논리와 통찰 그리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몽테뉴 이야기를 풀어갔을 뿐이었다. ‘선동이 이리도 우아할 수 있구나!’

 

2.

책은 가볍고 작다. 200쪽도 안 된다. 5분이면 읽을 분량의 짧은 글을 40편 묶었다. 편안하게 읽고 몽테뉴가 던지는 화두를 생각하기에 좋다. 1300쪽에 달하는 『수상록』(완역본) 읽기에 비하면 부담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몽테뉴의 저력을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이다. 몽테뉴에 깊은 이해를 가진 저자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저자에게 반했는데, 그의 사려 깊음이 단 한 페이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몇 줄짜리 문단을 40여 군데 골라내어 간략하게 해설함으로 그 역사적 깊이와 여전한 현재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 페이지나 손에 걸리는 대로 선택할 것인가? 우연에 운명을 맡기면서? 아니면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을 빠르게 훑어야 하나? 이 작품이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혹은 일관성이나 완성도를 포기한 채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두서없이 다루는 데 만족해야 할까? 나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했다. 일정한 틀 없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저자가 책을 쓴 방식은 바로 몽테뉴가 글을 썼던 방식이었다. 저자는 『수상록』에 정통했기에 자유롭게 쓰면서도 몽테뉴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몽테뉴를 작은 그릇에 우겨 넣지 않았고 해석과 통찰이 편협하지 않았다. 때때로 라틴어 지식을 동원하여 몽테뉴의 생각을 풀어냈고(‘저울’, ‘성실성’ 등의 글) 몽테뉴 사상의 의의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신세계를 전염시켜 쇠퇴와 몰락을 앞당기는 것은 아닌지” 라고 염려하는 몽테뉴의 글을 두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신세계’라는 글이다).

 

“신세계를 사로잡은 것은 구시대의 정신적 우월함이 아니라 그들을 무릎꿇린 야만적인 완력이었다. 당시 몽테뉴는 멕시코의 찬란한 문명을 야만적으로 파괴한 스페인의 초기 식민지 개척사를 읽고 난 직후였다. 그는 식민주의를 처음으로 비판한 이들 중 하나다.”

 

(개인적으론 하워드 진이 떠오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깃든 야만성을 폭로한 그였다. 20대 중반에 그의 『미국 민중사』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읽으며 가슴이 뜨거웠던 날들! 2016년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개정판이 출간되고 2017년에는 하워드 진 입문서(『만만한 하워드 진』)가 출간될 정도니 아직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함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그는 2010년에 타계했다.)

 

3.

책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먼저 몽테뉴의 말을, 곧이어 저자의 말까지.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시대나 해 단위가 아니라, 매일 매분을 그린다. 내 이야기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금방이라도 내 처지뿐 아니라 생각까지 변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양하고 유동적인 사건들과 갈팡질팡하고 때에 따라서는 상반된 생각들의 기록이다. 나는 또 다른 나 자신일수도 있고, 그때그때 상황과 판단에 따라 주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 『수상록』 제3권 2장

 

“요컨대 인간 조건에 따라 해석하고 그 고난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몽테뉴의 시계(視界)는 변화에 있지 존재에 있지 않다. 바로 다음 순간, 세상도 나도 변할 것이다. 자신이 한 경험과 생각들을 기록한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다만 세상 만물이 얼마나 쉼 없이 변하는지를 기술했을 뿐이다. 그는 상대주의자다. 나아가 그의 이 같은 ‘일면’(필자 강조)을 원근법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몽테뉴는 말한다. 세상에 대한 나의 시각은 시시각각 변하고, 나의 정체성은 불안정하다. 그는 ‘귀착점’(저자 강조)을 찾지 못했지만 그것을 찾기 위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 앙투안 콩파뇽

 

책은 이런 식의 구성이다. 몽테뉴와 후대의 학자가 생각을 주고받는 형식 말이다. 이런 책의 가치는 편집 가공하는 쪽(저자)의 깊이에 달렸을 수밖에 없다. 몽테뉴는 후배의 편집에 반대나 찬성할 수가 없기에 그렇다. 나는 이 책에 만족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편집 해석한 『조르바의 인생 수업』에 큰 불만을 느꼈던 점에 비하면 정말이지 만족이다.)

 

혹시 위 구절에 감동하지 못했다면 나의 개인적 취향으로 고른 구절이기 때문이리라. 상대주의자 몽테뉴는 그의 ‘일면’일 뿐이다. 다른 글에서는 몽테뉴의 또 다른 일면들이 소개된다. 회의주의자 몽테뉴, 성실한 몽테뉴, 르네상스인 몽테뉴, 서재인 몽테뉴 등. 니체도 극찬한 이 르네상스의 거장은 매우 진솔하게 자신을 관찰하여 기록했고, 우리 모두는 그의 일면을 통해 자신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몽테뉴 읽기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할 거라는 말이다. (‘거의’라는 말의 무책임성은 참 편리하다.)

 

위 본문과 관련되긴 하지만 조금은 엉뚱한 얘기를 해야겠다. 최근 『역사의 천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 벤야민의 생애 마지막을 추적한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페이지의 여백에 ‘갈팡질팡’이라고 적어야 했다. 벤야민은 종종 우왕좌왕했다. 미국 망명을 두고 고민할 때에도 오늘의 행선지를 결정할 때에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갈팡질팡’이란 워딩으로 기록한 것이다. 몽테뉴의 표현이 반가웠던 이유다. (갈팡질팡이라 해석한 프랑스어 원문이 궁금해진다.)

 

갈팡질팡의 근원은 우유부단함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다. 지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눈앞에 마주한 사람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이 마을에서는 진리가 저 마을에서는 오류가 되고, 당시의 진리가 지금에선 거짓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푸코는 “나는 달력과 지도가 없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하는 지혜란, 이렇게 장소, 상황, 사람을 고려한 종합적이고 시의적인 판단을 뜻한다. 그렇기에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은 상대주의자가 된다. ‘지혜’라는 지적이고 감수성 짙은 고지에 이르기 위해 감지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상대주의자!

 

누군가에겐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실상 그것은 지혜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일상의 사소한 결정에서 우유부단할 확률도 높지만 그들은 점점 용기와 행동력까지 겸비하면서 우유부단함으로부터 달아날 것이다. 그런데 우유부단과 지혜는 어떻게 구분할까? (사례 없이 명제로만 언급하자면) ‘순간’은 그들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일상’은 그들의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4.

『인생의 맛』에서 가장 감동했던 글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p.179~182). 나는 자주 내 삶을 성찰한다. 생각과 성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종종 이런 고민이 든다. ‘성찰의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삶을 위해 성찰을 줄여야 할까?’ 몽테뉴의 글은 이런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추동했다. 성찰을 깊이, 제대로 하라고! 내 삶의 허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찰의 과다함이 아니라 성찰의 질적 수준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삶을 추동하는 두 바퀴인 성찰과 실천의 균형을 이루지 못함이 문제이지 깊은 성찰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아래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 몽테뉴의 두 구절이다.

 

“내 책을 아무도 읽지 않게 된다면, 내가 그토록 유익하고 즐거운 사색으로 그 많은 시간을 한가로이 보낸 것이 과연 낭비가 되는 것일까? 나라는 거푸집에 이 형상을 찍어내는 동안 나는 자신을 추출해내기 위해 수시로 다듬고 땜질해야 했으며, 그러는 사이 주인(몽테뉴 자신)도 단단해지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졌다. 타인을 위해 그리다가 내 본연의 보다 선명한 색으로 내면을 칠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작가와 한 몸인 책. 고유의 일과. 내 삶의 일부. 이 책은 다른 책들처럼 외부적인 목적과 여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 제2권 18장

 

“내가 그토록 지속적으로 호기심에 이끌려 나에 대한 보고서를 써 온 것이 시간 낭비였을까? 고작 몇 시간 동안 생각만으로 혹은 몇 마디 말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들은, 긴 세월 동안 성심과 전력을 다해 그것을 꾸준히 연구하고 작품으로 만들고 직업으로 삼은 자처럼 깊이 있게 자신을 탐구하지도, 자기 안으로 스며들지도 못한다.” - 몽테뉴

 

5.

책의 원제는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 Un Ete Avec Montaigue’이다. 2012년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 저자가 출연하여 몽테뉴와 그의 『수상록』에 대해 5분 남짓 동안 나눈 이야기가 책이 되었다. 이 방송에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 덕분에 2013년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이후 보들레르, 위고, 마키아벨리, 호메로스까지 진행되었으니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의 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한다. 저자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수업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끝으로 저자를 잠깐 소개해야겠다. 앙투안 콩파뇽!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몽테뉴와 마르셀 프루스트 전문가다. 2013년도 진행된 ‘프로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저명한 프루스트 전문가 여덟 명이 참여했는데 앙투안 콩파뇽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국내 번역된 책은 『인생의 맛』,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공저)과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이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감상으로 서평을 맺는다. 나에게 앙투안 콩파뇽이란 학자는 ‘우아한 선동’도 강렬하고 달콤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저술가다.



Posted by 보보

이틀 연속으로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지난주 감행했던 책 주문으로 고삐가 풀린 것이다. 어제는 뇌과학 책 3권이었다. 박문호 선생의 신간 『뇌과학 공부』와 해외 연구자들의 책 두 권이다. 스탠퍼드대 신경과학과 부교수인 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연구하고 있다는 스타니슬라스 데하네의 『뇌의식의 탄생』! 후자의 책은 에릭 캔델의 추천사 덕분에 결정한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의식 관련서 중 최상이다.”

 

오늘은 빈센트 반 고흐의 책 3권과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를 예찬한 책을 주문했다.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보고서 빈센트에 더 알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는 힘들었다. 서점을 둘러보니 18년 전에 읽었던 <반 고흐 영혼의 편지>가 스페셜 에디션과 새로운 판본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새로운 에디션으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을 어렵게 눌렀다. 오베르에서의 빈센트를 담은 책과 프랑스 소설가 페레데릭 파작의 평전 등을 선택했다.

 

교보문고 앱을 열었더니 주문한 책들의 여정이 보였다. 4권이 배송 중이고 4권은 출고 작업 중이란다. 나의 현재 공부 여정은 어떤가? 지금은 글을 쓰고 있고 직전에는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얼마간 읽었다(출간되던 해에 거의 읽었는데 읽지 않았던 부분을 찾아 읽는 중이다). 어제는 뇌과학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좀 더 긴 호흡으로 보자면 몇 개월 째 『그리스인 조르바』를 반복하여 읽는 중이다. 재해가 없는 한 내일도 이 책들을 읽을 것이다.

 

연간 호흡으로 따지면 2017년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중심으로 독서가 이뤄진 해였다. 더 파고들지 못해 아쉽다. 내년 2월까지는 이종인 선생의 국역본과 칼 와일드먼의 영역본을 완독할 계획이다. 그때까진 희랍어에서 국역한 유재원 교수님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출간되려나? (문학과지성사에선 올해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올해 초에 밝힌 바 있다.) 2018년 공부의 핵심 여정은 ‘로컬’과 ‘수잔 손택’으로 정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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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김진호, 갈무리, 2017)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들이다. 살면서 네안데르탈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그렇다. 책은 작곡가들도 작곡가이기 이전에 호모 사피엔스임을 알린다. (모차르트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들으며 위로받고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 일은 음악의 주된 기능이다. 음악의 저력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책은 그 음악을 창조한 작곡가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음악으로 사유하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요컨대, 음악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음악 청취에서 ‘작곡가의 마음’을 생각함으로써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자가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이다. (여러 분야의 이론으로 음악을 매만지는 지적 향연은 별미다.) 저자는 걸출한 음악 이론가이자 작곡가이면서도 음악을 삶의 풍요로움을 돕는 도구로 대한다. 삶을 음악보다 우위에 둔다. 이 당연한 처사를 외면하는 이론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점을 감안하면 다음 두 구절은 신선한 공기처럼 반갑다. (미세먼지는 오늘도 창궐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음악을 감상하며 음악을 삶과 연결하는데 음악학자들은 음악을 삶과 분리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도 학문적 엄밀성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간의 음악학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다.”(p.46)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는가? 적극적인 호모 무지쿠스가 될 생각은 없는가? 사냥꾼이었던 당신의 조상은 작곡을 했을 것이다. 당신도 작곡할 수 있다. 악보에다가 음표를 적어야만 작곡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켜고 가사도 없이 흥얼거리면 된다.”(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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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

『미국의 반지성주의』(리처드 호프스태터/ 유강은 역, 교유서가, 2017)

  


1.

반지성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정치권, 리더십, 일상사 곳곳에 반지성주의가 있다. 조금만 깊어지면 “아, 어려워” 하고 사유를 기피하는 태도 역시 반지성주의의 모습 중 하나다. 일상에서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다. 머리 쓰기를 싫어함, 편안함이나 안일함만을 추구하는 모습 등이 반지성주의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다 건너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멀게 느껴지더라도 일상에서의 반지성주의는 고민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2.

누구나 지성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두가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는 것도 문제다. 결국에는 지성의 힘과 한계를 모두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겠다. 지성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3.

지성을 어떻게 구분할까. 사실 지성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구분이 쉽지 않다. 시민의식이 부족한 이들에겐 어떤 선택이 더 공동체를 위한 길인지를 헷갈리는 법이다. 패션의식(감각)이 없는 이들이 더 나은 패션이 무엇인지 혼동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주 지성적 사유보다 독단적이고 편협한 반지성적 주장에 열광한다.

 

지성 구분의 원칙을 수립하긴 어려워도 지성을 구분하는 세 가지 팁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1) 인과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처사는 지성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단선적이지 않다.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지성은 인과관계의 실타래를 풀어가지만, 반지성은 아예 복잡하다는 이유로 실을 잘라버린다. 어떠한 명쾌함은 지성이 아니라 무사유다. (이 점에서 지성의 구분이 어려워진다. 앞서 지성에 대한 의식을 운운한 이유다.)

 

2) 난해함이 모두 지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성은 때때로 단순함이다. 최근에는 심상정 후보가 지성이 펼쳐내는 희열, 다시 말해 단순함이 주는 통쾌함을 보여주었다.

 

3) 지성은 종종 깊이와 복합적 사유로 나타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에서 ‘주의 깊은 독해’를 옹호하고, 인문학적 사유는 종종 긴 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긴 글은 두 가지로 나눠지겠다. 지성이거나 장황함이거나.

 

4.

어떤 이는 박식을, 다른 이는 통찰을, 또 다른 이는 지혜를 지성이라 한다. 박식을 지성이라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사유 없는 정보 폭식은 오히려 반지성주의의 한 유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성주의를 넓게, 다소 이상적으로 정의한다면) 호기심과 이성의 한계를 이해하여 호기심의 전횡과 이성의 독단을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을 지성에 포함해야 한다.

 

5.

(저자의 견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지성은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힘이다. 통찰에 가깝고 지혜까지는 아니다. 지혜는 그야말로 온갖 미덕이 총동원되어 발현되는 종합적 판단이니까. 나는 지혜를 지성, 감성, 의지의 결합으로 본다. 그래서 지혜는 가끔씩 출몰할 뿐이고, 간헐적인 출몰이지만 영향력이 짙고 크다. 지성, 감수성, 이타심, 이기심, 법과 도덕(현실세계에 대한 이해) 등 많은 것을 알수록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6.

지성주의가 왜 필요한가? 인생과 세상사에는 통합적이고 깊이 있는 지성적 사유를 요구하는 사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종종 야만과 타락을 막기 때문이다. 지성(주의)는 개인의 삶에도 필요하다. 지성이 불안을 걷어가기도 하고, 삶의 문제도 해결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깊이 소통할 줄 아는 공감이 필요한 만큼이나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지성도 필요하다.

 

7.

서언이 길었다. 나는 왜 이 책이 읽고 싶은가. 최소한 네 가지의 이유가 떠올랐다.

 

1) 주지주의와 주정주의의 변증법적 통합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반지성주의를 다룬 고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에 대한 오해와 불합리한 거부이기도 하고, ‘지성인들의 (야만적인) 행태’에 대한 반감이기도 하다. 그 무엇이든 극복해야 할 태도다. 모든 지성인들이 야만적이지 않고, 감수성도 지성만큼이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2) 역자가 주는 신뢰도 크다. 유강은이 누구던가. 유럽 좌파의 역사를 담은 책 『The Left』,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 등 명저들을 번역한 뚝심, 실력, 관점을 지닌 번역가다. 올해 초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다시 출간해 반가웠다.

 

3) 내가 좋아하는 학자들도 반지성주의에 말을 보탠 바 있다.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를 써 왔던 우치다 타츠루의 『반지성주의를 말하다』가 떠오른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1972년에 『생각하는 그리스도인(Your Mind Matters)』로 반지성주의를 비판했다. (스무 살 때, 존 스토트의 “기독교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은 나를 깊이 위로했다.)

 

4) 책은 1964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인데, 50년 만에 번역된 이유가 궁금해서라도 읽고 싶어진다. 그나저나 680쪽의 분량은 전혀 저항감이 없는데, 35,000원이라는 책값은 적잖이 부담된다. 이것도 반지성주의인가?(^^) 반지성주의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개념과 범위를 알기 위해서라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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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마음이 괴롭지는 않으니 자책은 아니다. 얼마간의 부끄러움을 동반한 현실 인식이다. 겸허함도 아니다. 오만과 겸손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그보다는 이미 알게 된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앞으로 알고 싶은 것들에만 시선을 둠에서 생기는 지적 열망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자의 눈에는 나아갈 길만 보이는 법! 문득 이렇게 모르는데 강연을 하며 살아가는 삶의 관용이 고마워진다. (누군가에게 속삭이고 싶다. 저기요, 강사들의 얄팍한 지성을 주의하세요! 예외는 아주 드물 거예요.)

 

물론 내게도 열정이란 게 있어서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왔고, 꾸준히 글을 썼다. 공부한 내용을 긴 글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내게 남은 것은 몇 가지의 암묵지다. 암묵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배우고 '익히는' 학습과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암묵지는 우리네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만, 암묵지를 평가하는 자격증이나 학위는 없다. 반면 형식지는 다른 사람과 쉬이 공유할 수 있는 매뉴얼과 같은 지식이다. 내 무지의 대상은 이 형식지를 말함이다. (실제의 나와 사회적 나의 괴리가 크다는 '사실'을 느끼는 요즘이다.)

 

며칠 전, ‘제대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알고 있는 형식지들을 적어보았다. 분야, 인물, 개념, 서적을 막론하지 않고 적었더니 몇 가지는 되었다. 수잔 손택, 『그리스인 조르바』, 문예사조, 리버럴 아츠, 인문주의, 긍정심리학, 학습조직 등이었다. (관심도 많고 이미 열심히 읽어와서 조만간 목록에 추가될 몇 권의 후보 목록이 더 있긴 하다. 재능, 파커 파머, 『변신』, 김영하,『오딧세이아』와 그리스 비극! 한참 멀었지만 언젠가 포함하고 싶은 목록도 있다. 『괴테와의 대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광기의 역사』) 자기이해나 자기경영, 강의력이나 독서력은 세상에 분명히 실재하는 능력이지만, 매뉴얼과 같은 명료한 지식이 없다는 점에서 제외시켰다. 성격심리학이나 재즈는 관심이 많지만 아는 바가 얕아 빠졌다. 벤야민은... 두 전문가의 강좌도 듣고 강독 세미나에 참석하여 읽었지만, 아직은 잘 모른다.

 

나는 학위가 없다. 공부를 하다보면, 종종 제도권에서 공부해서 학자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회인가? 모르겠다.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환경이나 남 탓이 아니다. 내가 그렸던 20대 인생 그림에는 대학 교수라는 직함은 없었다는 말이다. 전문가가 되는 길은 다양했다. 학위 취득, 현장에서의 성과, 네트워크 소속, 책 출간 그리고 진짜 실력 쌓기! 당시 나의 선택은 ‘진짜 실력’을 갖추는 길이었다. 그러면 자격증이나 학위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책'으로 승부하고 싶었다. 이 생각은 이상적인 동시에 순진했다. 나다운 길이면서도 세상에 대한 무지의 발로였다.


지적 스승이 있었더라면 공부에 더욱 탄력을 받았을 테지만 나는 그런 스승을 만나지는 못했다. (구본형 선생님을 존경하고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 분의 힘도 암묵지에서 나왔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하나의 공동체에서 배운 것을 실현해가면서 혼자서나마 열심히 공부해왔다. 광장까지는 아니어도 골방에서의 공부는 아니었다. 카페에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식의 공부라고나 할까. 만나면 지적 교류를 즐겼고, 집으로 와서는 책을 즐겼다. 나를 전율시키는 주제를 만나면 여러 중요한 책을 읽으며 글로써 정리했다. 가장 길게 쓴 글은 인문주의와 리버럴 아츠에 관한 에세이인데, A4 100 여 장에 가까운 분량이다. 손택, 조르바도 수십 장에 달한다.

 

책으로 출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능력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출간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는지 모르겠지만(후자라고 믿고 싶다), 거의 10년 동안 세상에 내놓은 지적 결실이 없었다. 날마다의 생산성은 나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빈약한 결실의 지난 삶들이 참 아쉽다. 누가 책을 출간하는가? 목표를 세웠으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자가 책을 출간한다. 실력이 아니라 목표달성능력이 중요하다. 누가 좋은 책을 출간할까? 목표달성능력을 가진 실력 있는 분들이 좋은 책을 출간한다. 목표달성능력이 출간 여부의 관건인 것이다. 나는 이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세상은 나에게 자격, 학위, 저서 등의 스펙을 요구했다. 기업교육의 ‘언저리’에서 12년 동안 살아왔음이 신기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잘 살아와 준 고마움에서 나온 미소인지, 어떻게 살아왔지 하는 의아함의 실소인지 헷갈린다. 어쨌든 웃으니, 좋다. “유머 감각이 너를 구원하리라”는 캠벨의 말도 떠오른다. 잠시 덤덤하게 나 지적 수준(내지는 현실)을 돌아보고 나니, 담담하게 결심하게 된다. 담담함은 그윽하고, 평온하고, 객관적인 상태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 담담함이 나를 기분 좋은 결심으로 이끈다. ‘수잔 손택과 『그리스인 조르바』만큼은 제대로 알자!’ 한동안 달려갈 나의 푯대다. 이 책들을 읽으면 희열이 느껴진다. 나의 희열을 쫒는 삶! 근사하다. 치열하게 공부하여 결실마저 맺는다면, 적어도 지적인 영역에서는 내 삶을 보면서 미소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실소가 아닌 흡족함의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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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신문을 들고 오는 시간은 3~4분이다. 빈 손으로 나간다. 핸드폰도 필요치 않다. 한 시간 외출에도 핸드폰을 두고 가기도 하니, 잠깐의 외출이야! 책을 들고가는 일도 거의 없다. 시간이라면 찰나까지 아끼고 싶긴 해도 틈새 시간에 할 일들은 많다. 잠시 멍 때리기, 체조하기, 콧노래 부르기, 아무도 몰래 춤 추기, 하루 일정 돌아보기 등. 엘리베이터를 한참 기다린다고 해도 괜찮다. 스트레칭을 길게 할 수 있으니 좋다. 내가 오가는 시간대에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웬일인지 오늘은 책을 들고 나갔다. 조셉 캠벨의 산문집 『신화와 인생』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아무렇게나 펼쳐 한 문단을 읽었다. "우리가 과학적 진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는 -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 항상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데" 머릿속에는 과학적 환원주의와 과학적 연구 결과를 해석할 수 있는 통찰의 중요성이 떠올랐고, 눈은 다음 문장을 따라갔다. "왜냐하면 진리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 자체는 절대성을 품는 단어지만, 인간에 의해 다뤄지는 순간에 진리의 절대성은 사라지고 만다. 서로 다른 관점으로 진리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하다.


"윌리엄 제임스는 "진리란 곧 유용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생각이 터졌다. 이 문장은 내 안의 지적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었다.


지난 주에 "저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해요"라는 한 지인의 말을 들었다. 어디에서나 절대성이 훼손되지 않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사유 단념을 촉구하는 듯한 뉘앙스여서 "진리란 없다"는 표현을 싫어한다. 인생에 관한 고민을 할 때, 종종 듣게 되는 "정답은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단 하나의 정도는 없지만, 나에게만 적용되는 당시로서의 맞춤한 정답은 있다! 먼 훗날, 더 나은 길을 깨닫더라도 당시의 식견과 의지로서는 정답인 것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답은 없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정답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한두 가지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거나 어떤 이념에 경도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진리가 없다고 말은 하지만, 삶과 신념 그리고 가치관이 어떤 하나의 진리를 표방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자신의 그 관점 밖의 것들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에겐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진리가 없다는 말은 쉬이 하지 못한다. 누구나 어떠한 가치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진리가 존재한다. 절대 진리가 아니라 변모하는 진리로써.


내게 진리는 '유용성' 또는 '지혜나 중용'이다. 여러 가지로 표현했지만 공통점은 변용성(變容性)이다. 무엇이 유익한가. 사람마다 다르다. 내게는 조언이 유익하고, 누군가에는 공감이 유익하다. 마치 서로가 각기 다른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과 같다. 지혜도 마찬가지다. 지식과 달리 지혜는 변모한다. 공자가 안회와 자로를 각기 다르게 대했다. 둘의 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용도 두 가지 사이에 고정불변의 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 장소, 상황, 사람에 따라 중용은 변화무쌍하게 자신의 중간 지점을 찾아다닌다. 윌리엄 제임스가 이런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진리'에 반하는 개념으로 잠시 '상대 진리'를 사유했다. 상대성의 기준이 유용, 지혜, 중용인 셈이다.


다시 책을 들었다. 다음 문장이 반가웠다. "이른바 절대진리의 관념 - 즉 사고하려는 인간 정신의 상대성의 범위 너머에 이른바 절대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 - 을 나는 '진리 발견의 오류'라고 부른다. 저주 받아 마땅할 저 설교자들 모두의 문제 역시 진리 발견의 오류다." 캬! 대화가 이뤄졌다. 캠벨 선생은 나의 사유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맞춤한 말로 화답했다. 어디 설교자들 뿐이겠는가. 자기계발 강연이나 정치적 연설에서도, 스포츠 중계 해설자들도 수없이 진리 발견의 오류를 범한다. 그러니 문제(problem)라고 하고 싶진 않다. 우리네 실존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를 인식하고 살면 더욱 지혜로워질 문제(agenda)이긴 하고.


위의 문장을 읽는데 1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책을 덮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마음이 차올랐다. 아침 독서는 이로써 끝이다. 점심 식사를 하고서, 다시 펼쳐보았다. 이어지는 문장은 너무 아름다워서 내 생각을 덧붙이면 모조리 사족이 될 정도라고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또는 자기 구루가 이른바 절대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니체의 말마따나 '개념의 간질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어떤 관념을 지니게 됨으로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다." 아! 역시, 명료한 니체다.


"진리가 없다"는 말로 진리에 대한 사유를 회피하거나 자기 안에서 추구되고 있는 진리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명제의 간질병'이려나. "진리가 없다"는 말은 개념이 아니라 문장이니까. 다시 책을 덮는다. 사유의 시간을 제외하면 몇 줄을 읽는 데에는 3분이 채 걸리지 않았을 테지만, 한나절짜리 에너지는 되었다. 한 마디를 덧붙여야겠다. 아침에 『신화와 인생』을 들고 나갈 때에는 몇 편의 글만 발췌독했을 걸로 기억했지만, 책을 펼쳐보니 200페이지 가까이 밑줄 쳐 가며 꼼꼼히 읽은 흔적이 있다. 책의 어디를 펼쳐도 밑줄과 별 표시가 보인다. '내가 무슨 독서의 망각병을 앓는 건 아닐 텐데, 읽었다는 사실도 새까맣게 잊고 사는구나.' 아침부터 영감을 얻어 기분이 좋아서일까? 좋은 책을 새롭게 읽을 수 있어서 설렌다.



Posted by 보보

어느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책을 읽었다. 전날 밤, 침대 맡에 미리 놓아두었던 책이었다. 책 선택은 즉흥적이었다. 계속 읽어오던 책이 아니었고 수개월 전에 몇 편의 에세이를 골라 읽긴 했던 산문집이다. 요즘의 독서테마와 연결되지도 않았고, 계획된 강연과도 연관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지금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이었다.


삶의 소소한 습관이 지적 생활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그것도 막강한 영향이다. 이 책을 읽는 바람에 휴일 아침 시간이 나의 학창시절 회상과 한 작가의 젊은 시절을 정리하는 일로 채워졌다. 눈을 떠서 읽은 글이 헤르만 헤세가 1923년에 쓴 ‘자전적인 글’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였던 것.


사실 어제 저녁만 해도 이튿날 오전 시간을 이렇게 보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계획 자체가 없었다.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우리의 약점이나 습관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어젯밤 ‘잠들기 전에 뭘 읽지?’ 하는 물음에 낭만적이고 즉흥적인 기분으로 헤세의 산문집을 꼽아들었던 일로부터 빚어졌다.


이것이 중대한 불찰은 아니리라. 특히 남들의 눈에는 읽어야만 하는 책을 읽는 독서가 아니라 여유로운 끌림에 따라 읽는 나의 독서 생활이 부럽게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나의 낭만적인 독서 성향을 좋아한다. 다만 그 빈도가 ‘가끔씩’이 아니라 ‘너무 자주’가 되면 삶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점을 잊고 싶지도 않다. 푯대를 쫓는 삶이 주는 유익도 크니까.


지나치게 생산적인 삶이 우리에게 독이라면, 지나치게 낭만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효율도 낭만은 모두 장단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장점에서 단점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정확하게 아는 일이다. 중용이란 바로 그 건강한 균형 지점에서 머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을 최상의 가치로 꼽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따르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교양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나는 좋은 문장들은 볼펜으로 밑줄을 긋지만, 이 말에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쳐 두었다.


건강한 중용의 지대를 찾고 머무는 일은 분명 이상적인 발상이다.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대개의 가치가 그렇다. 사랑, 용기, 중용, 정의 모두가 어디 쉽게 손에 잡았던 적이 있던가. 목표는 손에 잡아야 맛이지만, 가치는 추구함으로도 의미가 있다.


추상적인 얘기도 구체성을 덧입히면 손에 잡히고 눈에 들어온다. 저 위대한 가치 ‘중용’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나도 잠자리에서는 『학습하는 조직』을 읽으며 전문성을 추구하고 싶진 않다. 생각만 해도 삶이 팍팍해지는 느낌이다. 낮과 밤은 다르다. 기분이 다르고 실제로 일상의 모습도 달라진다.


헤르만 헤세


밤에 읽을 책이라면. 학습 조직보다는 헤르만 헤세의 『잠 못 이루는 밤』이 탐난다.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좋다. 목차를 보고 마음에 드는 장을 펼친다. 제목으로 예상한 내용과 실제의 내용이 다르기도 하겠지만, 이를테면 나는 ‘밤의 얼굴’이나 ‘옛 음악’ 또는 ‘머나먼 푸른 하늘’이라는 제목의 장을 펼칠 것이다. 이때 잔잔한 재즈가 흘러도 좋겠다.


밤이 휴식의 시간이라면, 낮은 일하는 시간이다. 아쉽게도 나는 문학만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직업은 아니어서, 낮에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은 고달픔이 아니다. 밤의 여유와 자유 그리고 낭만과 사랑을 누리는 이들에게 낮이란, 삶의 균형을 이뤄주는 필수적인 시간이다. 또한 낮의 생산적인 활동들은 밤의 가치들(여유, 자유, 낭만, 사랑)을 실현하도록 돕는 도구다.


그러니 둘은 대립적이지 않다. 상호보완의 관계가 되어 중용을 향해 손잡고 나아간다. 여기서의 중용이란 『학습하는 조직』과 『잠 못 이루는 밤』 간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그것은 타협, 무지, 포기, 아쉬움이다. 중용의 정확성을 지향해야 한다. 인생의 다른 상황들보다 책읽기에서 중용의 실천은 그나마 간단하다. 낭만과 효율을 모두 추구하려는 나의 마음은 두 가지 원칙으로 정리될 수 있을 테니까.


“밤에는 책장에서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꼽아서 읽을 것. 최대한 즉흥적이고 낭만적일 것.” 문제는 내가 어젯밤에 헤세의 산문집을 들자마자 잠들었다는 점이다. 아침에 일어나 뒷부분을 마저 읽느라고 오전 시간을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 보냈다.


이런 나를 바라보다가 원칙 하나를 추가했다. “밤에 읽던 책은 다음 날 아침에 불러들이지 말 것. 미처 한 챕터를 끝내지 못했더라도! 낮에는 즉흥적이고 낭만적인 독서에서 벗어나 계획적이고 생산적인 독서에 몰입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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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주머니 속의 돈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돈을 벌지 말자는 뜻도 아니고, 돈의 중요성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돈을 버는 활동만큼이나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살뜰한 관리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섣불리 말하기 전에 주어진 시간을 살뜰히 경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지만 인지상정은 어쩔 수 없다. ‘읽을 책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 말이다. 24시간을 들여다보면 낭비하는 시간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낭비의 틈을 다 메꾼다고 해도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인생의 필멸성과 시간의 유한함이 삶의 본질이니까. 결국 아쉬움을 줄여주는 것은 ‘욕망의 우선순위’와 ‘살뜰한 시간 관리’에 대한 지혜로운 실천이다.

 

이 같은 사유에 다다르면,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진다.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가장 중요한 일에서부터 하나씩 집중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독서 생활도 점검할 수밖에 없다. 아무 책이나 읽을 수가 없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은 나의 장서에서 가장 훌륭한 책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는 책이라면, 내가 이해하는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기를 바란다.

 

나는 한 지성인과 깊이 교감한다. “이왕 신문을 구독할 바엔 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들을 받아보지 않는가? 유아용 죽 같은 읽을거리를 뜯어먹는 일은 제발 그만 두자. 모든 학회의 보고서가 우리에게 도착하도록 하자. 그래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자. 왜 우리가 읽을 책의 선정을 유명 출판사나 서점에 맡겨야 하는가?”(소로우, 『월든』)

 

이 말은 시간의 유한함에서 빚어낸 결론이 아니었다. 가벼운 읽을거리만을 읽는 세태를 향한 충언이었다. 소로우는 앞에서 “(가벼운 독서 취향은) 시력의 감퇴, 혈액순환의 장애 그리고 지적 능력의 전반적인 위축 내지는 퇴보만을 가져 온다”고 썼다. 그런데도 이러한 시시한 빵은 “어느 집의 부엌에서나 매일 구워지고 있으면 시장성도 확실하다”고 개탄했다. 유한한 시간 탓이든 시시한 책들이 난무해서든, ‘왜 가장 위대한 책을 읽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가슴에 남는다.

 

지적 생활자로서의 다짐이 또렷해진다. 훌륭한 책만을 읽어야겠다! 세 가지의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훌륭한 책은 많지만 읽을 시간이 유한하다(시간의 유한함). 둘째, 세상에는 시시한 책들이 넘쳐나니 자칫하면 훌륭한 책들과 멀어질 수 있다(시시한 책의 무한함). 세번째 이유는 현재적인 가치가 넘쳐난다. 시시한 책들을 읽으며 열불 내거나 아쉬움을 느끼기보다는, 위대한 책들을 읽으며 감탄하고 깨우치는 일이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


오늘 나는 책장의 한 칸을 비웠다. 그 칸에다 ‘나에게 필요한 책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가 가진 장서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은 무엇인가?(위대한 책들) 어떤 책이 지금의 고민과 나의 심리적 병통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까?(현재적인 책들) 앞으로의 내게 필요한 지혜, 지식, 기술을 채워줄 책은 무엇인가?(생산적인 책들) 나의 일상을 아름답고 창의적이고 풍요롭게 만들 책은 무엇인가?(낭만적인 책들)


물음에 답하는 스물다섯 권의 책으로 빈 칸을 채웠다.

날마다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내어, 계속 읽어가겠다.

나의 내면과 일상을 더욱 잘 가꾸기 위하여. (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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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휴일 오후, 느긋한 시간이었다. 양평 서재의 책들을 만지작거리며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다가 밀란 쿤데라의 『향수』를 발견했다. '쿤데라의 책이 여기에 있었구나.' 이 책을 찾았던 것도 아닌데, 반가웠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와 같은 제목이지만, 서로 다른 의미의 단어라는 사실을, 책 뒤표지를 보고야 알았다. 쥐스킨트 책은 화장품의 하나인 향수(Perfume)였고, 쿤데라 책은 그리워하는 마음의 향수(Nostalgia)였다. ‘쥐스킨트의 『향수』는 읽었으니,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향수』도 읽어야지’ 하는 치기 어린 생각을 하면서 뒤표지의 글을 읽었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이다. 괴로움은 '알고스'이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탤지어'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생긴 괴로움이다. 향수는 무지(ignorance)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무엇이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잃어버린 유년기 또는 첫사랑에 대한 욕망."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을 법한 문장인데, 이제는 제법 이해하겠다. ‘무지에서 비롯된 고통’이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그이의 일상이 궁금해도 물어볼 수가 없다. SNS의 흔적으로 확인하더라도 마주앉아 두 눈을 바라보면서 나누는 대화나 다정한 문자 메시지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갖는 일이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안부를 찾게 되고, 다른 연인을 만났는지도 궁금하다.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다. 이때의 감정을 궁금함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차라리 고통에 가깝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여기저기 넘겨보다가 깜짝 놀랐다. 책의 곳곳에 밑줄이 그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었다. 군데군데 쓰인 메모는 내 필체가 분명했으니까.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리는 일은 종종 벌어지기에 새삼스러운 건 없지만, 막상 당사자로서 순간적으로 드는 감정은 경악이었다. 뒤표지의 문구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향수가 화장품인지, 그리움인지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리다니!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읽었는데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책이 있다는 사실은 ‘상쾌한’ 충격이다. 나는 읽은 책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삶에 관한 또 하나의 진실 한 조각을 주운 느낌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모두 기억할 수 없다는, 그리고 메모까지 해 놓아도 새까맣게 잊기도 하는 게 우리의 두뇌라는 사실 말이다.


얼마 전, 비전과 목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강사의 강연을 들었다. 긴 강연이 끝나고 자신의 이야기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강사의 사례도 30분 가까이 진행되었다. 강사는 열정적이었고, 명석했다. 자신감과 열의도 있었다. 많은 도전을 감행했고, 하나의 도전이 성공에 이르지 못하면 새로운 목표를 세워 다시 도전했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그를 만든 힘은 비전과 목표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기이해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도 거침없이 도전하는 하는 자신감과 도전정신이다.' 게다가 그는 비전과 목표를 신중하게 세웠다. 그가 20대 중반에 작성한, 무려 6페이지에 달하는 인생 로드맵은 감동적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비전과 목표를 수립한 것이 자신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감동과 분석은 별개다. 나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비전과 목표가 포함된 인생 로드맵은 그의 성공을 설명하는 한 가지 요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성공을 모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경험 너머를 사유하지 못하고, 타인의 입장을 공감하지 못하는 경험주의자들은 인식의 편향성에 곧잘 빠진다. 굳이 경험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인식의 편향성은 어디에서나 자주 발견된다. 젊었을 때부터 비전에 관심이 많았던 어떤 사람이 비전에 관한 책을 읽었다고 사정해 보자. 그는 자기 삶을 들여다보며 생각할 것이다. '내 삶에도 비전이 큰 역할을 해 주었군.'


만약 그가 실행력에 관한 책을 읽는다면, ‘실행력이 매우 중요하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실행력이야말로 주요한 성공요인이라고 판단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어떤 주제를 인식하고서야 비로소 그 주제의 유용성을 깨닫는 동시에 그 주제만큼만 인식의 편향에서 벗어난다. 그날의 강의는 강사 자신의 성공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들여다보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무엇 덕분에 성공하고 성장했는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책, 어떤 만남, 어떤 사건이 우리를 크게 도왔을 수도 있다. 심지어는 결정적인 도움이었음에도 우리가 그것을 잊었을 수도 있다. 『향수』를 읽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나처럼 말이다. 우리가 책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만난 사람도 잊어버리지 않은가. 심지어는 고마움을 느꼈던 은인도 잊어버린다. 헤세의 소설을 보라.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어둠의 세계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싱클레어는 “그 구원이 어린 시절의 삶에서 가장 큰 체험”이라고 느끼면서도 데미안을 잊고 살았다. “고마움의 감정이란 도무지 신뢰할 만한 미덕이 아니다. 그런 걸 어린아이한테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 같다. 그런 만큼 내가 데미안에게 보여준 철저한 배은망덕은 아주 이상할 것도 없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사람도 잊는 게 우리들인데, 고작 읽은 책이야 아무렴 어떠한가. 그러니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아닌지 도무지 헷갈리더라도 자괴감에 빠져들 필요는 없다. 읽은 책을 몽땅 잊어버려도 괜찮다. 더러 위대한 지성인들(이를테면 몽테뉴)도 꼼꼼하게 읽은 책을 잊기도 하니까.


덧#1. 배은망덕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싱클레어가 어린이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린이들은 이해하지만, 배은망덕을 일삼는 성인이라면 정신적, 인격적 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덧#2. 책을 기억하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부주의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부주의함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정성을 기울여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도, 세월은 우리의 기억을 앗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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