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관점을 얻으려면 산을 오르자. 산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산 아래에서의 신선한 공기인가. 산에 올라서 획득할 높은 관점인가. 조금 오르다 말고 자리를 펴고 먹고 마시는 이들에게도 고유한 재미와 목적 그리고 들려 줄 스토리가 있다. 정상에 등정하여 산맥을 살펴보려는 이들에게도 그들의 기쁨과 의미 그리고 들려 줄 스토리가 있다. 당신은 무엇에 끌리는가.


이는 교제 VS 고독과 같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어느 길에나 벗과 동행이 존재하니까. 오를수록 동행이 줄어들지만 최정상이 아니라면 벗이 있기 마련이다. 돗자리에도 산행길에도 고유한 의미와 기쁨이 존재한다. 자신의 길을 선택하면 되리라. 꿈꾸는 자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여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여기를 떠나 길을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벗이 기다릴 여정을.


타성과 유혹을 넘어서야 하리라. 오르려면 돗자리를 떠나야 하고, 즐기려면 산행을 멈춰야 한다. 높이 올라 통찰을 얻고 싶다면,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자. 오르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등정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자. 오르면 멀리 보인다. 새로운 관점을 얻는다. 여러 산에 갔더라도 잠깐 오르다가 포기한 경험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것들을 추구하자.


<실천을 위한 끼적임>

:

인문정신이라는 지적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며


- 개인적 인문정신부터 탐구할 것 : 공감, 자유, 용기

- 소크라테스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연구할 것

- 언어 감각을 갈고 닦을 것 : 한국어, 영어

- 동서양 역사의 기초 지식을 탄탄하게!

- 나만의 문학 고전 집필을 이어갈 것

- <인문주의를 권함> 집필에 매진할 것

- 희랍 고전들을 꾸준히 읽어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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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 책에 대해.'


『인간성 수업』이 안긴 생각이다. 올해 들어 두 번째다. 연초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다가 감탄과 전율을 수십 번이나 느꼈다. 책을 읽다가 이런 생각도 했다. '공부 인연들과 함께 강독회를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네. 아... 루크레티우스!


『인간성 수업』은 루크레티우스 읽기에서 한 가지가 더 가미된 독서 여정이다. 감탄, 전율 뿐만 아니라 '울음'마저 안긴 것! (지적 희열은 나를 춤추게 하지만 지적 위로는 타자를 향한 깊은 공감 만큼이나 울컥하게 만든다. 마사 누스바움은 내게 지적 희열과 지적 위로를 모두 선사한다.)


나를 위로하고 지지하고

나아갈 길을 넌지시 보여주는

책을 만나다니! 독서가의 지복이다.

 

2.

책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생각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한층 더 이해하고 싶은 책, 읽은 내용을 일상적 실천으로 이어가고 싶은 책, 그리하여 나와 우리가 사는 세계에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을 안기는 책! 작년에는 시어도어 젤딘이, 올해는 마사 누스바움이 젊은 후학을 한없이 격려한다.


3.

오늘 아침 1시간을 할애해 두고서 『인간성 수업』을 펼쳤다. 12페이지 즈음 되는 한 절을 읽겠다는 계획이었다. 3페이지 정도 읽고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보다는 책에서 얻은 희열과 비전이 보였다.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로는 충분했지만(그래서 책을 덮었겠지만) 이 책은 수양뿐만 아니라 지성을 위한 책이기도 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펄떡이는 가슴을 달래가며 40분 동안 12페이지를 읽었다.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 (아래 구절이 안긴 축복이다. 반엘리트적, 반텍스트적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소크라테스!) 책을 덮고 나서도 독서는 이어졌다. 생각에 잠겼고 실천 의지를 다졌으니까.


"역사 속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자기 성찰에 나서도록 일깨우는 일에 헌신한다. 그는 자신이 만나는 시민들의 믿음 외에는 아무런 지식 자료에 의존하지 않으며, 무비판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민주주의가 이용 가능한 최선의 정부 형태라고 본다." (p.54)


기억과 희망을 위해, 최근에 지적 희열과 지적 위로를 안긴 책을 정리해 둔다. (희열은 루크레티우스, 위로는 젤딘과 누스바움이다.)


- 루크레티우스, 강대진 역,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아카넷, 2012

- 마사 누스바움, 정영목 역, 『인간성 수업』, 문학동네, 2018

- 시어도어 젤딘, 문희경 역, 『인생의 발견』, 어크로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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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모든 팻 걸(Fat Girl)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지적이고 유쾌발랄한 페미니즘 책을 쓴 린디 웨스트의 말이다. 그녀는 강하다. "끔찍하게 뚱뚱하다"(한 영국 신문의 표현)는 말에도 그녀가 취한 반응은 '셀프 하이파이브'가 전부였다.(p.65) 이보다 훨씬 악랄한 댓글로 단련된 그녀에겐 이 정도는 분노나 절망할 사안이 아니다. 그녀는 '린디 웨스트'다. 거짓되고 저열한 문화와 투쟁하며 살아온 명랑한 전사! 


평생 팻 걸(Fat Gril)로 살아온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린디 웨스트는 용감하고 아름다운 결정을 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치에도 없는 머리 크리를 가졌고 팻 걸이었다). 결혼식의 당연한 의례처럼 여겨지는 다이어트 대신 예비 배우자와 마음껏 먹고 마시는 여행을 강행했다.  


결혼식 사진을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된다. '세상의 모든 팻 걸'들이 봐 주기를 바란다는 바로 그 포스팅이다. 혹시 그녀의 황홀한 글쓰기를 보고 싶다면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를 읽으면 될 테고.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의 뚱뚱한 복수천사’(NPR)라는 표현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녀는 '우리의' 친구처럼 살갑다. '뚱뚱한'은 단 한 장의 사진으로도 알 수 있고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복수천사'라는 모순된 표현에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강한 여자는 싫다고? 그럴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린디 웨스트는 강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따뜻하다. 게다가 웃음마저 안긴다. 페미니즘은 어렵고 복잡한 이론으로도 설명될 수 있고 유쾌 발랄한 삶의 투쟁기로도 전해질 수 있다.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은 후자의 노선을 선택한 책이다. (편견이 어디에나 존재하긴 하지만, 이 책이 ‘강한 여자’에 대한 편견마저 불식해 주기를! 아울러 강한 남자, 섬세한 남자에 대한 편견들도 없애주는 책이 등장하기를.)


결혼식 사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녀의 웃음에서 진리에 이른 이의 자유로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가 이른 진리는 다음과 같다.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몸이 곧 나’다. 페미니즘을 유쾌하게 설명한 이 책을 통해서든, 켄 윌버의 『무경계』를 통해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이 곧 나라는 진리를 이해하고 체화하는 것은 행복한 인생을 위한 첩경이다.


덧. 포스팅의 제목을 '세상의 모든 팻 걸들에게'라고 달았다. 그녀의 바람을 담은 제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걱정을 하면서 택한 제목이다. '팻 걸'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욕을 안기는 표현이라는 비방 또는 이 제목 자체가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팻 걸'들의 외면을 부를 것 같아서다. 여러 가지 염려를 하다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녀를 가장 외롭게 만드는 일은 독설을 퍼붓는 남성들이 아니라 여성들의 무관심이 아닐까?'  


* 그녀의 결혼식 https://apracticalwedding.com/lindy-west-wedding/

* 린디 웨스트, 정혜윤 역,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세종서적




나도 이르고 싶은 자유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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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들이 차고 넘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내가 사는 공간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는데 어찌 외면할까! (르 클레이조 『빛나 : 서울 하늘 아래』) 



카프카를 찬미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를 두고 ‘나의 카프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번역서 제목이긴 하지만.) 그냥 친구도 아니다. 막스 브로트다. 카프카 애호가로선 당연하고 마땅한 필독서다. 책의 내용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카프카를 이해하는 길이 될 중요한 텍스트! 『나의 카프카』는 브로트가 카프카에 관해 쓴 중요한 텍스트 세 개를 합권한 책이다. (막스 브로트 『나의 카프카』)


 

동업자들의 작업 현장은 어떨까? 작업 비밀이라도 캐내겠다는 야심은 아니다. 위로(지난한 일상은 매한가지일 테니), 휴식(책상과 서재가 있는 사진을 보면 나는 쉼을 누린다), 약간의 학습(슬쩍 엿보는 것만으로도 때론 배움을 얻으니까)이면 충분하겠다. ‘또 모르지. 영감이나 도약의 실마리를 얻을 지도.’ 사진과 함께 작가들의 목소리도 글로 담아냈다고 하니 드는 욕심이다. 동업자라고 하기엔 멋쩍은 일급 작가들의 작업실을 담은 책이니까. (질 크레멘츠 『작가의 책상』)


 


세월의 흐름을 억지로 거스려는 억지 노력(과도한 시술)도 꼴불견이지만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무관심한 일도 아쉽다. 명저도 때로는 자극적인 제목을 욕망한다. '늙지 않는 비결'이라니!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계속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텔로미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하고 텔로미어와 계속 접촉해야 한다. 그 방법은 보여 주는 이 책은 지난 10년간 나온 생물학 책 중에 가장 놀랍다." 에릭 캔델의 추천사다.  



이런 마음은 100개도 넘는다. 조바심은 없다. 열심히 살다가 여가 시간이 생기면 감사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서, 내게 주어진 잠깐의 시간 동안 책 속으로 빠져들면 그만이니까. 느긋하고 짜릿하게! 그리고 일종의 '능청스러움'을 더해야 한다. 슈퍼맨이 두 세계를 사는 것처럼 나도 일상과 독서라는 두 세계를 산다.

 

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이것도 조바심인가). ‘책 읽는 동안에는 세상의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어릴 때에는 ‘그러면 여탕에 가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나도 성인이 됐다. 아예 상상 자체를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다. 오직 책을 읽을 때에만 시간이 멈추도록! 부디 다음 생에는 그런 세상에 태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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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읽었던 다산 산문집을 펼쳐 들었다. 밑줄이 쳐진 장들만 골라 다시 읽었다. 조만간에 여유당 답사를 갈 계획이라 마음의 준비를 해 둔 셈이다. 족히 열 번은 넘게 방문했을 여유당이지만 갈 때마다 감상(感想)이 조금씩 깊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가장 먼저 읽은 글은 유명한 <동림사 독서기>였다. 둘째 형님 약전과 함께 ‘만연사’라는 절에서 서책을 읽었던 일화를 기록한 짧은 글이다. 전라도 화순의 그 만연사(萬淵寺)이고 동림사는 절의 동쪽에 위치한 “중이 수도하는 집”이었다. 다산은 동림사에서의 일상부터 전한다.

 

“둘째 형님은 『상서』를 읽었고 나는 『맹자』를 읽었다. 이곳에 올 때는 첫 눈이 가루처럼 뿌리고 산골 물은 얼어붙을 하였다. 산의 나무와 대나무의 빛도 모두 새파랗게 추워서 움츠린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거닐면 정신이 맑아졌다. 자고 일어나면 곧 시냇가로 달려가서 양치질하고 얼굴을 씻는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여러 중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날이 저물어 별이 보이면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며 시를 읊조리고 밤이면 중이 게송을 읊고 불경을 외는 소리를 듣다가 다시 책을 읽는다. 이렇게 40일 동안 하고는 내가 형님에게 이르기를,”

 

단아한 일상이다. 시를 외는 즐거움과 자연을 관조하는 기쁨도 엿보인다. 실제로 <동림사 독서기> 바로 앞에는 <서석산에서 노닐었던 글>이 실렸다(서석산은 지금의 무등산이다). 형제는 풍류도 즐겼지만 무엇보다 독서에 매진했다. 40일 동안 책을 읽고서 다산은 형님께 무어라 했을까.

 

“중이 중 노릇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부모,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도 중 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 “그렇지. 그것이 중 노릇하는 까닭일 게다.”

 

십년 전의 나는 무엇에 감동하여 이 대목에 요란한 밑줄을 그었을까. 기록된 메모가 없으니 당시 소회는 알 길이 없다. 지금의 감상은 ‘공감’과 ‘결심’이란 단어로 표현하면 되겠다. 다산과 학문을 견줄 일은 다음 생에도 없겠지만, 글 읽는 즐거움만큼은 동류의식을 느낀다. 나도 읽을 때마다 기쁘다. 때때론 희열이다. 세상을 떠난 두 친구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독서는 그때의 쓸쓸함도 달랜다. 부인 없이 책과 함께 사는 에드워드 기번과 몽테뉴가 떠올라 나를 달래기도 한다. 혹자는 이런 모습을 처량하게 생각한다. 일부분 그렇지만 ‘읽는 기쁨’을 깊이 몰라서 하는 말이기도 하리라.

 

다산의 말처럼 지적인 희열은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노닐고 먹고 마시는 여타의 기쁨을 더하고 싶은 것이지 바꾸고 싶진 않다. <동림사 독서기>를 읽다가 자연스레 이런 다짐까지 하게 되는 연유다. ‘깊이 읽어야지. 나도 다산 선생님을 따라 『맹자』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지금의 내게 필요한 책들을 파고들어야지! (자신만의 소원과 의무가 있듯이 자신만의 필독서가 존재할 테니까.) 3월까지 조르바를 탈고하고선 희랍 고전을 읽어야지. 차분하고 그윽하게, 한 권씩 한 권씩 깊이.’ 생각이나 마음의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짐의 내용이 그야말로 나다운 모습이라 ‘다짐’이란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달리 표현하고 싶다. 이미 실현된 미래라고.

 

* 정약용, 민족문화추진회 편, 『다산문선』, 솔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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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종인 역, <신을 구하는 자> The Saviors of God

(카잔차키스 전집 『향연 외』에 수록)

 

1.

강력한 책이다.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비범하기에 그렇다. 감히 선언하자면, 향상심이 강하고 자기 성장을 위해 실제적인 고민과 노력을 해 온 이들에겐 위로와 자극 그리고 달려갈 푯대를 선사하리라. 부연 설명 없이 선언과 명제만 나열되어 있기에 모호하게 읽힐 대목이 많지만, 두어 번 읽어도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난해하진 않다. 내겐 곱씹어 새길 문장이 한 둘이 아니었다. 거듭하여 읽고 싶은 책이 됐다. 사실 두 번째로 읽는 중인데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대체 한 번은 읽을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2.

<신을 구하는 자>는 카잔차키스(1983~1957)가 1923년에 쓴 책이다. 작가 자신을 위한 책이다. 마흔이 된 카잔차키스는 인생철학을 정리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구상했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신을 구하는 자>를 탈고한 직후부터 『오디세이아』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예술로 형상화할 계획을 세웠고 <신을 구하는 자>를 쓰면서 다듬은 생각들을 『돌의 정원』이라는 소설에 흩뿌려 놓았다. (에세이를 통해 생각을 정돈하여 전하고, 소설이라는 예술로 형상화했다는 점은 카뮈의 작업 방식과 닮았다. 누가 선취했는지는 모르지만.)

 

3.

철학적 에세이와 소설로의 예술화를 병행한 방식이 의미하는 바는 최소한 두 가지다. 첫째 톨스토이나 발자크처럼, 카잔차키스는 유미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오직 예술(唯美)’만을 외치지 않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소설가였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거나 사회를 관찰했으며 개인의 자기실현을 돕기 위해 소설이라는 예술을 탐구했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은 유미주의라는 구분이 무의미하다. 작품 자체가 매우 아름다우니까! 다시 말해 놀랍도록 예술적이면서도 유미주의 너머의 가치(종교, 시대, 삶과 인류)를 담고 있으니까.)

 

둘째, <신을 구하는 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해를 돕는 중요한 텍스트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여 둔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렇다. 카잔차키스도 두 권의 저서를 특별하게 여겼다. 카잔차키스 전문가인 ‘키먼 프라이어’는 이렇게 썼다. “<신을 구하는 자>와 <오디세이아>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지목하면서 후세 사람들이 이 두 작품으로 자신을 기억해 주기 바랐다.” (키먼 프라이어! <신을 구하는 자> 영역본 번역자다. 한국어판에도 30쪽에 달하는 그의 작품 해설이 실렸는데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요긴한 텍스트다.)

 

4.

『신을 구하는 자』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철학서에 가깝다. 칸트처럼 논리와 체계를 세우는 철학서나 플라톤처럼 대화를 통해 하나의 개념을 탐구하는 철학서는 아니다. 니체처럼 아포리즘으로 구성한 철학적인 선언이다. 이 책에서 유익을 얻으려면 달콤한 사탕을 즐기듯이 문장들을 음미하면 될 것이다. 사탕은 딱딱하다. 입에 넣은 순간엔 맛도 느껴지지 않지만 혀로 굴리며 조금 빨고 나면 달콤해진다. 깊은 사유를 담은 딱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물고 빨면 달달해진다. 다른 점도 있겠다. 사탕을 오래 빨면 혀가 얼얼해지지만, 일급의 사유들을 오래 음미하면 그윽해진다.

 

5.

<신을 구하는 자>는 프롤로그, 준비, 행진, 환상, 행동, 침묵 이렇게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내가 이해한 대로 저자의 전체 메시지를 표현하면 이렇다. “너 안의 향상심을 발견하고 더욱 키워라. 전사처럼 스스로와 투쟁하여 극기하라.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깨달아 행동으로 실현하라. 정신적인 성장도 놓치지 마라. 자기실현의 완성은 침묵이다. 내가 말하는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다.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최고의 경지를 뜻함이다. 투쟁도 소리칠 필요도 없는 경지!”

 

6.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카잔차키스는 ‘준비’ 장에서 인간의 세 가지 임무를 선언한다. 첫 번째 임무는 운명애(amor fait)다! “쓸데없이 저항하지 않고 마음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 여러 가지 제한을 인정하고 아무 불평 없이 일하는 것 - 이것이 인간의 첫 번째 의무이다. 불안정한 심연 위에다 원만하면서도 환한 마음의 지역을 구축하라. 아주 씩씩하면서도 근면한 자세로 그런 지역을 구축한 다음, 그 지역의 군주처럼 우주를 도리깨질하고 키질하라.”

 

두 번째 임무는 “고뇌 속에서 피를 흘리고 그 고뇌를 심오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중에 오고 또 가장 커다란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 이것이 세 번째 임무다.” 삶의 부조리와 허무 그리고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나아가라는 선언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지만 그래도 용감하게 당신의 뱃머리를 그 심연 쪽으로 돌려놓으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당신의 의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7.

‘행진’은 네 단계로 이뤄진다. 에고, 종족, 인류 그리고 대지다. 우리의 의식을 에고에서 벗어나 인류와 대지까지 확장시켜 주는 장이다. ‘환상’ 장에서는 향상심을 추종하되 홀로 투쟁하지 말고 동료들과 연대하고 역사적 위인들과 연대하길 권한다.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그리고 대지의 힘을 얻으라고 권한다.

 

이 모든 선언과 투쟁은 결국 행동하기 위함이리라. “이론의 가장 거룩하고도 궁극적인 형태는 행동이다.” “행동은 구원으로 가는 가장 넓은 문이다.” 여기에서 카잔차키스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한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 중 하나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이고 때론 보통명사다. “우리는 신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었다. 심연, 신비, 신비, 절대 암흑, 절대 광명, 물질, 정신, 절대 희망, 절대 절망, 침묵.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불렀다. 이 이름만이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우리의 가슴을 심오하게 울리는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8.

마지막 단계인 ‘침묵’은 정신적 수련의 최후 단계다. 다다르기 힘든 이상적인 단계. “침묵은 이런 뜻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완수한 끝에 마침내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노력의 최고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투쟁할 필요도 소리칠 필요도 없다. 그는 정적 속에서 완벽하게 원숙해졌다. 그는 더 이상 파괴당하지 않는 자, 온 우주와 영원히 함께 있는 자다.” 침묵은 극단의 경지다. “여자의 자궁 속에 안착한 남자의 씨앗”이 느낄법한 편안함! 최선과 최고가 머무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평온(serenity)이랄까. 침묵의 경지는 고정점이 아니다. “그 정상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심연의 위에 매달린 채 자랑스럽고 마법적인 주문을 노래 부르는 것이다.”

 

9.

인상 깊었던 대목 하나를 적어 둔다.

 

“나는 물질을 제압하여 그것을 내 마음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되도록 한다. 나는 식물, 동물, 인간, 신들을 마치 나의 자식인양 좋아한다. 나는 마치 온 우주가 내 몸인 양 내 주위에 깃들도 또 나를 따라 오는 것처럼 느낀다.” (p.189)

 

작품의 초반부에 나오는 대목인데 처음 읽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다시 읽다보니 의미심장했다. 후반부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용이 서로 연결되는 모양새인데 이를 보면 작가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책이 아님을 느끼시리라. (카잔차키스라는 작가의 성실함을 모르지 않지만, 이런 책들은 마치 현대미술을 대하는 기분을 들게 하지 않던가. ‘이거 정말 대단한 작품인 거야?’)

 

“너는 전투를 거듭하며 전쟁에 출정한 병사의 모든 의무를 수행했다. 너는 너의 몸이라는 작은 천막에서 싸웠다. 그러나 보라, 그 싸움터는 너무 비좁았다. 너는 숨이 막혔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뛰쳐나갔다. 너는 네 종족 위에 천막을 세웠고 너만의 손과 심장이 아니라 종족의 손과 심장이 가세했다. 너는 죽은 조상들을 되살려 피를 보충했고, 그런 다음에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자 모두와 함께 전쟁터로 출발했다. 갑자기 모든 종족이 너와 함께 움직였다. 인간의 성스러운 군대가 너의 배후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대지 전체가 군의 진지처럼 진동했다. 너는 까마득한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두뇌 속 전투 계획은 계속 가지를 쳐나갔다. 대치하던 모든 원정대는 네 가슴의 은밀한 진지로 합류했다. 너의 배후에 있는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군대가 싸우는 전선에 보급품을 보내기 위한 보급 부대로 조직되었다. 이제 온 대지가 너에게 매달려, 살의 살이 되고, 저 혼돈으로부터 소리 지른다.” (p.221)

  

10.

인용문에 대한 개인적 감상과 전체 소감을 덧붙임으로 글을 맺는다.

 

1) 먼저 유대 또는 연결에 대하여. 우주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에게만 함몰되면 세상을 잃을 것이다.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면 그와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리라. 카잔차키스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로부터 배우는 자들이야말로 위대함에 이르지 않던가. 니체가 떠오른다.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해 주는 가장 강력한 표지다. 내가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카이사르가 내 아버지일 수도 있으리라.”(<이 사람을 보라>)

 

2) 비유는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유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되 비유의 언저리를 확대 해석하면 오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우월함이 아니라(전투, 제압, 보급 등의 단어 때문에 하는 말이다) 타자와 자연과의 연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가 인생을 하나의 거대한 투쟁이라고 보긴 했지만 인간 우월주의를 강조하진 않았다. <신을 구하는 자>에서 이리 말하기도 했다. “대지의 목적은 생명이 아니다. 또 인간도 아니다.”

 

3) 이 책은 향상심을 가진 이들을 위한 책이다. 상승은 힘들다. 지금 일어서서 점프를 해 보라. 점프를 위를 향한 욕망의 발현이라고 해 두자. 이 욕망은 이내 좌절된다. 중력의 힘에 끌려 이내 땅으로 내려올 테니까. 나에게 점프는 한 인간의 성장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성장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과제가 자기를 넘어서는 일, 다시 말해 극기다. 타자와 연대하고 자연이 주는 에너지를 흡수할 줄 아는 이들이 ‘극기’라는 장기전에서 더 자주 승리하리라.

 

4) ‘낮은 여기’에서 ‘높은 저기’로 오르는 이들에게는 사다리가 필요하다. 의식의 사다리, 인식의 사다리, 열정의 사다리, 실천의 사다리, 의지의 사다리…! 어떤 책은 하나의 사다리다. 누군가의 영혼을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사다리! 카잔차키스의 <신을 구하는 자>도 그런 책이다. 그렇다면 향상심을 가진 이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가. 세상살이에 ‘반드시’가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생과 사 둘 뿐이리라. 하나를 더하자면 사랑의 실천을 끼워 넣고 싶다.) 인간은 책이 없어도 자기를 향상시킬 줄 아는 존재다. 니체는 말했다. “올라갈 사다리가 더 이상 없다면 너는 네 자신의 머리를 딛고 올라갈 줄 알아야 한다.”

 

5) 사다리 비유를 사유하고 실천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향상심은 자기를 향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 내면, 실력을 높여야지 높이만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명성을 향하는 마음이 앞설 수는 있지만, 평생 명성만을 쫓으면 거짓되거나 위험해진다. 세상엔 높이에 비틀거리며 고산병을 치르는 이들이 많다. 높이에 취하여 명성이 곧 자기 존재라고 착각하거나 위선이 탄로나 갑자기 추락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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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아한 선동이 더 강렬하다

앙투안 콩파뇽 『인생의 맛』 Antoine Compagnon, Un Ete Avec Montaigue

 

1.

이리도 품격 있는 선동이라니! 몽테뉴의 삶과 사상을 40개의 에세이로 풀어낸 책 『인생의 맛』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목표’가 독자들을 몽테뉴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썼다. 1592년에 사망한 몽테뉴는 에세이의 원형인 『수상록』을 남겼다. (인문주의와 개인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상록』을 펼치고 싶었던 순간이 도대체 몇 번일까! 마흔 번에 가까웠으리라. 모든 글을 읽을 때마다 몽테뉴가 궁금해진 셈이다. (수년 전 ‘몽테뉴 스터디’도 했기에 전혀 모르진 않지만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에 『인생의 맛』을 지인에게 추천했는데, 그는『수상록』의 추천 번역본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몽테뉴를 읽고 싶다는 것이다. 『인생의 맛』을 읽은 두 명의 마음이 움직인 셈이다. 이발이중이다. (모수는 적지만) 앙투안 콩파뇽은 독자를 단박에 몽테뉴로 이끈 탁월한 선동가였다. 과장된 동작이나 호기로운 목소리는 없었다. 논리와 통찰 그리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몽테뉴 이야기를 풀어갔을 뿐이었다. ‘선동이 이리도 우아할 수 있구나!’

 

2.

책은 가볍고 작다. 200쪽도 안 된다. 5분이면 읽을 분량의 짧은 글을 40편 묶었다. 편안하게 읽고 몽테뉴가 던지는 화두를 생각하기에 좋다. 1300쪽에 달하는 『수상록』(완역본) 읽기에 비하면 부담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몽테뉴의 저력을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이다. 몽테뉴에 깊은 이해를 가진 저자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저자에게 반했는데, 그의 사려 깊음이 단 한 페이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몇 줄짜리 문단을 40여 군데 골라내어 간략하게 해설함으로 그 역사적 깊이와 여전한 현재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 페이지나 손에 걸리는 대로 선택할 것인가? 우연에 운명을 맡기면서? 아니면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을 빠르게 훑어야 하나? 이 작품이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혹은 일관성이나 완성도를 포기한 채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두서없이 다루는 데 만족해야 할까? 나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했다. 일정한 틀 없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저자가 책을 쓴 방식은 바로 몽테뉴가 글을 썼던 방식이었다. 저자는 『수상록』에 정통했기에 자유롭게 쓰면서도 몽테뉴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몽테뉴를 작은 그릇에 우겨 넣지 않았고 해석과 통찰이 편협하지 않았다. 때때로 라틴어 지식을 동원하여 몽테뉴의 생각을 풀어냈고(‘저울’, ‘성실성’ 등의 글) 몽테뉴 사상의 의의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신세계를 전염시켜 쇠퇴와 몰락을 앞당기는 것은 아닌지” 라고 염려하는 몽테뉴의 글을 두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신세계’라는 글이다).

 

“신세계를 사로잡은 것은 구시대의 정신적 우월함이 아니라 그들을 무릎꿇린 야만적인 완력이었다. 당시 몽테뉴는 멕시코의 찬란한 문명을 야만적으로 파괴한 스페인의 초기 식민지 개척사를 읽고 난 직후였다. 그는 식민주의를 처음으로 비판한 이들 중 하나다.”

 

(개인적으론 하워드 진이 떠오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깃든 야만성을 폭로한 그였다. 20대 중반에 그의 『미국 민중사』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읽으며 가슴이 뜨거웠던 날들! 2016년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개정판이 출간되고 2017년에는 하워드 진 입문서(『만만한 하워드 진』)가 출간될 정도니 아직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함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그는 2010년에 타계했다.)

 

3.

책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먼저 몽테뉴의 말을, 곧이어 저자의 말까지.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시대나 해 단위가 아니라, 매일 매분을 그린다. 내 이야기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금방이라도 내 처지뿐 아니라 생각까지 변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양하고 유동적인 사건들과 갈팡질팡하고 때에 따라서는 상반된 생각들의 기록이다. 나는 또 다른 나 자신일수도 있고, 그때그때 상황과 판단에 따라 주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 『수상록』 제3권 2장

 

“요컨대 인간 조건에 따라 해석하고 그 고난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몽테뉴의 시계(視界)는 변화에 있지 존재에 있지 않다. 바로 다음 순간, 세상도 나도 변할 것이다. 자신이 한 경험과 생각들을 기록한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다만 세상 만물이 얼마나 쉼 없이 변하는지를 기술했을 뿐이다. 그는 상대주의자다. 나아가 그의 이 같은 ‘일면’(필자 강조)을 원근법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몽테뉴는 말한다. 세상에 대한 나의 시각은 시시각각 변하고, 나의 정체성은 불안정하다. 그는 ‘귀착점’(저자 강조)을 찾지 못했지만 그것을 찾기 위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 앙투안 콩파뇽

 

책은 이런 식의 구성이다. 몽테뉴와 후대의 학자가 생각을 주고받는 형식 말이다. 이런 책의 가치는 편집 가공하는 쪽(저자)의 깊이에 달렸을 수밖에 없다. 몽테뉴는 후배의 편집에 반대나 찬성할 수가 없기에 그렇다. 나는 이 책에 만족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편집 해석한 『조르바의 인생 수업』에 큰 불만을 느꼈던 점에 비하면 정말이지 만족이다.)

 

혹시 위 구절에 감동하지 못했다면 나의 개인적 취향으로 고른 구절이기 때문이리라. 상대주의자 몽테뉴는 그의 ‘일면’일 뿐이다. 다른 글에서는 몽테뉴의 또 다른 일면들이 소개된다. 회의주의자 몽테뉴, 성실한 몽테뉴, 르네상스인 몽테뉴, 서재인 몽테뉴 등. 니체도 극찬한 이 르네상스의 거장은 매우 진솔하게 자신을 관찰하여 기록했고, 우리 모두는 그의 일면을 통해 자신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몽테뉴 읽기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할 거라는 말이다. (‘거의’라는 말의 무책임성은 참 편리하다.)

 

위 본문과 관련되긴 하지만 조금은 엉뚱한 얘기를 해야겠다. 최근 『역사의 천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 벤야민의 생애 마지막을 추적한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페이지의 여백에 ‘갈팡질팡’이라고 적어야 했다. 벤야민은 종종 우왕좌왕했다. 미국 망명을 두고 고민할 때에도 오늘의 행선지를 결정할 때에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갈팡질팡’이란 워딩으로 기록한 것이다. 몽테뉴의 표현이 반가웠던 이유다. (갈팡질팡이라 해석한 프랑스어 원문이 궁금해진다.)

 

갈팡질팡의 근원은 우유부단함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다. 지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눈앞에 마주한 사람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이 마을에서는 진리가 저 마을에서는 오류가 되고, 당시의 진리가 지금에선 거짓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푸코는 “나는 달력과 지도가 없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하는 지혜란, 이렇게 장소, 상황, 사람을 고려한 종합적이고 시의적인 판단을 뜻한다. 그렇기에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은 상대주의자가 된다. ‘지혜’라는 지적이고 감수성 짙은 고지에 이르기 위해 감지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상대주의자!

 

누군가에겐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실상 그것은 지혜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일상의 사소한 결정에서 우유부단할 확률도 높지만 그들은 점점 용기와 행동력까지 겸비하면서 우유부단함으로부터 달아날 것이다. 그런데 우유부단과 지혜는 어떻게 구분할까? (사례 없이 명제로만 언급하자면) ‘순간’은 그들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일상’은 그들의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4.

『인생의 맛』에서 가장 감동했던 글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p.179~182). 나는 자주 내 삶을 성찰한다. 생각과 성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종종 이런 고민이 든다. ‘성찰의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삶을 위해 성찰을 줄여야 할까?’ 몽테뉴의 글은 이런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추동했다. 성찰을 깊이, 제대로 하라고! 내 삶의 허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찰의 과다함이 아니라 성찰의 질적 수준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삶을 추동하는 두 바퀴인 성찰과 실천의 균형을 이루지 못함이 문제이지 깊은 성찰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아래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 몽테뉴의 두 구절이다.

 

“내 책을 아무도 읽지 않게 된다면, 내가 그토록 유익하고 즐거운 사색으로 그 많은 시간을 한가로이 보낸 것이 과연 낭비가 되는 것일까? 나라는 거푸집에 이 형상을 찍어내는 동안 나는 자신을 추출해내기 위해 수시로 다듬고 땜질해야 했으며, 그러는 사이 주인(몽테뉴 자신)도 단단해지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졌다. 타인을 위해 그리다가 내 본연의 보다 선명한 색으로 내면을 칠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작가와 한 몸인 책. 고유의 일과. 내 삶의 일부. 이 책은 다른 책들처럼 외부적인 목적과 여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 제2권 18장

 

“내가 그토록 지속적으로 호기심에 이끌려 나에 대한 보고서를 써 온 것이 시간 낭비였을까? 고작 몇 시간 동안 생각만으로 혹은 몇 마디 말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들은, 긴 세월 동안 성심과 전력을 다해 그것을 꾸준히 연구하고 작품으로 만들고 직업으로 삼은 자처럼 깊이 있게 자신을 탐구하지도, 자기 안으로 스며들지도 못한다.” - 몽테뉴

 

5.

책의 원제는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 Un Ete Avec Montaigue’이다. 2012년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 저자가 출연하여 몽테뉴와 그의 『수상록』에 대해 5분 남짓 동안 나눈 이야기가 책이 되었다. 이 방송에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 덕분에 2013년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이후 보들레르, 위고, 마키아벨리, 호메로스까지 진행되었으니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의 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한다. 저자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수업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끝으로 저자를 잠깐 소개해야겠다. 앙투안 콩파뇽!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몽테뉴와 마르셀 프루스트 전문가다. 2013년도 진행된 ‘프로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저명한 프루스트 전문가 여덟 명이 참여했는데 앙투안 콩파뇽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국내 번역된 책은 『인생의 맛』,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공저)과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이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감상으로 서평을 맺는다. 나에게 앙투안 콩파뇽이란 학자는 ‘우아한 선동’도 강렬하고 달콤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저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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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연속으로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지난주 감행했던 책 주문으로 고삐가 풀린 것이다. 어제는 뇌과학 책 3권이었다. 박문호 선생의 신간 『뇌과학 공부』와 해외 연구자들의 책 두 권이다. 스탠퍼드대 신경과학과 부교수인 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연구하고 있다는 스타니슬라스 데하네의 『뇌의식의 탄생』! 후자의 책은 에릭 캔델의 추천사 덕분에 결정한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의식 관련서 중 최상이다.”

 

오늘은 빈센트 반 고흐의 책 3권과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를 예찬한 책을 주문했다.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보고서 빈센트에 더 알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는 힘들었다. 서점을 둘러보니 18년 전에 읽었던 <반 고흐 영혼의 편지>가 스페셜 에디션과 새로운 판본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새로운 에디션으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을 어렵게 눌렀다. 오베르에서의 빈센트를 담은 책과 프랑스 소설가 페레데릭 파작의 평전 등을 선택했다.

 

교보문고 앱을 열었더니 주문한 책들의 여정이 보였다. 4권이 배송 중이고 4권은 출고 작업 중이란다. 나의 현재 공부 여정은 어떤가? 지금은 글을 쓰고 있고 직전에는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얼마간 읽었다(출간되던 해에 거의 읽었는데 읽지 않았던 부분을 찾아 읽는 중이다). 어제는 뇌과학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좀 더 긴 호흡으로 보자면 몇 개월 째 『그리스인 조르바』를 반복하여 읽는 중이다. 재해가 없는 한 내일도 이 책들을 읽을 것이다.

 

연간 호흡으로 따지면 2017년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중심으로 독서가 이뤄진 해였다. 더 파고들지 못해 아쉽다. 내년 2월까지는 이종인 선생의 국역본과 칼 와일드먼의 영역본을 완독할 계획이다. 그때까진 희랍어에서 국역한 유재원 교수님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출간되려나? (문학과지성사에선 올해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올해 초에 밝힌 바 있다.) 2018년 공부의 핵심 여정은 ‘로컬’과 ‘수잔 손택’으로 정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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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김진호, 갈무리, 2017)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들이다. 살면서 네안데르탈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그렇다. 책은 작곡가들도 작곡가이기 이전에 호모 사피엔스임을 알린다. (모차르트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들으며 위로받고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 일은 음악의 주된 기능이다. 음악의 저력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책은 그 음악을 창조한 작곡가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음악으로 사유하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요컨대, 음악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음악 청취에서 ‘작곡가의 마음’을 생각함으로써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자가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이다. (여러 분야의 이론으로 음악을 매만지는 지적 향연은 별미다.) 저자는 걸출한 음악 이론가이자 작곡가이면서도 음악을 삶의 풍요로움을 돕는 도구로 대한다. 삶을 음악보다 우위에 둔다. 이 당연한 처사를 외면하는 이론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점을 감안하면 다음 두 구절은 신선한 공기처럼 반갑다. (미세먼지는 오늘도 창궐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음악을 감상하며 음악을 삶과 연결하는데 음악학자들은 음악을 삶과 분리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도 학문적 엄밀성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간의 음악학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다.”(p.46)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는가? 적극적인 호모 무지쿠스가 될 생각은 없는가? 사냥꾼이었던 당신의 조상은 작곡을 했을 것이다. 당신도 작곡할 수 있다. 악보에다가 음표를 적어야만 작곡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켜고 가사도 없이 흥얼거리면 된다.”(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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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

『미국의 반지성주의』(리처드 호프스태터/ 유강은 역, 교유서가, 2017)

  


1.

반지성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정치권, 리더십, 일상사 곳곳에 반지성주의가 있다. 조금만 깊어지면 “아, 어려워” 하고 사유를 기피하는 태도 역시 반지성주의의 모습 중 하나다. 일상에서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다. 머리 쓰기를 싫어함, 편안함이나 안일함만을 추구하는 모습 등이 반지성주의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다 건너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멀게 느껴지더라도 일상에서의 반지성주의는 고민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2.

누구나 지성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두가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는 것도 문제다. 결국에는 지성의 힘과 한계를 모두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겠다. 지성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3.

지성을 어떻게 구분할까. 사실 지성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구분이 쉽지 않다. 시민의식이 부족한 이들에겐 어떤 선택이 더 공동체를 위한 길인지를 헷갈리는 법이다. 패션의식(감각)이 없는 이들이 더 나은 패션이 무엇인지 혼동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주 지성적 사유보다 독단적이고 편협한 반지성적 주장에 열광한다.

 

지성 구분의 원칙을 수립하긴 어려워도 지성을 구분하는 세 가지 팁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1) 인과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처사는 지성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단선적이지 않다.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지성은 인과관계의 실타래를 풀어가지만, 반지성은 아예 복잡하다는 이유로 실을 잘라버린다. 어떠한 명쾌함은 지성이 아니라 무사유다. (이 점에서 지성의 구분이 어려워진다. 앞서 지성에 대한 의식을 운운한 이유다.)

 

2) 난해함이 모두 지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성은 때때로 단순함이다. 최근에는 심상정 후보가 지성이 펼쳐내는 희열, 다시 말해 단순함이 주는 통쾌함을 보여주었다.

 

3) 지성은 종종 깊이와 복합적 사유로 나타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에서 ‘주의 깊은 독해’를 옹호하고, 인문학적 사유는 종종 긴 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긴 글은 두 가지로 나눠지겠다. 지성이거나 장황함이거나.

 

4.

어떤 이는 박식을, 다른 이는 통찰을, 또 다른 이는 지혜를 지성이라 한다. 박식을 지성이라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사유 없는 정보 폭식은 오히려 반지성주의의 한 유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성주의를 넓게, 다소 이상적으로 정의한다면) 호기심과 이성의 한계를 이해하여 호기심의 전횡과 이성의 독단을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을 지성에 포함해야 한다.

 

5.

(저자의 견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지성은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힘이다. 통찰에 가깝고 지혜까지는 아니다. 지혜는 그야말로 온갖 미덕이 총동원되어 발현되는 종합적 판단이니까. 나는 지혜를 지성, 감성, 의지의 결합으로 본다. 그래서 지혜는 가끔씩 출몰할 뿐이고, 간헐적인 출몰이지만 영향력이 짙고 크다. 지성, 감수성, 이타심, 이기심, 법과 도덕(현실세계에 대한 이해) 등 많은 것을 알수록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6.

지성주의가 왜 필요한가? 인생과 세상사에는 통합적이고 깊이 있는 지성적 사유를 요구하는 사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종종 야만과 타락을 막기 때문이다. 지성(주의)는 개인의 삶에도 필요하다. 지성이 불안을 걷어가기도 하고, 삶의 문제도 해결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깊이 소통할 줄 아는 공감이 필요한 만큼이나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지성도 필요하다.

 

7.

서언이 길었다. 나는 왜 이 책이 읽고 싶은가. 최소한 네 가지의 이유가 떠올랐다.

 

1) 주지주의와 주정주의의 변증법적 통합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반지성주의를 다룬 고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에 대한 오해와 불합리한 거부이기도 하고, ‘지성인들의 (야만적인) 행태’에 대한 반감이기도 하다. 그 무엇이든 극복해야 할 태도다. 모든 지성인들이 야만적이지 않고, 감수성도 지성만큼이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2) 역자가 주는 신뢰도 크다. 유강은이 누구던가. 유럽 좌파의 역사를 담은 책 『The Left』,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 등 명저들을 번역한 뚝심, 실력, 관점을 지닌 번역가다. 올해 초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다시 출간해 반가웠다.

 

3) 내가 좋아하는 학자들도 반지성주의에 말을 보탠 바 있다.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를 써 왔던 우치다 타츠루의 『반지성주의를 말하다』가 떠오른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1972년에 『생각하는 그리스도인(Your Mind Matters)』로 반지성주의를 비판했다. (스무 살 때, 존 스토트의 “기독교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은 나를 깊이 위로했다.)

 

4) 책은 1964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인데, 50년 만에 번역된 이유가 궁금해서라도 읽고 싶어진다. 그나저나 680쪽의 분량은 전혀 저항감이 없는데, 35,000원이라는 책값은 적잖이 부담된다. 이것도 반지성주의인가?(^^) 반지성주의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개념과 범위를 알기 위해서라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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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