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관점을 얻으려면 산을 오르자. 산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산 아래에서의 신선한 공기인가. 산에 올라서 획득할 높은 관점인가. 조금 오르다 말고 자리를 펴고 먹고 마시는 이들에게도 고유한 재미와 목적 그리고 들려 줄 스토리가 있다. 정상에 등정하여 산맥을 살펴보려는 이들에게도 그들의 기쁨과 의미 그리고 들려 줄 스토리가 있다. 당신은 무엇에 끌리는가.


이는 교제 VS 고독과 같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어느 길에나 벗과 동행이 존재하니까. 오를수록 동행이 줄어들지만 최정상이 아니라면 벗이 있기 마련이다. 돗자리에도 산행길에도 고유한 의미와 기쁨이 존재한다. 자신의 길을 선택하면 되리라. 꿈꾸는 자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여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여기를 떠나 길을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벗이 기다릴 여정을.


타성과 유혹을 넘어서야 하리라. 오르려면 돗자리를 떠나야 하고, 즐기려면 산행을 멈춰야 한다. 높이 올라 통찰을 얻고 싶다면,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자. 오르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등정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자. 오르면 멀리 보인다. 새로운 관점을 얻는다. 여러 산에 갔더라도 잠깐 오르다가 포기한 경험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것들을 추구하자.


<실천을 위한 끼적임>

:

인문정신이라는 지적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며


- 개인적 인문정신부터 탐구할 것 : 공감, 자유, 용기

- 소크라테스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연구할 것

- 언어 감각을 갈고 닦을 것 : 한국어, 영어

- 동서양 역사의 기초 지식을 탄탄하게!

- 나만의 문학 고전 집필을 이어갈 것

- <인문주의를 권함> 집필에 매진할 것

- 희랍 고전들을 꾸준히 읽어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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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 책에 대해.'


『인간성 수업』이 안긴 생각이다. 올해 들어 두 번째다. 연초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다가 감탄과 전율을 수십 번이나 느꼈다. 책을 읽다가 이런 생각도 했다. '공부 인연들과 함께 강독회를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네. 아... 루크레티우스!


『인간성 수업』은 루크레티우스 읽기에서 한 가지가 더 가미된 독서 여정이다. 감탄, 전율 뿐만 아니라 '울음'마저 안긴 것! (지적 희열은 나를 춤추게 하지만 지적 위로는 타자를 향한 깊은 공감 만큼이나 울컥하게 만든다. 마사 누스바움은 내게 지적 희열과 지적 위로를 모두 선사한다.)


나를 위로하고 지지하고

나아갈 길을 넌지시 보여주는

책을 만나다니! 독서가의 지복이다.

 

2.

책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생각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한층 더 이해하고 싶은 책, 읽은 내용을 일상적 실천으로 이어가고 싶은 책, 그리하여 나와 우리가 사는 세계에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을 안기는 책! 작년에는 시어도어 젤딘이, 올해는 마사 누스바움이 젊은 후학을 한없이 격려한다.


3.

오늘 아침 1시간을 할애해 두고서 『인간성 수업』을 펼쳤다. 12페이지 즈음 되는 한 절을 읽겠다는 계획이었다. 3페이지 정도 읽고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보다는 책에서 얻은 희열과 비전이 보였다.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로는 충분했지만(그래서 책을 덮었겠지만) 이 책은 수양뿐만 아니라 지성을 위한 책이기도 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펄떡이는 가슴을 달래가며 40분 동안 12페이지를 읽었다.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 (아래 구절이 안긴 축복이다. 반엘리트적, 반텍스트적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소크라테스!) 책을 덮고 나서도 독서는 이어졌다. 생각에 잠겼고 실천 의지를 다졌으니까.


"역사 속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자기 성찰에 나서도록 일깨우는 일에 헌신한다. 그는 자신이 만나는 시민들의 믿음 외에는 아무런 지식 자료에 의존하지 않으며, 무비판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민주주의가 이용 가능한 최선의 정부 형태라고 본다." (p.54)


기억과 희망을 위해, 최근에 지적 희열과 지적 위로를 안긴 책을 정리해 둔다. (희열은 루크레티우스, 위로는 젤딘과 누스바움이다.)


- 루크레티우스, 강대진 역,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아카넷, 2012

- 마사 누스바움, 정영목 역, 『인간성 수업』, 문학동네, 2018

- 시어도어 젤딘, 문희경 역, 『인생의 발견』, 어크로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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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들이 차고 넘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내가 사는 공간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는데 어찌 외면할까! (르 클레이조 『빛나 : 서울 하늘 아래』) 



카프카를 찬미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를 두고 ‘나의 카프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번역서 제목이긴 하지만.) 그냥 친구도 아니다. 막스 브로트다. 카프카 애호가로선 당연하고 마땅한 필독서다. 책의 내용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카프카를 이해하는 길이 될 중요한 텍스트! 『나의 카프카』는 브로트가 카프카에 관해 쓴 중요한 텍스트 세 개를 합권한 책이다. (막스 브로트 『나의 카프카』)


 

동업자들의 작업 현장은 어떨까? 작업 비밀이라도 캐내겠다는 야심은 아니다. 위로(지난한 일상은 매한가지일 테니), 휴식(책상과 서재가 있는 사진을 보면 나는 쉼을 누린다), 약간의 학습(슬쩍 엿보는 것만으로도 때론 배움을 얻으니까)이면 충분하겠다. ‘또 모르지. 영감이나 도약의 실마리를 얻을 지도.’ 사진과 함께 작가들의 목소리도 글로 담아냈다고 하니 드는 욕심이다. 동업자라고 하기엔 멋쩍은 일급 작가들의 작업실을 담은 책이니까. (질 크레멘츠 『작가의 책상』)


 


세월의 흐름을 억지로 거스려는 억지 노력(과도한 시술)도 꼴불견이지만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무관심한 일도 아쉽다. 명저도 때로는 자극적인 제목을 욕망한다. '늙지 않는 비결'이라니!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계속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텔로미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하고 텔로미어와 계속 접촉해야 한다. 그 방법은 보여 주는 이 책은 지난 10년간 나온 생물학 책 중에 가장 놀랍다." 에릭 캔델의 추천사다.  



이런 마음은 100개도 넘는다. 조바심은 없다. 열심히 살다가 여가 시간이 생기면 감사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서, 내게 주어진 잠깐의 시간 동안 책 속으로 빠져들면 그만이니까. 느긋하고 짜릿하게! 그리고 일종의 '능청스러움'을 더해야 한다. 슈퍼맨이 두 세계를 사는 것처럼 나도 일상과 독서라는 두 세계를 산다.

 

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이것도 조바심인가). ‘책 읽는 동안에는 세상의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어릴 때에는 ‘그러면 여탕에 가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나도 성인이 됐다. 아예 상상 자체를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다. 오직 책을 읽을 때에만 시간이 멈추도록! 부디 다음 생에는 그런 세상에 태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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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읽었던 다산 산문집을 펼쳐 들었다. 밑줄이 쳐진 장들만 골라 다시 읽었다. 조만간에 여유당 답사를 갈 계획이라 마음의 준비를 해 둔 셈이다. 족히 열 번은 넘게 방문했을 여유당이지만 갈 때마다 감상(感想)이 조금씩 깊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가장 먼저 읽은 글은 유명한 <동림사 독서기>였다. 둘째 형님 약전과 함께 ‘만연사’라는 절에서 서책을 읽었던 일화를 기록한 짧은 글이다. 전라도 화순의 그 만연사(萬淵寺)이고 동림사는 절의 동쪽에 위치한 “중이 수도하는 집”이었다. 다산은 동림사에서의 일상부터 전한다.

 

“둘째 형님은 『상서』를 읽었고 나는 『맹자』를 읽었다. 이곳에 올 때는 첫 눈이 가루처럼 뿌리고 산골 물은 얼어붙을 하였다. 산의 나무와 대나무의 빛도 모두 새파랗게 추워서 움츠린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거닐면 정신이 맑아졌다. 자고 일어나면 곧 시냇가로 달려가서 양치질하고 얼굴을 씻는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여러 중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날이 저물어 별이 보이면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며 시를 읊조리고 밤이면 중이 게송을 읊고 불경을 외는 소리를 듣다가 다시 책을 읽는다. 이렇게 40일 동안 하고는 내가 형님에게 이르기를,”

 

단아한 일상이다. 시를 외는 즐거움과 자연을 관조하는 기쁨도 엿보인다. 실제로 <동림사 독서기> 바로 앞에는 <서석산에서 노닐었던 글>이 실렸다(서석산은 지금의 무등산이다). 형제는 풍류도 즐겼지만 무엇보다 독서에 매진했다. 40일 동안 책을 읽고서 다산은 형님께 무어라 했을까.

 

“중이 중 노릇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부모,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도 중 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 “그렇지. 그것이 중 노릇하는 까닭일 게다.”

 

십년 전의 나는 무엇에 감동하여 이 대목에 요란한 밑줄을 그었을까. 기록된 메모가 없으니 당시 소회는 알 길이 없다. 지금의 감상은 ‘공감’과 ‘결심’이란 단어로 표현하면 되겠다. 다산과 학문을 견줄 일은 다음 생에도 없겠지만, 글 읽는 즐거움만큼은 동류의식을 느낀다. 나도 읽을 때마다 기쁘다. 때때론 희열이다. 세상을 떠난 두 친구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독서는 그때의 쓸쓸함도 달랜다. 부인 없이 책과 함께 사는 에드워드 기번과 몽테뉴가 떠올라 나를 달래기도 한다. 혹자는 이런 모습을 처량하게 생각한다. 일부분 그렇지만 ‘읽는 기쁨’을 깊이 몰라서 하는 말이기도 하리라.

 

다산의 말처럼 지적인 희열은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노닐고 먹고 마시는 여타의 기쁨을 더하고 싶은 것이지 바꾸고 싶진 않다. <동림사 독서기>를 읽다가 자연스레 이런 다짐까지 하게 되는 연유다. ‘깊이 읽어야지. 나도 다산 선생님을 따라 『맹자』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지금의 내게 필요한 책들을 파고들어야지! (자신만의 소원과 의무가 있듯이 자신만의 필독서가 존재할 테니까.) 3월까지 조르바를 탈고하고선 희랍 고전을 읽어야지. 차분하고 그윽하게, 한 권씩 한 권씩 깊이.’ 생각이나 마음의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짐의 내용이 그야말로 나다운 모습이라 ‘다짐’이란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달리 표현하고 싶다. 이미 실현된 미래라고.

 

* 정약용, 민족문화추진회 편, 『다산문선』, 솔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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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연속으로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지난주 감행했던 책 주문으로 고삐가 풀린 것이다. 어제는 뇌과학 책 3권이었다. 박문호 선생의 신간 『뇌과학 공부』와 해외 연구자들의 책 두 권이다. 스탠퍼드대 신경과학과 부교수인 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연구하고 있다는 스타니슬라스 데하네의 『뇌의식의 탄생』! 후자의 책은 에릭 캔델의 추천사 덕분에 결정한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의식 관련서 중 최상이다.”

 

오늘은 빈센트 반 고흐의 책 3권과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를 예찬한 책을 주문했다.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보고서 빈센트에 더 알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는 힘들었다. 서점을 둘러보니 18년 전에 읽었던 <반 고흐 영혼의 편지>가 스페셜 에디션과 새로운 판본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새로운 에디션으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을 어렵게 눌렀다. 오베르에서의 빈센트를 담은 책과 프랑스 소설가 페레데릭 파작의 평전 등을 선택했다.

 

교보문고 앱을 열었더니 주문한 책들의 여정이 보였다. 4권이 배송 중이고 4권은 출고 작업 중이란다. 나의 현재 공부 여정은 어떤가? 지금은 글을 쓰고 있고 직전에는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얼마간 읽었다(출간되던 해에 거의 읽었는데 읽지 않았던 부분을 찾아 읽는 중이다). 어제는 뇌과학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좀 더 긴 호흡으로 보자면 몇 개월 째 『그리스인 조르바』를 반복하여 읽는 중이다. 재해가 없는 한 내일도 이 책들을 읽을 것이다.

 

연간 호흡으로 따지면 2017년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중심으로 독서가 이뤄진 해였다. 더 파고들지 못해 아쉽다. 내년 2월까지는 이종인 선생의 국역본과 칼 와일드먼의 영역본을 완독할 계획이다. 그때까진 희랍어에서 국역한 유재원 교수님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출간되려나? (문학과지성사에선 올해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올해 초에 밝힌 바 있다.) 2018년 공부의 핵심 여정은 ‘로컬’과 ‘수잔 손택’으로 정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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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김진호, 갈무리, 2017)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들이다. 살면서 네안데르탈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그렇다. 책은 작곡가들도 작곡가이기 이전에 호모 사피엔스임을 알린다. (모차르트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들으며 위로받고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 일은 음악의 주된 기능이다. 음악의 저력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책은 그 음악을 창조한 작곡가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음악으로 사유하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요컨대, 음악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음악 청취에서 ‘작곡가의 마음’을 생각함으로써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자가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이다. (여러 분야의 이론으로 음악을 매만지는 지적 향연은 별미다.) 저자는 걸출한 음악 이론가이자 작곡가이면서도 음악을 삶의 풍요로움을 돕는 도구로 대한다. 삶을 음악보다 우위에 둔다. 이 당연한 처사를 외면하는 이론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점을 감안하면 다음 두 구절은 신선한 공기처럼 반갑다. (미세먼지는 오늘도 창궐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음악을 감상하며 음악을 삶과 연결하는데 음악학자들은 음악을 삶과 분리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도 학문적 엄밀성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간의 음악학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다.”(p.46)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는가? 적극적인 호모 무지쿠스가 될 생각은 없는가? 사냥꾼이었던 당신의 조상은 작곡을 했을 것이다. 당신도 작곡할 수 있다. 악보에다가 음표를 적어야만 작곡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켜고 가사도 없이 흥얼거리면 된다.”(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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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

『미국의 반지성주의』(리처드 호프스태터/ 유강은 역, 교유서가, 2017)

  


1.

반지성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정치권, 리더십, 일상사 곳곳에 반지성주의가 있다. 조금만 깊어지면 “아, 어려워” 하고 사유를 기피하는 태도 역시 반지성주의의 모습 중 하나다. 일상에서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다. 머리 쓰기를 싫어함, 편안함이나 안일함만을 추구하는 모습 등이 반지성주의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다 건너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멀게 느껴지더라도 일상에서의 반지성주의는 고민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2.

누구나 지성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두가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는 것도 문제다. 결국에는 지성의 힘과 한계를 모두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겠다. 지성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3.

지성을 어떻게 구분할까. 사실 지성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구분이 쉽지 않다. 시민의식이 부족한 이들에겐 어떤 선택이 더 공동체를 위한 길인지를 헷갈리는 법이다. 패션의식(감각)이 없는 이들이 더 나은 패션이 무엇인지 혼동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주 지성적 사유보다 독단적이고 편협한 반지성적 주장에 열광한다.

 

지성 구분의 원칙을 수립하긴 어려워도 지성을 구분하는 세 가지 팁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1) 인과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처사는 지성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단선적이지 않다.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지성은 인과관계의 실타래를 풀어가지만, 반지성은 아예 복잡하다는 이유로 실을 잘라버린다. 어떠한 명쾌함은 지성이 아니라 무사유다. (이 점에서 지성의 구분이 어려워진다. 앞서 지성에 대한 의식을 운운한 이유다.)

 

2) 난해함이 모두 지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성은 때때로 단순함이다. 최근에는 심상정 후보가 지성이 펼쳐내는 희열, 다시 말해 단순함이 주는 통쾌함을 보여주었다.

 

3) 지성은 종종 깊이와 복합적 사유로 나타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에서 ‘주의 깊은 독해’를 옹호하고, 인문학적 사유는 종종 긴 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긴 글은 두 가지로 나눠지겠다. 지성이거나 장황함이거나.

 

4.

어떤 이는 박식을, 다른 이는 통찰을, 또 다른 이는 지혜를 지성이라 한다. 박식을 지성이라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사유 없는 정보 폭식은 오히려 반지성주의의 한 유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성주의를 넓게, 다소 이상적으로 정의한다면) 호기심과 이성의 한계를 이해하여 호기심의 전횡과 이성의 독단을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을 지성에 포함해야 한다.

 

5.

(저자의 견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지성은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힘이다. 통찰에 가깝고 지혜까지는 아니다. 지혜는 그야말로 온갖 미덕이 총동원되어 발현되는 종합적 판단이니까. 나는 지혜를 지성, 감성, 의지의 결합으로 본다. 그래서 지혜는 가끔씩 출몰할 뿐이고, 간헐적인 출몰이지만 영향력이 짙고 크다. 지성, 감수성, 이타심, 이기심, 법과 도덕(현실세계에 대한 이해) 등 많은 것을 알수록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6.

지성주의가 왜 필요한가? 인생과 세상사에는 통합적이고 깊이 있는 지성적 사유를 요구하는 사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종종 야만과 타락을 막기 때문이다. 지성(주의)는 개인의 삶에도 필요하다. 지성이 불안을 걷어가기도 하고, 삶의 문제도 해결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깊이 소통할 줄 아는 공감이 필요한 만큼이나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지성도 필요하다.

 

7.

서언이 길었다. 나는 왜 이 책이 읽고 싶은가. 최소한 네 가지의 이유가 떠올랐다.

 

1) 주지주의와 주정주의의 변증법적 통합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반지성주의를 다룬 고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에 대한 오해와 불합리한 거부이기도 하고, ‘지성인들의 (야만적인) 행태’에 대한 반감이기도 하다. 그 무엇이든 극복해야 할 태도다. 모든 지성인들이 야만적이지 않고, 감수성도 지성만큼이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2) 역자가 주는 신뢰도 크다. 유강은이 누구던가. 유럽 좌파의 역사를 담은 책 『The Left』,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 등 명저들을 번역한 뚝심, 실력, 관점을 지닌 번역가다. 올해 초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다시 출간해 반가웠다.

 

3) 내가 좋아하는 학자들도 반지성주의에 말을 보탠 바 있다.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를 써 왔던 우치다 타츠루의 『반지성주의를 말하다』가 떠오른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1972년에 『생각하는 그리스도인(Your Mind Matters)』로 반지성주의를 비판했다. (스무 살 때, 존 스토트의 “기독교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은 나를 깊이 위로했다.)

 

4) 책은 1964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인데, 50년 만에 번역된 이유가 궁금해서라도 읽고 싶어진다. 그나저나 680쪽의 분량은 전혀 저항감이 없는데, 35,000원이라는 책값은 적잖이 부담된다. 이것도 반지성주의인가?(^^) 반지성주의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개념과 범위를 알기 위해서라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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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마음이 괴롭지는 않으니 자책은 아니다. 얼마간의 부끄러움을 동반한 현실 인식이다. 겸허함도 아니다. 오만과 겸손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그보다는 이미 알게 된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앞으로 알고 싶은 것들에만 시선을 둠에서 생기는 지적 열망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자의 눈에는 나아갈 길만 보이는 법! 문득 이렇게 모르는데 강연을 하며 살아가는 삶의 관용이 고마워진다. (누군가에게 속삭이고 싶다. 저기요, 강사들의 얄팍한 지성을 주의하세요! 예외는 아주 드물 거예요.)

 

물론 내게도 열정이란 게 있어서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왔고, 꾸준히 글을 썼다. 공부한 내용을 긴 글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내게 남은 것은 몇 가지의 암묵지다. 암묵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배우고 '익히는' 학습과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암묵지는 우리네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만, 암묵지를 평가하는 자격증이나 학위는 없다. 반면 형식지는 다른 사람과 쉬이 공유할 수 있는 매뉴얼과 같은 지식이다. 내 무지의 대상은 이 형식지를 말함이다. (실제의 나와 사회적 나의 괴리가 크다는 '사실'을 느끼는 요즘이다.)

 

며칠 전, ‘제대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알고 있는 형식지들을 적어보았다. 분야, 인물, 개념, 서적을 막론하지 않고 적었더니 몇 가지는 되었다. 수잔 손택, 『그리스인 조르바』, 문예사조, 리버럴 아츠, 인문주의, 긍정심리학, 학습조직 등이었다. (관심도 많고 이미 열심히 읽어와서 조만간 목록에 추가될 몇 권의 후보 목록이 더 있긴 하다. 재능, 파커 파머, 『변신』, 김영하,『오딧세이아』와 그리스 비극! 한참 멀었지만 언젠가 포함하고 싶은 목록도 있다. 『괴테와의 대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광기의 역사』) 자기이해나 자기경영, 강의력이나 독서력은 세상에 분명히 실재하는 능력이지만, 매뉴얼과 같은 명료한 지식이 없다는 점에서 제외시켰다. 성격심리학이나 재즈는 관심이 많지만 아는 바가 얕아 빠졌다. 벤야민은... 두 전문가의 강좌도 듣고 강독 세미나에 참석하여 읽었지만, 아직은 잘 모른다.

 

나는 학위가 없다. 공부를 하다보면, 종종 제도권에서 공부해서 학자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회인가? 모르겠다.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환경이나 남 탓이 아니다. 내가 그렸던 20대 인생 그림에는 대학 교수라는 직함은 없었다는 말이다. 전문가가 되는 길은 다양했다. 학위 취득, 현장에서의 성과, 네트워크 소속, 책 출간 그리고 진짜 실력 쌓기! 당시 나의 선택은 ‘진짜 실력’을 갖추는 길이었다. 그러면 자격증이나 학위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책'으로 승부하고 싶었다. 이 생각은 이상적인 동시에 순진했다. 나다운 길이면서도 세상에 대한 무지의 발로였다.


지적 스승이 있었더라면 공부에 더욱 탄력을 받았을 테지만 나는 그런 스승을 만나지는 못했다. (구본형 선생님을 존경하고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 분의 힘도 암묵지에서 나왔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하나의 공동체에서 배운 것을 실현해가면서 혼자서나마 열심히 공부해왔다. 광장까지는 아니어도 골방에서의 공부는 아니었다. 카페에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식의 공부라고나 할까. 만나면 지적 교류를 즐겼고, 집으로 와서는 책을 즐겼다. 나를 전율시키는 주제를 만나면 여러 중요한 책을 읽으며 글로써 정리했다. 가장 길게 쓴 글은 인문주의와 리버럴 아츠에 관한 에세이인데, A4 100 여 장에 가까운 분량이다. 손택, 조르바도 수십 장에 달한다.

 

책으로 출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능력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출간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는지 모르겠지만(후자라고 믿고 싶다), 거의 10년 동안 세상에 내놓은 지적 결실이 없었다. 날마다의 생산성은 나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빈약한 결실의 지난 삶들이 참 아쉽다. 누가 책을 출간하는가? 목표를 세웠으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자가 책을 출간한다. 실력이 아니라 목표달성능력이 중요하다. 누가 좋은 책을 출간할까? 목표달성능력을 가진 실력 있는 분들이 좋은 책을 출간한다. 목표달성능력이 출간 여부의 관건인 것이다. 나는 이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세상은 나에게 자격, 학위, 저서 등의 스펙을 요구했다. 기업교육의 ‘언저리’에서 12년 동안 살아왔음이 신기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잘 살아와 준 고마움에서 나온 미소인지, 어떻게 살아왔지 하는 의아함의 실소인지 헷갈린다. 어쨌든 웃으니, 좋다. “유머 감각이 너를 구원하리라”는 캠벨의 말도 떠오른다. 잠시 덤덤하게 나 지적 수준(내지는 현실)을 돌아보고 나니, 담담하게 결심하게 된다. 담담함은 그윽하고, 평온하고, 객관적인 상태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 담담함이 나를 기분 좋은 결심으로 이끈다. ‘수잔 손택과 『그리스인 조르바』만큼은 제대로 알자!’ 한동안 달려갈 나의 푯대다. 이 책들을 읽으면 희열이 느껴진다. 나의 희열을 쫒는 삶! 근사하다. 치열하게 공부하여 결실마저 맺는다면, 적어도 지적인 영역에서는 내 삶을 보면서 미소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실소가 아닌 흡족함의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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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신문을 들고 오는 시간은 3~4분이다. 빈 손으로 나간다. 핸드폰도 필요치 않다. 한 시간 외출에도 핸드폰을 두고 가기도 하니, 잠깐의 외출이야! 책을 들고가는 일도 거의 없다. 시간이라면 찰나까지 아끼고 싶긴 해도 틈새 시간에 할 일들은 많다. 잠시 멍 때리기, 체조하기, 콧노래 부르기, 아무도 몰래 춤 추기, 하루 일정 돌아보기 등. 엘리베이터를 한참 기다린다고 해도 괜찮다. 스트레칭을 길게 할 수 있으니 좋다. 내가 오가는 시간대에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웬일인지 오늘은 책을 들고 나갔다. 조셉 캠벨의 산문집 『신화와 인생』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아무렇게나 펼쳐 한 문단을 읽었다. "우리가 과학적 진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는 -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 항상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데" 머릿속에는 과학적 환원주의와 과학적 연구 결과를 해석할 수 있는 통찰의 중요성이 떠올랐고, 눈은 다음 문장을 따라갔다. "왜냐하면 진리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 자체는 절대성을 품는 단어지만, 인간에 의해 다뤄지는 순간에 진리의 절대성은 사라지고 만다. 서로 다른 관점으로 진리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하다.


"윌리엄 제임스는 "진리란 곧 유용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생각이 터졌다. 이 문장은 내 안의 지적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었다.


지난 주에 "저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해요"라는 한 지인의 말을 들었다. 어디에서나 절대성이 훼손되지 않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사유 단념을 촉구하는 듯한 뉘앙스여서 "진리란 없다"는 표현을 싫어한다. 인생에 관한 고민을 할 때, 종종 듣게 되는 "정답은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단 하나의 정도는 없지만, 나에게만 적용되는 당시로서의 맞춤한 정답은 있다! 먼 훗날, 더 나은 길을 깨닫더라도 당시의 식견과 의지로서는 정답인 것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답은 없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정답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한두 가지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거나 어떤 이념에 경도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진리가 없다고 말은 하지만, 삶과 신념 그리고 가치관이 어떤 하나의 진리를 표방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자신의 그 관점 밖의 것들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에겐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진리가 없다는 말은 쉬이 하지 못한다. 누구나 어떠한 가치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진리가 존재한다. 절대 진리가 아니라 변모하는 진리로써.


내게 진리는 '유용성' 또는 '지혜나 중용'이다. 여러 가지로 표현했지만 공통점은 변용성(變容性)이다. 무엇이 유익한가. 사람마다 다르다. 내게는 조언이 유익하고, 누군가에는 공감이 유익하다. 마치 서로가 각기 다른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과 같다. 지혜도 마찬가지다. 지식과 달리 지혜는 변모한다. 공자가 안회와 자로를 각기 다르게 대했다. 둘의 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용도 두 가지 사이에 고정불변의 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 장소, 상황, 사람에 따라 중용은 변화무쌍하게 자신의 중간 지점을 찾아다닌다. 윌리엄 제임스가 이런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진리'에 반하는 개념으로 잠시 '상대 진리'를 사유했다. 상대성의 기준이 유용, 지혜, 중용인 셈이다.


다시 책을 들었다. 다음 문장이 반가웠다. "이른바 절대진리의 관념 - 즉 사고하려는 인간 정신의 상대성의 범위 너머에 이른바 절대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 - 을 나는 '진리 발견의 오류'라고 부른다. 저주 받아 마땅할 저 설교자들 모두의 문제 역시 진리 발견의 오류다." 캬! 대화가 이뤄졌다. 캠벨 선생은 나의 사유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맞춤한 말로 화답했다. 어디 설교자들 뿐이겠는가. 자기계발 강연이나 정치적 연설에서도, 스포츠 중계 해설자들도 수없이 진리 발견의 오류를 범한다. 그러니 문제(problem)라고 하고 싶진 않다. 우리네 실존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를 인식하고 살면 더욱 지혜로워질 문제(agenda)이긴 하고.


위의 문장을 읽는데 1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책을 덮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마음이 차올랐다. 아침 독서는 이로써 끝이다. 점심 식사를 하고서, 다시 펼쳐보았다. 이어지는 문장은 너무 아름다워서 내 생각을 덧붙이면 모조리 사족이 될 정도라고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또는 자기 구루가 이른바 절대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니체의 말마따나 '개념의 간질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어떤 관념을 지니게 됨으로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다." 아! 역시, 명료한 니체다.


"진리가 없다"는 말로 진리에 대한 사유를 회피하거나 자기 안에서 추구되고 있는 진리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명제의 간질병'이려나. "진리가 없다"는 말은 개념이 아니라 문장이니까. 다시 책을 덮는다. 사유의 시간을 제외하면 몇 줄을 읽는 데에는 3분이 채 걸리지 않았을 테지만, 한나절짜리 에너지는 되었다. 한 마디를 덧붙여야겠다. 아침에 『신화와 인생』을 들고 나갈 때에는 몇 편의 글만 발췌독했을 걸로 기억했지만, 책을 펼쳐보니 200페이지 가까이 밑줄 쳐 가며 꼼꼼히 읽은 흔적이 있다. 책의 어디를 펼쳐도 밑줄과 별 표시가 보인다. '내가 무슨 독서의 망각병을 앓는 건 아닐 텐데, 읽었다는 사실도 새까맣게 잊고 사는구나.' 아침부터 영감을 얻어 기분이 좋아서일까? 좋은 책을 새롭게 읽을 수 있어서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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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책을 읽었다. 전날 밤, 침대 맡에 미리 놓아두었던 책이었다. 책 선택은 즉흥적이었다. 계속 읽어오던 책이 아니었고 수개월 전에 몇 편의 에세이를 골라 읽긴 했던 산문집이다. 요즘의 독서테마와 연결되지도 않았고, 계획된 강연과도 연관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지금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이었다.


삶의 소소한 습관이 지적 생활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그것도 막강한 영향이다. 이 책을 읽는 바람에 휴일 아침 시간이 나의 학창시절 회상과 한 작가의 젊은 시절을 정리하는 일로 채워졌다. 눈을 떠서 읽은 글이 헤르만 헤세가 1923년에 쓴 ‘자전적인 글’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였던 것.


사실 어제 저녁만 해도 이튿날 오전 시간을 이렇게 보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계획 자체가 없었다.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우리의 약점이나 습관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어젯밤 ‘잠들기 전에 뭘 읽지?’ 하는 물음에 낭만적이고 즉흥적인 기분으로 헤세의 산문집을 꼽아들었던 일로부터 빚어졌다.


이것이 중대한 불찰은 아니리라. 특히 남들의 눈에는 읽어야만 하는 책을 읽는 독서가 아니라 여유로운 끌림에 따라 읽는 나의 독서 생활이 부럽게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나의 낭만적인 독서 성향을 좋아한다. 다만 그 빈도가 ‘가끔씩’이 아니라 ‘너무 자주’가 되면 삶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점을 잊고 싶지도 않다. 푯대를 쫓는 삶이 주는 유익도 크니까.


지나치게 생산적인 삶이 우리에게 독이라면, 지나치게 낭만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효율도 낭만은 모두 장단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장점에서 단점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정확하게 아는 일이다. 중용이란 바로 그 건강한 균형 지점에서 머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을 최상의 가치로 꼽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따르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교양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나는 좋은 문장들은 볼펜으로 밑줄을 긋지만, 이 말에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쳐 두었다.


건강한 중용의 지대를 찾고 머무는 일은 분명 이상적인 발상이다.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대개의 가치가 그렇다. 사랑, 용기, 중용, 정의 모두가 어디 쉽게 손에 잡았던 적이 있던가. 목표는 손에 잡아야 맛이지만, 가치는 추구함으로도 의미가 있다.


추상적인 얘기도 구체성을 덧입히면 손에 잡히고 눈에 들어온다. 저 위대한 가치 ‘중용’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나도 잠자리에서는 『학습하는 조직』을 읽으며 전문성을 추구하고 싶진 않다. 생각만 해도 삶이 팍팍해지는 느낌이다. 낮과 밤은 다르다. 기분이 다르고 실제로 일상의 모습도 달라진다.


헤르만 헤세


밤에 읽을 책이라면. 학습 조직보다는 헤르만 헤세의 『잠 못 이루는 밤』이 탐난다.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좋다. 목차를 보고 마음에 드는 장을 펼친다. 제목으로 예상한 내용과 실제의 내용이 다르기도 하겠지만, 이를테면 나는 ‘밤의 얼굴’이나 ‘옛 음악’ 또는 ‘머나먼 푸른 하늘’이라는 제목의 장을 펼칠 것이다. 이때 잔잔한 재즈가 흘러도 좋겠다.


밤이 휴식의 시간이라면, 낮은 일하는 시간이다. 아쉽게도 나는 문학만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직업은 아니어서, 낮에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은 고달픔이 아니다. 밤의 여유와 자유 그리고 낭만과 사랑을 누리는 이들에게 낮이란, 삶의 균형을 이뤄주는 필수적인 시간이다. 또한 낮의 생산적인 활동들은 밤의 가치들(여유, 자유, 낭만, 사랑)을 실현하도록 돕는 도구다.


그러니 둘은 대립적이지 않다. 상호보완의 관계가 되어 중용을 향해 손잡고 나아간다. 여기서의 중용이란 『학습하는 조직』과 『잠 못 이루는 밤』 간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그것은 타협, 무지, 포기, 아쉬움이다. 중용의 정확성을 지향해야 한다. 인생의 다른 상황들보다 책읽기에서 중용의 실천은 그나마 간단하다. 낭만과 효율을 모두 추구하려는 나의 마음은 두 가지 원칙으로 정리될 수 있을 테니까.


“밤에는 책장에서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꼽아서 읽을 것. 최대한 즉흥적이고 낭만적일 것.” 문제는 내가 어젯밤에 헤세의 산문집을 들자마자 잠들었다는 점이다. 아침에 일어나 뒷부분을 마저 읽느라고 오전 시간을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 보냈다.


이런 나를 바라보다가 원칙 하나를 추가했다. “밤에 읽던 책은 다음 날 아침에 불러들이지 말 것. 미처 한 챕터를 끝내지 못했더라도! 낮에는 즉흥적이고 낭만적인 독서에서 벗어나 계획적이고 생산적인 독서에 몰입할 것.”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