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종인 역, <신을 구하는 자> The Saviors of God

(카잔차키스 전집 『향연 외』에 수록)

 

1.

강력한 책이다.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비범하기에 그렇다. 감히 선언하자면, 향상심이 강하고 자기 성장을 위해 실제적인 고민과 노력을 해 온 이들에겐 위로와 자극 그리고 달려갈 푯대를 선사하리라. 부연 설명 없이 선언과 명제만 나열되어 있기에 모호하게 읽힐 대목이 많지만, 두어 번 읽어도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난해하진 않다. 내겐 곱씹어 새길 문장이 한 둘이 아니었다. 거듭하여 읽고 싶은 책이 됐다. 사실 두 번째로 읽는 중인데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대체 한 번은 읽을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2.

<신을 구하는 자>는 카잔차키스(1983~1957)가 1923년에 쓴 책이다. 작가 자신을 위한 책이다. 마흔이 된 카잔차키스는 인생철학을 정리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구상했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신을 구하는 자>를 탈고한 직후부터 『오디세이아』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예술로 형상화할 계획을 세웠고 <신을 구하는 자>를 쓰면서 다듬은 생각들을 『돌의 정원』이라는 소설에 흩뿌려 놓았다. (에세이를 통해 생각을 정돈하여 전하고, 소설이라는 예술로 형상화했다는 점은 카뮈의 작업 방식과 닮았다. 누가 선취했는지는 모르지만.)

 

3.

철학적 에세이와 소설로의 예술화를 병행한 방식이 의미하는 바는 최소한 두 가지다. 첫째 톨스토이나 발자크처럼, 카잔차키스는 유미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오직 예술(唯美)’만을 외치지 않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소설가였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거나 사회를 관찰했으며 개인의 자기실현을 돕기 위해 소설이라는 예술을 탐구했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은 유미주의라는 구분이 무의미하다. 작품 자체가 매우 아름다우니까! 다시 말해 놀랍도록 예술적이면서도 유미주의 너머의 가치(종교, 시대, 삶과 인류)를 담고 있으니까.)

 

둘째, <신을 구하는 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해를 돕는 중요한 텍스트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여 둔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렇다. 카잔차키스도 두 권의 저서를 특별하게 여겼다. 카잔차키스 전문가인 ‘키먼 프라이어’는 이렇게 썼다. “<신을 구하는 자>와 <오디세이아>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지목하면서 후세 사람들이 이 두 작품으로 자신을 기억해 주기 바랐다.” (키먼 프라이어! <신을 구하는 자> 영역본 번역자다. 한국어판에도 30쪽에 달하는 그의 작품 해설이 실렸는데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요긴한 텍스트다.)

 

4.

『신을 구하는 자』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철학서에 가깝다. 칸트처럼 논리와 체계를 세우는 철학서나 플라톤처럼 대화를 통해 하나의 개념을 탐구하는 철학서는 아니다. 니체처럼 아포리즘으로 구성한 철학적인 선언이다. 이 책에서 유익을 얻으려면 달콤한 사탕을 즐기듯이 문장들을 음미하면 될 것이다. 사탕은 딱딱하다. 입에 넣은 순간엔 맛도 느껴지지 않지만 혀로 굴리며 조금 빨고 나면 달콤해진다. 깊은 사유를 담은 딱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물고 빨면 달달해진다. 다른 점도 있겠다. 사탕을 오래 빨면 혀가 얼얼해지지만, 일급의 사유들을 오래 음미하면 그윽해진다.

 

5.

<신을 구하는 자>는 프롤로그, 준비, 행진, 환상, 행동, 침묵 이렇게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내가 이해한 대로 저자의 전체 메시지를 표현하면 이렇다. “너 안의 향상심을 발견하고 더욱 키워라. 전사처럼 스스로와 투쟁하여 극기하라.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깨달아 행동으로 실현하라. 정신적인 성장도 놓치지 마라. 자기실현의 완성은 침묵이다. 내가 말하는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다.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최고의 경지를 뜻함이다. 투쟁도 소리칠 필요도 없는 경지!”

 

6.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카잔차키스는 ‘준비’ 장에서 인간의 세 가지 임무를 선언한다. 첫 번째 임무는 운명애(amor fait)다! “쓸데없이 저항하지 않고 마음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 여러 가지 제한을 인정하고 아무 불평 없이 일하는 것 - 이것이 인간의 첫 번째 의무이다. 불안정한 심연 위에다 원만하면서도 환한 마음의 지역을 구축하라. 아주 씩씩하면서도 근면한 자세로 그런 지역을 구축한 다음, 그 지역의 군주처럼 우주를 도리깨질하고 키질하라.”

 

두 번째 임무는 “고뇌 속에서 피를 흘리고 그 고뇌를 심오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중에 오고 또 가장 커다란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 이것이 세 번째 임무다.” 삶의 부조리와 허무 그리고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나아가라는 선언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지만 그래도 용감하게 당신의 뱃머리를 그 심연 쪽으로 돌려놓으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당신의 의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7.

‘행진’은 네 단계로 이뤄진다. 에고, 종족, 인류 그리고 대지다. 우리의 의식을 에고에서 벗어나 인류와 대지까지 확장시켜 주는 장이다. ‘환상’ 장에서는 향상심을 추종하되 홀로 투쟁하지 말고 동료들과 연대하고 역사적 위인들과 연대하길 권한다.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그리고 대지의 힘을 얻으라고 권한다.

 

이 모든 선언과 투쟁은 결국 행동하기 위함이리라. “이론의 가장 거룩하고도 궁극적인 형태는 행동이다.” “행동은 구원으로 가는 가장 넓은 문이다.” 여기에서 카잔차키스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한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 중 하나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이고 때론 보통명사다. “우리는 신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었다. 심연, 신비, 신비, 절대 암흑, 절대 광명, 물질, 정신, 절대 희망, 절대 절망, 침묵.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불렀다. 이 이름만이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우리의 가슴을 심오하게 울리는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8.

마지막 단계인 ‘침묵’은 정신적 수련의 최후 단계다. 다다르기 힘든 이상적인 단계. “침묵은 이런 뜻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완수한 끝에 마침내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노력의 최고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투쟁할 필요도 소리칠 필요도 없다. 그는 정적 속에서 완벽하게 원숙해졌다. 그는 더 이상 파괴당하지 않는 자, 온 우주와 영원히 함께 있는 자다.” 침묵은 극단의 경지다. “여자의 자궁 속에 안착한 남자의 씨앗”이 느낄법한 편안함! 최선과 최고가 머무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평온(serenity)이랄까. 침묵의 경지는 고정점이 아니다. “그 정상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심연의 위에 매달린 채 자랑스럽고 마법적인 주문을 노래 부르는 것이다.”

 

9.

인상 깊었던 대목 하나를 적어 둔다.

 

“나는 물질을 제압하여 그것을 내 마음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되도록 한다. 나는 식물, 동물, 인간, 신들을 마치 나의 자식인양 좋아한다. 나는 마치 온 우주가 내 몸인 양 내 주위에 깃들도 또 나를 따라 오는 것처럼 느낀다.” (p.189)

 

작품의 초반부에 나오는 대목인데 처음 읽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다시 읽다보니 의미심장했다. 후반부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용이 서로 연결되는 모양새인데 이를 보면 작가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책이 아님을 느끼시리라. (카잔차키스라는 작가의 성실함을 모르지 않지만, 이런 책들은 마치 현대미술을 대하는 기분을 들게 하지 않던가. ‘이거 정말 대단한 작품인 거야?’)

 

“너는 전투를 거듭하며 전쟁에 출정한 병사의 모든 의무를 수행했다. 너는 너의 몸이라는 작은 천막에서 싸웠다. 그러나 보라, 그 싸움터는 너무 비좁았다. 너는 숨이 막혔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뛰쳐나갔다. 너는 네 종족 위에 천막을 세웠고 너만의 손과 심장이 아니라 종족의 손과 심장이 가세했다. 너는 죽은 조상들을 되살려 피를 보충했고, 그런 다음에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자 모두와 함께 전쟁터로 출발했다. 갑자기 모든 종족이 너와 함께 움직였다. 인간의 성스러운 군대가 너의 배후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대지 전체가 군의 진지처럼 진동했다. 너는 까마득한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두뇌 속 전투 계획은 계속 가지를 쳐나갔다. 대치하던 모든 원정대는 네 가슴의 은밀한 진지로 합류했다. 너의 배후에 있는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군대가 싸우는 전선에 보급품을 보내기 위한 보급 부대로 조직되었다. 이제 온 대지가 너에게 매달려, 살의 살이 되고, 저 혼돈으로부터 소리 지른다.” (p.221)

  

10.

인용문에 대한 개인적 감상과 전체 소감을 덧붙임으로 글을 맺는다.

 

1) 먼저 유대 또는 연결에 대하여. 우주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에게만 함몰되면 세상을 잃을 것이다.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면 그와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리라. 카잔차키스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로부터 배우는 자들이야말로 위대함에 이르지 않던가. 니체가 떠오른다.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해 주는 가장 강력한 표지다. 내가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카이사르가 내 아버지일 수도 있으리라.”(<이 사람을 보라>)

 

2) 비유는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유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되 비유의 언저리를 확대 해석하면 오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우월함이 아니라(전투, 제압, 보급 등의 단어 때문에 하는 말이다) 타자와 자연과의 연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가 인생을 하나의 거대한 투쟁이라고 보긴 했지만 인간 우월주의를 강조하진 않았다. <신을 구하는 자>에서 이리 말하기도 했다. “대지의 목적은 생명이 아니다. 또 인간도 아니다.”

 

3) 이 책은 향상심을 가진 이들을 위한 책이다. 상승은 힘들다. 지금 일어서서 점프를 해 보라. 점프를 위를 향한 욕망의 발현이라고 해 두자. 이 욕망은 이내 좌절된다. 중력의 힘에 끌려 이내 땅으로 내려올 테니까. 나에게 점프는 한 인간의 성장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성장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과제가 자기를 넘어서는 일, 다시 말해 극기다. 타자와 연대하고 자연이 주는 에너지를 흡수할 줄 아는 이들이 ‘극기’라는 장기전에서 더 자주 승리하리라.

 

4) ‘낮은 여기’에서 ‘높은 저기’로 오르는 이들에게는 사다리가 필요하다. 의식의 사다리, 인식의 사다리, 열정의 사다리, 실천의 사다리, 의지의 사다리…! 어떤 책은 하나의 사다리다. 누군가의 영혼을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사다리! 카잔차키스의 <신을 구하는 자>도 그런 책이다. 그렇다면 향상심을 가진 이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가. 세상살이에 ‘반드시’가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생과 사 둘 뿐이리라. 하나를 더하자면 사랑의 실천을 끼워 넣고 싶다.) 인간은 책이 없어도 자기를 향상시킬 줄 아는 존재다. 니체는 말했다. “올라갈 사다리가 더 이상 없다면 너는 네 자신의 머리를 딛고 올라갈 줄 알아야 한다.”

 

5) 사다리 비유를 사유하고 실천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향상심은 자기를 향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 내면, 실력을 높여야지 높이만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명성을 향하는 마음이 앞설 수는 있지만, 평생 명성만을 쫓으면 거짓되거나 위험해진다. 세상엔 높이에 비틀거리며 고산병을 치르는 이들이 많다. 높이에 취하여 명성이 곧 자기 존재라고 착각하거나 위선이 탄로나 갑자기 추락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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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아한 선동이 더 강렬하다

앙투안 콩파뇽 『인생의 맛』 Antoine Compagnon, Un Ete Avec Montaigue

 

1.

이리도 품격 있는 선동이라니! 몽테뉴의 삶과 사상을 40개의 에세이로 풀어낸 책 『인생의 맛』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목표’가 독자들을 몽테뉴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썼다. 1592년에 사망한 몽테뉴는 에세이의 원형인 『수상록』을 남겼다. (인문주의와 개인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상록』을 펼치고 싶었던 순간이 도대체 몇 번일까! 마흔 번에 가까웠으리라. 모든 글을 읽을 때마다 몽테뉴가 궁금해진 셈이다. (수년 전 ‘몽테뉴 스터디’도 했기에 전혀 모르진 않지만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에 『인생의 맛』을 지인에게 추천했는데, 그는『수상록』의 추천 번역본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몽테뉴를 읽고 싶다는 것이다. 『인생의 맛』을 읽은 두 명의 마음이 움직인 셈이다. 이발이중이다. (모수는 적지만) 앙투안 콩파뇽은 독자를 단박에 몽테뉴로 이끈 탁월한 선동가였다. 과장된 동작이나 호기로운 목소리는 없었다. 논리와 통찰 그리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몽테뉴 이야기를 풀어갔을 뿐이었다. ‘선동이 이리도 우아할 수 있구나!’

 

2.

책은 가볍고 작다. 200쪽도 안 된다. 5분이면 읽을 분량의 짧은 글을 40편 묶었다. 편안하게 읽고 몽테뉴가 던지는 화두를 생각하기에 좋다. 1300쪽에 달하는 『수상록』(완역본) 읽기에 비하면 부담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몽테뉴의 저력을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이다. 몽테뉴에 깊은 이해를 가진 저자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저자에게 반했는데, 그의 사려 깊음이 단 한 페이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몇 줄짜리 문단을 40여 군데 골라내어 간략하게 해설함으로 그 역사적 깊이와 여전한 현재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 페이지나 손에 걸리는 대로 선택할 것인가? 우연에 운명을 맡기면서? 아니면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을 빠르게 훑어야 하나? 이 작품이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혹은 일관성이나 완성도를 포기한 채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두서없이 다루는 데 만족해야 할까? 나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했다. 일정한 틀 없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저자가 책을 쓴 방식은 바로 몽테뉴가 글을 썼던 방식이었다. 저자는 『수상록』에 정통했기에 자유롭게 쓰면서도 몽테뉴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몽테뉴를 작은 그릇에 우겨 넣지 않았고 해석과 통찰이 편협하지 않았다. 때때로 라틴어 지식을 동원하여 몽테뉴의 생각을 풀어냈고(‘저울’, ‘성실성’ 등의 글) 몽테뉴 사상의 의의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신세계를 전염시켜 쇠퇴와 몰락을 앞당기는 것은 아닌지” 라고 염려하는 몽테뉴의 글을 두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신세계’라는 글이다).

 

“신세계를 사로잡은 것은 구시대의 정신적 우월함이 아니라 그들을 무릎꿇린 야만적인 완력이었다. 당시 몽테뉴는 멕시코의 찬란한 문명을 야만적으로 파괴한 스페인의 초기 식민지 개척사를 읽고 난 직후였다. 그는 식민주의를 처음으로 비판한 이들 중 하나다.”

 

(개인적으론 하워드 진이 떠오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깃든 야만성을 폭로한 그였다. 20대 중반에 그의 『미국 민중사』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읽으며 가슴이 뜨거웠던 날들! 2016년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개정판이 출간되고 2017년에는 하워드 진 입문서(『만만한 하워드 진』)가 출간될 정도니 아직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함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그는 2010년에 타계했다.)

 

3.

책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먼저 몽테뉴의 말을, 곧이어 저자의 말까지.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시대나 해 단위가 아니라, 매일 매분을 그린다. 내 이야기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금방이라도 내 처지뿐 아니라 생각까지 변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양하고 유동적인 사건들과 갈팡질팡하고 때에 따라서는 상반된 생각들의 기록이다. 나는 또 다른 나 자신일수도 있고, 그때그때 상황과 판단에 따라 주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 『수상록』 제3권 2장

 

“요컨대 인간 조건에 따라 해석하고 그 고난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몽테뉴의 시계(視界)는 변화에 있지 존재에 있지 않다. 바로 다음 순간, 세상도 나도 변할 것이다. 자신이 한 경험과 생각들을 기록한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다만 세상 만물이 얼마나 쉼 없이 변하는지를 기술했을 뿐이다. 그는 상대주의자다. 나아가 그의 이 같은 ‘일면’(필자 강조)을 원근법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몽테뉴는 말한다. 세상에 대한 나의 시각은 시시각각 변하고, 나의 정체성은 불안정하다. 그는 ‘귀착점’(저자 강조)을 찾지 못했지만 그것을 찾기 위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 앙투안 콩파뇽

 

책은 이런 식의 구성이다. 몽테뉴와 후대의 학자가 생각을 주고받는 형식 말이다. 이런 책의 가치는 편집 가공하는 쪽(저자)의 깊이에 달렸을 수밖에 없다. 몽테뉴는 후배의 편집에 반대나 찬성할 수가 없기에 그렇다. 나는 이 책에 만족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편집 해석한 『조르바의 인생 수업』에 큰 불만을 느꼈던 점에 비하면 정말이지 만족이다.)

 

혹시 위 구절에 감동하지 못했다면 나의 개인적 취향으로 고른 구절이기 때문이리라. 상대주의자 몽테뉴는 그의 ‘일면’일 뿐이다. 다른 글에서는 몽테뉴의 또 다른 일면들이 소개된다. 회의주의자 몽테뉴, 성실한 몽테뉴, 르네상스인 몽테뉴, 서재인 몽테뉴 등. 니체도 극찬한 이 르네상스의 거장은 매우 진솔하게 자신을 관찰하여 기록했고, 우리 모두는 그의 일면을 통해 자신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몽테뉴 읽기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할 거라는 말이다. (‘거의’라는 말의 무책임성은 참 편리하다.)

 

위 본문과 관련되긴 하지만 조금은 엉뚱한 얘기를 해야겠다. 최근 『역사의 천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 벤야민의 생애 마지막을 추적한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페이지의 여백에 ‘갈팡질팡’이라고 적어야 했다. 벤야민은 종종 우왕좌왕했다. 미국 망명을 두고 고민할 때에도 오늘의 행선지를 결정할 때에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갈팡질팡’이란 워딩으로 기록한 것이다. 몽테뉴의 표현이 반가웠던 이유다. (갈팡질팡이라 해석한 프랑스어 원문이 궁금해진다.)

 

갈팡질팡의 근원은 우유부단함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다. 지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눈앞에 마주한 사람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이 마을에서는 진리가 저 마을에서는 오류가 되고, 당시의 진리가 지금에선 거짓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푸코는 “나는 달력과 지도가 없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하는 지혜란, 이렇게 장소, 상황, 사람을 고려한 종합적이고 시의적인 판단을 뜻한다. 그렇기에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은 상대주의자가 된다. ‘지혜’라는 지적이고 감수성 짙은 고지에 이르기 위해 감지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상대주의자!

 

누군가에겐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실상 그것은 지혜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일상의 사소한 결정에서 우유부단할 확률도 높지만 그들은 점점 용기와 행동력까지 겸비하면서 우유부단함으로부터 달아날 것이다. 그런데 우유부단과 지혜는 어떻게 구분할까? (사례 없이 명제로만 언급하자면) ‘순간’은 그들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일상’은 그들의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4.

『인생의 맛』에서 가장 감동했던 글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p.179~182). 나는 자주 내 삶을 성찰한다. 생각과 성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종종 이런 고민이 든다. ‘성찰의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삶을 위해 성찰을 줄여야 할까?’ 몽테뉴의 글은 이런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추동했다. 성찰을 깊이, 제대로 하라고! 내 삶의 허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찰의 과다함이 아니라 성찰의 질적 수준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삶을 추동하는 두 바퀴인 성찰과 실천의 균형을 이루지 못함이 문제이지 깊은 성찰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아래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 몽테뉴의 두 구절이다.

 

“내 책을 아무도 읽지 않게 된다면, 내가 그토록 유익하고 즐거운 사색으로 그 많은 시간을 한가로이 보낸 것이 과연 낭비가 되는 것일까? 나라는 거푸집에 이 형상을 찍어내는 동안 나는 자신을 추출해내기 위해 수시로 다듬고 땜질해야 했으며, 그러는 사이 주인(몽테뉴 자신)도 단단해지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졌다. 타인을 위해 그리다가 내 본연의 보다 선명한 색으로 내면을 칠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작가와 한 몸인 책. 고유의 일과. 내 삶의 일부. 이 책은 다른 책들처럼 외부적인 목적과 여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 제2권 18장

 

“내가 그토록 지속적으로 호기심에 이끌려 나에 대한 보고서를 써 온 것이 시간 낭비였을까? 고작 몇 시간 동안 생각만으로 혹은 몇 마디 말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들은, 긴 세월 동안 성심과 전력을 다해 그것을 꾸준히 연구하고 작품으로 만들고 직업으로 삼은 자처럼 깊이 있게 자신을 탐구하지도, 자기 안으로 스며들지도 못한다.” - 몽테뉴

 

5.

책의 원제는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 Un Ete Avec Montaigue’이다. 2012년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 저자가 출연하여 몽테뉴와 그의 『수상록』에 대해 5분 남짓 동안 나눈 이야기가 책이 되었다. 이 방송에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 덕분에 2013년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이후 보들레르, 위고, 마키아벨리, 호메로스까지 진행되었으니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의 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한다. 저자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수업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끝으로 저자를 잠깐 소개해야겠다. 앙투안 콩파뇽!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몽테뉴와 마르셀 프루스트 전문가다. 2013년도 진행된 ‘프로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저명한 프루스트 전문가 여덟 명이 참여했는데 앙투안 콩파뇽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국내 번역된 책은 『인생의 맛』,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공저)과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이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감상으로 서평을 맺는다. 나에게 앙투안 콩파뇽이란 학자는 ‘우아한 선동’도 강렬하고 달콤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저술가다.



Posted by 보보


-『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를 읽고
하이디 그랜트 할버슨 / 토리 히긴스, 한국경제신문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캔 블랜차드의 책 제목이다. (물론 본래의 의도대로라면 문장 끝에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붙였으리라.) 고래는 차치하고, 칭찬은 정말 사람을 춤추게 할까? 대다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칭찬이 모든 사람들을 들뜨게 하지는 못한다. 물론 사람의 내면에는 인정 욕구가 존재하고 많은 이들이 칭찬에 행복감과 에너지를 얻지만, 누구나 칭찬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칭찬을 받으면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을 받은 마냥 어색해하고 당황해한다. 심지어 칭찬의 내용을 믿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동기를 부여받는 이들은 이 말을 믿지 않으려 든다. 누구나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성격심리학에서부터 시작된 인간 성향에 관한 연구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는 성향에 관한 연구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용적인지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서로 다른 두 유형, 성취지향과 안정지향을 깊게 들여다본다. “안정지향(prevention focus) 형의 사람들은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의욕이 생기는 사람들”이다. 칭찬은 이들을 당황스럽게 할 뿐이다. 성취지향은 긍정적인 피드백과 낙관론으로 움직이지만, 안정지향형의 사람들은 칭찬과 낙관론보다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의식과 비관론으로 움직인다.


책의 두 저자(하이디 그랜트 할버슨, 토니 히긴스)는 사회심리학자다. 철학자가 이성과 직관 그리고 지혜로 ‘사유’한다면, 사회심리학자는 가설을 설정하고 ‘실험’한다. 궁극적으로는 과학적 탐구(실험과 통계)를 통과한 가설만을 ‘이론’으로 제시한다. 안정지향과 성취지향의 존재와 차이를 검증하기 위해 이들이 설계한 실험은 다음과 같다.(p.45~46)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 피실험자들에게 단어 만들기 문제를 냈다. 물론 그들의 동기를 조작했다.


“성취지향형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4달러가 지급될 것이고 70퍼센트 이상의 수행도를 보이면 1달러를 더 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정지향형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5달러가 지급될 것이고 70% 이하의 수행도를 보이면 1달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그룹의 수행 목표는 똑같이 70퍼센트다. 그리고 실제 수행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무작위로 좋은 소식 또는 나쁜 소식을 알렸다. 실험자는 각기 다른 소식을 들을 때의 성공 기대치와 동기 수준을 측정했다.”(p.45~46)


두 학자는 실험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성취지향 그룹의 사람들은 긍정적인 피드백을 들은 후 성공에 대한 기대치와 동기 수준이 높아졌지만 안정지향 그룹의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듣고도 성공에 대한 기대치가 달라지지 않았다. 동기 수준은 오히려 감소했다. ‘내가 잘하고 있나 보군, 걱정할 건 없겠어. 조금 긴장을 풀어도 되겠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한 경우, 다시 말해 부정적인 피드백은 들은 성취지향 그룹의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기대와 동기 수준이 낮아졌다. ‘음... 실망스럽군. 어차피 4달러를 받게 될 텐데 힘들게 애쓸 필요가 있겠어?’ 하고 생각했다.


반면 안정지향 그룹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들의 기대치는 급격히 떨어졌다. 지금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하리라는 걸 확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대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동기 수준은 급격히 상승했다! ‘안 돼! 이러다가 1달러를 잃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해!’ 이것이 안정지향 형의 생각이었다.”(p.46~47)


연구결과를 정리하자면, “성취지향형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탄력을 받는다. 낙관론과 자신감이 열정을 높이고 동기와 수행 수준을 치솟게 한다. 안정지향형의 사람들은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방어 태세를 갖춘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동기와 수행 수준을 높여준다.”(p.47) 이 주장에 적극 동의하거나 또는 이해되지 않거나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이 책은 무척 유용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와 대화의 질은 상대방의 동기부여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달렸다. 부모는 자식의 공부 의욕이 더 높아지길 바라고, 사장은 직원의 성과달성 의욕이 더욱 강해지길 바란다. 연인은 서로에게 건강한 자극을 선사하고 긍정적인 변화의 동력을 전하기를 원한다. 교육자는 보다 높은 의식으로의 동기부여가들이고, 리더는 공유비전으로 매혹하는 동기부여가다. 삶의 어디에서나 동기부여가 필요하고, 모든 일은 의욕을 요구한다.  


책의 핵심메시지는 명료하다.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아무런 동기나 열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더 많은 열정과 에너지를 끌어내려면 변화를 위한 자극과 적절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저자들은 안정지향형을 대할 때에는 다음의 명제를 기억하라고 권한다. “그들의 비관론을 인정해 주고, 격려의 말을 최소한으로 아껴두라.”


그리고 덧붙인다. “격려의 말을 건네고 싶더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란다. 그런 행동이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들에게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안정지향형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당신이 안정지향형이라면 이다음에 누군가가 ‘기운 내’라든가 ‘너는 분명히 잘할거야’라고 말하더라도 선한 의도만 가볍게 받아들여라. 당신은 스스로 뭘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p.54)


책은 성취지향과 안정지향의 구분에만 머물지 않는다. 훨씬 더 나아간다. 양육법, 사랑의 기술, 결정의 지혜, 정치적 견해 등 삶의 여러 영역에서 두 성향이 어떻게 다른지 고찰한 후 두 성향 모두에게 실용적인 조언도 건넨다. 역할모델을 소개할 때에도 두 성향을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제안하는 식이다. “성취지향적 성향을 높이고 싶다면 무하마드 알리를, 안정지향적 성향을 높이고 싶다면 마가렛 대처가 적절할 것이다.”(p.182)


책은 크게 두 챕터로 나뉜다. 1부는 두 성향의 구분에 초점을 맞췄다. 1부에서는 자기가 어떤 성향인지 파악하고, 삶의 여러 영역에서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2부는 다른 사람들의 의욕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지를 다뤘다. 1부가 심리학이라면, 2부는 심리학을 활용한 리더십의 기술이다. 책의 구성을 달리 표현하자면, 1부는 ‘너 자신을 알라’가 되겠다. 2부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대하라’의 실제적인 교훈들이다. 자기이해가 지혜의 시작이고, 공헌이야말로 배움의 완성임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구성이다.


인간의 성향 연구는 20세기 학문들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인간이 서로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탐구했다. 보편성과 전체성은 20세기의 추구가 아니었다. 20세기의 대표 철학자인 푸코는 평생 보편적, 일반적이라는 말조차 지양했다. 20세기엔 특수성과 개별성이 중요했다. 아도르노는 벤야민 전집을 간행하고서 자신의 동료를 이렇게 평가했다.


“벤야민은 특별한 것을 일반적인 것에 종속시키지 않고, 특별한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을 끄집어내서 추상화시키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벤야민 사유의 관건이었다.” 사람을 사유 대상으로 삼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사람들을 전체가 아닌 개인으로 대하라! 이것이 20세기의 시대정신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심리학과 리더십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지적 유산에 접속하려는 노력이다.(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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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깨달음의 이야기 보따리

-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 『할아버지의 기도』


나는 자주 글을 씁니다. 메모도 많이 하는 편이고, 어딘가를 여행할 때 사진도 적잖이 찍어대는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시집을 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고(실제로 80여편의 시를 쓰기도 했지요), 대학생부터는 언젠가 책을 내겠다는 목표로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도 즐겼습니다. 10년 동안 와우스토리랩의 리더로서 수업을 진행한 기록들, 수백 번의 강연을 하며 작성한 PPT 자료들, 책을 내기 위해 꾸준히 써 왔던 9편의 원고도 노트북의 폴더로 가지런하게 정돈해 두었지요. 그러다가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2011년 1월 19일, 노트북 하드디스크에 문제가 생겨 저장된 데이터를 모두 날려버린 겁니다. 복구를 제일 잘 한다는 회사에서 두달 동안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였습니다. 많이 울었고 힘겨웠습니다. 3월 17일에 살릴 수 없다는 최종 통보를 받고서 느낀 허탈감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자료를 백업해 두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항상 백업을 해 오다가 사고가 발생하기 6개월 전에 백업 자료를 모두 지웠거든요. PC를 사용해 온 15년 동안 외장하드가 아닌 하드디스크가 말썽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백업하는 시간이 아까웠던 겁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통째로 잃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가장 힘겨웠던 실연의 경험과 맞먹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보다 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연 의뢰가 들어올 때마다,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모든 자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억울해했습니다. 그 때 나에게 많은 위로를 건네 준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할아버지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책의 메시지는 내 영혼에 위로와 (순간적이긴 하지만) 평안을 주었고, 마음을 만져 주었습니다. 새로운 비전을 얻기도 했지요. 나를 가장 깊이 위로해 준 이야기는 ‘차이 만들기’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일부를 줄여서 전해 볼께요.

 

한 노인이 바닷가를 걷다가 파도에 쓸려 온 수백 마리의 불가사리를 보았다. 그는 뜨거운 태양볕 아래에서 말라죽어가고 있는 불가사리를 한 마리씩 집어 바다로 던지기 시작했다. 노인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한 젊은이가 다가와 말했다. “할아버지,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이 많은 불가사리를 언제 다 바다에 넣어주려고요. 세상에는 이런 바다가 몇 천 개도 넘고, 내일이면 수많은 불가사리가 다시 파도에 밀려 올 거예요. 단지 몇 마리를 바다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젊은이는 떠나가고 노인은 집어올린 불가사리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것을 바다로 던지며 중얼거렸다. ‘적어도 이 한 마리에게는 차이가 있지.’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나는, 잃어버린 파일들을 되살리는 일을 진행하고 있었지요. 누군가와 공유한 파일을 되돌려 받고, 혹시라도 외부장치에 저장해 둔 것이 없나 확인하고, 보낸 메일에 첨부한 파일을 하나하나 체크하는 일이었습니다. 성과는 지지부진했죠. 이렇게 시간을 들여도 잃어버린 것의 1%도 복구할 수 없다는 생각, 수많은 파일을 잃어버렸는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었지요. 매일매일 기록했던 시간사용내역이나 일기, 여행 중 녹음한 기록 등은 되살릴 수 없는 자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나의 노력은 정말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내게 노인의 말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의미가 있었지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상실을 이겨내는 데에 도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것들이 떠오르면 되찾은 것들이 너무나도 하찮게 보여 허탈해지곤 했지만, 새롭게 찾아낸 하나하나의 파일도 소중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더 이상 내게 있지 않은 것들보다 내게 남겨진 것들에게 시선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잃은 것도 많지만, 남겨진 것들도 많았습니다. 나의 경험들,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삶 그 자체.

 

좋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 꿈과 에너지를 줍니다. <할아버지의 기도>는 좋은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사랑을 회복하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는 일, 상실과 화해하고 강인한 영혼으로 성장하고 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쉼을 누리고 평안을 얻는 일, 삶의 신비를 이해하는 일, 가슴이 따뜻한 전문가가 되는 일. 우리가 이런 일들을 잘 해내도록 돕는 이야기들입니다. 저자인 레이첼 나오미 레멘은 25년 동안 중병을 앓는 사람들을 만나 온 탁월한 상담가입니다. 그녀의 삶이 하나의 좋은 이야기이고, 그녀의 상담 현장도 감동적인 이야기보따리입니다. 그녀는 영혼을 만져주는 의사입니다. 달콤한 이야기로 우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 주는 사기꾼이 아님은 다음의 구절에서 알 수 있지요.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큰 상실의 고통을 체험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상실의 고통 안에 큰 의미가 깃들어 있으며 그것이 은총에 의해 놀라운 방향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스피린이 통증을 완화시키듯이 영적인 성장이 상실의 고통을 없애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 자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고통이 조금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상실 그 자체는 영원히 지속된다.”

 

상실은 아름다운 체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아픔을 공감하기도 전에 조언이나 하려는 사람들, 모든 경험에는 배울 것이 있다는 이유로 위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싶습니다. 상실은 아름답지 않지요. 상실을 딛고 강인한 영혼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노력과 삶의 결실이 아름다운 것이지, 그들이 지나온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레이첼은 상실의 과정이 슬프고 비참하다고, 그 과정을 지나는 것은 힘겨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깊은 위로를 받으면 내면에서 기운이 소생하는 걸까요?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 일어설 기운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지혜를 빌어, 현실과 비전을 모두 인식한 덕분입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이들의 심정을 위로하는 동시에 다시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언젠가 삶이 힘겨울 때면, 나는 다시 그녀의 책을 읽을 겁니다.


- 온 마음을 다해... 고마워요, 레이첼. (201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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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답변하셔야 합니다. 몇 살입니까?"

"삼백서른일곱 살이에요."

답변을 한 에밀리아는 무려 337살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발명한 묘약을 마신 후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체코의 국민 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의 주인공 말입니다.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동요합니다. 묘약은 그녀의 후손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비테크라는 청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그 약을) 공공의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인에게, 전 인류에게 주어야 합니다. 모두가 똑같이 생명을 누릴 권리가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 우리 삶은 너무 짧아요! 인간으로 지낼 시간이 이토록 짧다니! 상상을 해 보세요, 이 인간의 영혼, 지식을 향한 갈망, 사람의 두뇌, 과업, 사랑과 창조성 이 모든 걸 말입니다. 맙소사, 그런데 예순 평생 인간이 성취하는 게 대체 뭡니까? 뭘 배우죠? 무엇을 즐기고? 자기가 심은 나무의 결실을 손수 수확하는 일이 없어요.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알던 지식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단 말입니다. 모든 과업은 미완으로 남겨 두고 어떤 전례도 남기지 못합니다." 그의 하소연은 이어집니다.

 

"우리는 짐승처럼 죽습니다. 맙소사, 삶 이후에 뭐가 찾아오죠? 영혼의 불멸이라는 게 뭡니까? 고작 우리 삶이 너무나 짧다는 사실에 맞서 절박하게 질러 대는 절규일 뿐이잖습니까! 인간은 이 짐승 같은 수명을 수긍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단명을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너무 부당해요. 인간은 거북이나 까마귀보다 더 나은 존재란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삶의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는 이제 웅변조로 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논합니다.

 

"만인에게 3백 년의 생을 선사하도록 합시다! 창조 이후 가장 위대한 일이 될 겁니다! 해방! 인간은 완벽하게 새로이 재창조하게 될 겁니다. 맙소사, 3백 년 동안 우리가 이룩할 수 있는 과업들을 생각해 봐요! 어린 학생과 교사는 50년 동안 공부를 하고! 50년 동안 세계와 그 속의 만물을 발견하는 겁니다! 1백 년은 유용한 노동에 바치고, 그렇게 모든 걸 다 익히고 나면 나머지 1백 년은 지헤로 지배하고, 가르치고, 선례를 남기는 겁니다. 인간의 삶이 3백년 동안 지속되면 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귀중해질지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급할 일도 없고, 두려울 일도 없고, 이기적일 이유도 없겠죠."

 

스무 살 청년들에게는 어찌 들릴지 모르겠지만, 두번째 스무살을 눈앞에 둔 제게 이 청년의 주장은 어딘가 나이브한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337년을 살아온 주인공은 제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명료하게 반박합니다. "그렇게 오래 사는 건 옳지 않아! 1백 년, 130년까지는 괜찮을지 몰라. 그 후로는 영혼이 속에서 죽어 버려. 자기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아무것도. 그냥 이 공허함뿐. 베르티, 내가 노래할 때 내 몸이 얼음처럼 차갑다고 했지. 봐라, 삶이 의미를 잃은 지 오래인데도 예술적 기술은 그 의미를 보존하고 있어. 그저 일단 터득하고 나면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지."

 

기술은 몸에 체득되어 있지만 삶의 의미를 잃은 인생을 한탄합니다. 이어 에밀리아는 부러운 어투로 말합니다. "당신네들은 만물에 가까워요. 모든 게 뭔가 의미를 갖고 있죠! 얼마 안 되는 당신네 인생에서는 만물이 값어치가 있으니, 당연히 한껏 누리며 사는 거예요. 당신네들은 모든 걸 믿잖아. 사랑, 자기 자신, 명예, 진보, 인간성, 모든 걸! 맥시, 당신은 쾌락을 믿잖아. 크리스티나, 너는 사랑과 신의를 믿지. 프루스, 당신은 권력을 믿어. 비테크는 자기가 하는 온갖 헛소리를 믿고. 모두 다, 모두가 뭔가를 믿고 있어. 얼마나 멋진 삶이야." 

 

이 말이 가슴을 쳤습니다. 무언가를 믿었던 날들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신을 믿었고 인생의 행복을 믿었던 지난 날들이...! '믿는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사랑을 믿고, 우정을 믿고, 무엇보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 말입니다. 이제 에밀리아는 자신의 무감각해진 모습을 설명합니다. "아무도 3백 년 동안 사랑할 수는 없어. 아니, 희망할 수도, 글을 쓸 수도, 노래할 수도 없어. 3백 년 동안 눈을 똑바로 뜨고 살 수는 없는 거야. 견딜 수가 없으니까. 모든 게 차갑고 무감각해져."

 

나는 살아 숨쉬는 삶에 대하여,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희곡을 사랑합니다. 에밀리아의 말이 얼마나 깊은 지혜인지는 모르겠네요. 글이라면 3백 년 동안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아직 살아보지 않은 260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세월은 강산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변화시키고요. 제게 이 희곡은 보다 '오래 지속되는 삶'이 아니라 '청춘 예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리 생각한 구절을 옮겨 적으며 글을 맺습니다.

 

"우리 늙은이들이 너무 많이 안다고 했지. 그렇지만 당신네들을 훨씬 더 많이 알아. 이 바보들아. 훨씬,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사랑도, 위대함도, 목표의식도 알잖아. 여전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잖아! 이 이상 바랄 나위가 없잖아!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무감각하고, 얼어붙은 채로 계속,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해. 세상에, 더는 못 하겠어. 맙소사, 이 고독이라니!" 이렇게 말하는 에밀리아는 무려 337살입니다. 아마 그녀에게는 70, 80살도 청년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 카렐 차페크, 김선형 역, 『곤충 극장』(마크로풀로스의 비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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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인류 공존의 담론까지 읽어야 할까

-『문명, 그 길을 묻다』를 읽고

 

"쉴 틈 없이 일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도 그랬고, 2만 달러에서 IMF와 함께 곤두박질칠 때도 다시 그 고지를 넘어야 한다고 힘을 모았다. 이제는 2만 5천 달러를 넘어섰다. 그런데 성장의 열매인 행복한 미래는 만기가 자동 연장되는 이상한 적금 통장이 된 것 같다. 질 높은 교육 혜택, 쾌적한 주거 환경, 맑은 공기, 푸른 공원의 시대는 언제 오는 걸까? 아니면 이런 숫자와는 상관없이 서로 비슷비슷하게 고생도 하고 절약도 하고 먹을 걱정을 덜어냈다며 조금씩 여가를 즐기던 20여 년 전이 더 실질적인 풍요를 누렸던 건 아닐까?"

 

『문명, 그 길을 묻다』의 저자 안희경 씨가 프롤로그에서 던진 물음입니다. 그녀는 의문도 토로합니다. "국내총생산과 국민총소득의 숫자가 높아진 동시에 빈부의 차이와 우울한 국민도 함께 늘어나는 이 진행 방향을 성장과 발전이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책의 집필 동기가 선연히 드러납니다. "현재의 상태를 제대로 아는 것이 곧 대책을 실천하는 지식이다. 그렇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 범위를 알고 나아갈 좌표를 찍기 위해 다시 짐을 꾸렸다. 이 문명이 살 길은 어디인지, 길은 있는지에 대해 묻고자 인터뷰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인류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릴레이 인터뷰는 과감하게 진행됩니다. 세계 지성의 최고봉에 있는 거장 11명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서두에 등장하는 세 명부터 소개하자면, 무려 재레드 다이아몬드,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입니다. (책에는 지그문트 바우만, 하워드 가드너, 웬델 베리 등도 등장합니다.) 우선 이 면면들을 한 지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경향신문에 연재했다는 점과 저자의 방송국 PD 경력 등이 도움되었으리라 예상되지만, 인터뷰를 성사시킨 저력이 궁금했는데, 책장을 펼치니 궁금증을 잊을 만큼 책의 내용에 빠져들었습니다. (대개 비결은 "만나고 싶습니다"는 정공법인 경우가 많더군요.)

 

연재 당시에는 전형적인 Q&A 형식으로 진행된 인터뷰였는데, 책에서는 인터뷰어의 질문과 배경지식을 자연스럽게 지문으로 풀어냈고, 지성인들의 목소리만을 인용문으로 고쳐 썼습니다. 장단이 있겠죠.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현장감이 떨어진 대신 인터뷰어의 추가 설명이 책의 이해를 돕고 따옴표로 표시된 인터뷰이(지성인)의 말들에 집중할 수 있더군요. 재레드 다이아몬드와의 대화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이를 원래의 기사와 비교해보셔도 좋겠고요. (경향신문 연재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312345125&code=210100&s_code=af141)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013년 4월 보도에서 '1000년 이내에 인류는 생존을 위해 지구를 떠나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우주로 나아가야 하며, 점점 망가져가는 지구를 떠나지 않고서는 인류의 새천년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호킹의 주장에 대해 인자하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단호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스티븐 호킹은 틀렸어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1000년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아요. 단지 50년 뿐입니다. 우리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한 문제를 풀든지, 아니면 완전히 망치든지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 말이죠. 두번째, 이 별을 망쳐놓고 다른 별을 찾겠다고요? 이것은 답이 아닙니다. (중략) 이런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말하기보다는 지금 우리별을 망가뜨리는 모든 일을 중단하는 데 온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p.21)

 

스티븐 킹과 재레드 다이아몬드, 두 지성의 견해 충돌이 짜릿하기도 하고, 관련 주제에 대해 이해를 높이는 대목입니다. 책에는 이런 대목이 여럿 등장합니다. 이는 저자의 서술이 가진 미덕 덕분이겠죠. 제가 '모리의 방식'이라고 부르는 글쓰기가 있는데, 필자가 학생의 입장이 되어 현자에게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방식을 말합니다. (필자 대신 스토리의 주인공이 등장할 수도 있고요.) 『모리와 함께하는 화요일』에서 미치 앨봄이 보여준 서사적 특징을 말하는 겁니다.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켜 배움을 효과적으로 일으킨다는 점에서 저는 이런 방식을 글쓰기 수강생들에게 종종 추천하죠. 에세이가 그렇듯이 인터뷰도 섬세하게 인터뷰어의 고유성이 살아나는데, '모리의 방식'이라 부를 법한 이러한 서술적 방식이 책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어려운 얘기가 나오면 저자가 설명하고, 한국적 상황을 소개하면서 책이 진행됩니다. 인터뷰이의 사상을 소개한다는 대명제를 헤치지도 않고요.

 

재레드 다이아몬드 photo by 안희경 (출처 : 경향신문)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에너지 소비 자체를 줄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규제 강화와 정부와 거대 기업들의 현명한 정치적 선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1퍼센트가 권력을 쥐고 자신들의 행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나머지 99퍼센트는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폭동은 점진적으로 혁명이 되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리더의 임무가 중요합니다. 리더의 역할은 사회의 안녕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모두가 안녕해야 해요. 1퍼센트만 안녕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내용이 경향신문에 게재되었을 때 '현재의 빈부 차이와 갈등을 가지고 혁명까지 경고하는 메시지는 조금 지나쳤다'는 반응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소 안일하고 무감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억압받고 가난했던 성직자와 귀족이 아닌 제3신분의 소요가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도 없었을 테니까요. 위기론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추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가난한 이들이 투쟁을 일으킨 사례로 소말리아 해적과 LA에서 일어난 두 번의 폭동을 들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인터뷰는 위기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과장이 아닌 현실 진단에 의한 제안이라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귀담아 들어야겠지요.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위기감을 느낄 때에야 비로소 변화를 선택하니까요. 하지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또 다른 상황이 있습니다. 가슴 속에 신념이나 비전을 품은 경우입니다. 두번째 인터뷰의 주인공 제레미 리프킨 역시 인류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견해이지만, 보다 희망적입니다. 우선 리프킨의 문제의식부터 보시죠. 

 

"우리는 지금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는 실제 상황이에요. 우리는 기후 변화가 왜 끔찍한지에 대해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중략) 4억 5천만년 동안 지구는 다섯 번의 멸종기가 있었습니다. 모두 온도 변화 때문에 일어났어요. 과학자드른 이제 여섯 번째 멸종기에 돌입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번 세기가 끝나는 시점에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 종 가운데 60퍼센트가 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싹쓸이라고 봐야 합니다. 생명의 다양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대 1천 만년은 걸립니다."

 

위기론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끝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저자가 다이아몬드의 50년 위기론을 언급함으로 인터뷰를 시작했기에 마지못해 언급했는지도 모르죠. 리프킨은 대안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할 만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3차 산업혁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학문적인 단계에서 실용적인 단계로 넘어왔어요. 전 유럽연합 의장, 독일의 메르켈 총리, 프랑스의 올랑드르 대통령, 그리고 중국의 리커창 총리가 재생에너지 사용으로의 전환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였어요." 책에는 유럽과 중국이 어떻게 새로운 산업혁명에 참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중국의 참여가 놀라운데, 중국 지도자 중 한 명은 "우리는 1차 산업혁명도 놓치고, 2차 산업혁명도 놓쳤어요. 그렇지만 3차 산업혁명은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3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는 재생 에너지, 수평적 권력, 지속가능한 경제 등 입니다. "석유, 석탄, 우라늄은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반면 재생 에너지는 모든 사람의 집 마당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햇빛은 매일 반짝이고 바람은 온 세상에서 불어오죠. 땅에서는 지열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숲에서는 바이오메스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갖고 있죠? 이제 우리는 개인 발전소까지 갖게 되는 겁니다." 발전소를 갖게 된다는 말은 개인이 에너지를 만들고, 소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3차 산업혁명에 뛰어난 나라와 기업들이 많다는 사실이 참 고무적입니다. (프랑스 최대의 전력회사 EDF, 한국의 LG CNS 등)

 

안희경 씨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크게 논란이 일었던 고리 핵발전소 폐기 문제와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리프킨은 "이미 결론이 난, 시대에 뒤떨어진 안건을 왜 다시 끌어내는지 답답한" 눈치였지만, 우리의 사정이 이러하니 저 역시 몹시 궁금했기에 저자의 질문이 매우 반갑더군요. 리프킨의 답변도 명쾌했습니다. 송전탑은 민주적인 방식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의 이득을 위한 것이다, 송전탑이 설치되는 지역 주민의 희생을 강요한다, 핵발전소의 유용성은 끝났다 : 핵폐기물 묻을 곳이 없고, 핵발전소가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세계에서 필요한 에너지의 6%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냉각수도 없다. 이것이 리프킨의 주장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이어서 답변도 제시했고요.

 

"도대체 한국은 왜 비싼 핵발전을 사용하려는 거죠? 모든 사람이 다 생산할 수 있는 공짜 전기가 있는데요. 핵발전은 몇몇 회사에게만 이득이 돌아갑니다. 우리는 모든 사회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조합으로 소유할 수 있는 우리만의 에너지를 생산해야 합니다. 지금 독일이 하는 것처럼 말이죠. 모든 한국인이 자기 집 마당에서 에너지를 만들 수 있을 때 이를 'power to the People' 즉 '국민에게 권력을 쥐어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에너지 민주화를 통해 가능합니다."

 

제레미 리프킨 photo by 오소영 (출처 : 경향신문)

 

리프킨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떨렸습니다. 지속 가능한 경제를 위한 3차 산업혁명에 대하여 리프킨이 신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과 방법론 그리고 이미 실천의 영역에서 세계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전율시키는 비전을 품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전율시키는 삶을 살아감을 리프킨을 통해 느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 책 『문명, 그 길을 묻다』를 권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현우 선생의 추천사가 딱 제 마음이었거든요.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고 우리의 문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평소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곤란과 애로에 허덕이며 자기 앞가림에 바쁘다. 세상을 고민하는 일 따위는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

 

먹고 사는 일에 바쁜 우리들이 거대 담론을 다룬 이 책을 읽어야 할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무능하고 기업이 탐욕에 빠져 있다면, 희망을 일구어내는 일은 시민들의 몫이니까요. 나는 최근 영화 <암살>을 감동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도둑들>을 만든 최동훈 감독의 작품이란 말인가, 하고 놀랐고요. 영화는 대중적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역사의식, 시민의식을 상기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총체성이 아닌 출몰성의 의미에서) 영화 감독이 예술인이 된 경우입니다. 좋은 영화지만, 우리가 영화를 곱씹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영화의 반향은 급격히 소멸할 겁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쥐어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는 일에 바빠 문명의 행보에 관심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더욱 더 탐욕스러운 이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내어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게는 이 책을 일독할 가치가 충분해졌습니다. 

 

최근 읽은 훌륭한 책이 여럿 있지만, '과연 이 책을 그(녀)가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에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는 바람에 최근에 책 얘기를 거의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신이 났습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읽고서는 누군가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어졌고, 재레미 리프킨을 읽고서는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네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 있겠냐마는, 저는 이 책을 여러 사람들에게 권해야겠습니다. 저와는 별개로 여러분들은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 권의 책 값이 두 사람 식사비 정도로 올랐으니까요. 소중한 사람과의 식사만큼 한 권의 독서가 의미있을까? 이 질문에 예스라고 답할 수 있다면 지갑을 열어야겠지요. 경향신문에서 인터뷰부터 읽어도 되겠습니다.

 

안희경 씨는 지금 또 다른 테마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음 전문가들과의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네요.) 그녀의 행보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회의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현실이 어두워도 외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적 이상주의자의 관점으로 여러 현안에 다가서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녀의 삶에서 열정과 배움이 베어나기도 하고요.『문명, 그 길을 묻다』를 읽으며 이렇게 느끼고 나니, 그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책장에는 그녀가 번역한 『붓다의 시간관리』도 보이네요. 무엇이든 읽는 대로 리뷰를 남겨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책을 더 읽지 않는 비독서의 계절, 가을이 와서일까요. 제가 독서를 권하고 있네요.

 

* 안희경, 『문명, 그 길을 묻다』, 이야기가있는집, 2015

 

Posted by 보보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선택의 상황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분들로부터 카페 운영을 함께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서, 나는 그렇게 몇 주 동안을 고민했습니다.

 

고민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떤 선택이 현명한 것인지 몰랐으니까요. 나는 선택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책장을 살폈습니다. 선택과 결정에 관한 책을 여러 권 갖고 있으니까요. 헤아려 보니 일곱 권이더군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잘못된 선택은 대가를 치른다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 선택에 관한 좋은 책을 모아 온 덕분입니다. 좋은 선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관해 이론적으로 설명한 책이 있는가 하면, 선택의 기술을 실용적으로 다룬 책도 있습니다.

 

『넛지』는 행동경제학의 이론으로,『탁월한 결정의 비밀』은 뇌신경과학의 이론으로 선택을 다룬 탁월한 책입니다. 두 권 모두 각 분야의 대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작품들이지만, 두 권 모두 400페이지 정도의 두꺼운 분량입니다.

 

나는 이 책들을 진득하게 읽어낼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주요 내용을 알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집어든 책은 스펜서 존슨의 『선택』입니다. 좋은 선택이 이뤄지는 일련의 절차를 정리하여 나의 상황에 대입하는 것이 이번 책읽기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두꺼운 두 권의 책도 워낙 훌륭한 책들이니 『넛지』는 서른 일곱번째 도서로 소개드릴 터이고, 『탁월한 결정의 비밀』에 대해서는 핵심 메시지를 한줄로 요약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탁월한 결정은 신중한 숙고도, 순간 판단력도 아닌 '감정과 이성의 황금 비율'에서 나온다." - 조나 레러

 

물론 그 비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비율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생의 지혜를 얻는 과정은 운동을 하는 것과 비슷해서, 한 번 듣는 것으로가 아니라 거듭 연습함으로 얻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방법론을 스펜서 존슨의 책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스펜서 존슨은 통찰력과 필력을 모두 지닌 작가입니다. 특히, 빛나는 지혜가 담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작가로서의 강점입니다. 전작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과 『선물』을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이번 책 역시 나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늘 가장 좋은 결정을 할 필요는 없다네. 단지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되지. 그렇게 계속 더 나은 결정을 찾아가다 보면 결국 좋은 결정을 하게 될 게야."

 

책은 초반부에서, 저자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게 만들어 항상 훌륭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어주었습니다. 이어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실제적인 질문과 개인적인 질문을 3개씩 알려줍니다.

 

실제적인 질문 3가지는 이성을 발휘하여 선택하는 데에 필요한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개인적인 질문 3가지는 직관을 발휘하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과정입니다. 스펜서 존슨은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의 조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 레러의 핵심 주장과 똑같지요.

 

상황을 파악하게 만드는 실제적인 질문 3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2. 정보를 모아 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는가?

3. 미리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가?

 

원하는 것(want)이 아니라 정말로 필요한 것(need)만을 추구할 때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더 몰입하여 책을 읽었습니다. 실제적인 질문 3개만으로도 선택이 수월해지지만, 개인적인 질문 3가지는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더해 줍니다.

 

1. 내가 하는 결정은 나 자신에게 진실한가?

2. 나는 내 직관을 믿는가?

3. 나는 더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가?

 

진실을 외면하면서 좋은 결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빨리 받아들일수록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택을 하는 과정이 기분 좋게 진행되면 좋은 결정일 확률이 높습니다. 선택의 과정에서 자신이 좋은 결정을 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게지요.

 

지속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하려면 자신이 더 좋은 것들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어. 사업에서도 개인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도 우리는 자주 그런 진실을 부정하지.“ (p178)

 

6가지 질문이 책의 핵심이긴 하지만, 저자의 지식을 전부 전해 드린 것은 아닙니다. 책은 6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지식까지 담고 있으니까요. 이를 테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법,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한 정보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법, 진실을 알아내는 빠른 방법 등을.

 

책의 판형은 작고, 활자는 크고, 분량은 200페이지 남짓 밖에 안 됩니다. 게다가 한편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될 것이고, 단기간에 선택에 관한 지혜를 얻어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 제격인 책입니다. 선택에 관한 지혜에서부터 실천지침까지 알려주니까요.

 

이 책을 읽고서, 카페 운영 제안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문한 덕분입니다. 결정하고 나니 홀가분했습니다. 한 권의 책이 홀가분한 기분과 좋은 선택을 안겨다 주다니요! 놀랍지만 당연한 일입니다. 책에는 힘이 있으니까요.

 

- 읽는 대로 실천하는, 연지원. (2012. 8月)

 

Posted by 보보

저는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고서, “설명하거나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마리의 매력”에 빠졌다며 호들갑 떠는 서평을 썼습니다. 그것은 서평이 아닌 감상문이었습니다. 해석은 하지 못한 채로 마리에게서 느낀 친밀감과 감상만을 잔뜩 늘어놓았으니까요. 사실은 찬미였습니다. 에세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형식미에 대한 감탄!


인물을 그려내는 표현력과 서사를 꾸려가는 감각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감탄하고 찬미하느라 해석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탄탄한 서사에 몰입하느라 생각하고 음미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긴 에세이인데, 라면 면발처럼 후루룩 마셔버린 느낌입니다. 어쩌면 나는, 서평은 가급적 (혹은 반드시) 해석을 포함해야 한다고 믿어왔기에 글을 쓰는 게 힘겨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64년, 수잔 손택은 자신의 예술론과 비평론을 담은 에세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비평이 반드시 해석을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예술작품은 본원적으로 그 내용”이라는 기존의 사고를 비판합니다.


“예술작품을 (현실을 그려내는) 그림 모델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예술가의 진술로 간주하는) 진술 모델로 이해하든지 간에, 여전히 내용이 우선이다.” 손택은 내용을 중시하느라, 형식의 간과를 비판한 겁니다.


“내용을 과도하게 강조한다는 것은 결코 완성되지 않을 비평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의 호전성을 지적하며, 그 호전성은 특히 문학에서 한층 더 극성이라고 말하는 수잔 손택! 그녀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강조한 것은 감성의 회복, 투명성 추구, 비평의 기능 인식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과 비평)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손택의 주장에 열광합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를 읽고서 해석은커녕 잘 읽고 잘 느낀 것에 그친 나를 손택이 위로해 주어서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런 이유로 열광한다면 손택을 오해한 것입니다. 손택이 예술작품의 불가해성을 주장한 건 아니니까요.


“나는 예술작품이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지 않는다거나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이다.”


제가 손택을 찬미하는 까닭은 그녀가 빛나는 지성과 놀라운 감수성을 모두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자주 따라붙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라는 다소 모호한 칭호를 설명하자면, ‘지성미가 깃든 감수성’일 겁니다. 감성과 이성을 함께 지니기란 힘듭니다. 성격심리학에서 감정형과 사고형이라는 서로 다른 기질로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녀는 예술을 사랑합니다. 영화, 연극, 문학을 열렬히 사랑합니다. 비평은 그녀가 예술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비평하되, 지성과 감성으로 비평합니다. 그녀는 지성을 빌어 비평 기준을 확립했겠지요. (아름답다고 판단내린 예술작품을 향한) 지고의 숭배자가 되는 것은 감성 덕분일 테고요. 손택의 아들은 ‘숭배’를 어머니의 제2의 천성이라 불렀습니다.


<우울한 열정>은 손택이 숭배하고 찬미한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7편의 지적인 에세이를 묶은 책인데, 5명의 사상가나 작가(폴 굿맨, 엘리아스 카네티,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앙토냉 아르토) 그리고 2명의 영화감독(리펜슈탈, 지버베르크)을 다뤘습니다.


책은 우선, 손택이 열렬한 추종자임을 보여 줍니다. 누군가를 존경하기 시작하면, 그에게 흠뻑 빠져듭니다.

“오래전부터 폴 굿맨은 나의 영웅이어서 그가 갑자기 유명해졌을 때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라는 인간의 존재를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걸 보면 항상 의아했다. (중략) 나는 1년 안에 그의 책을 전부 구해 읽었고 그 뒤로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빠져들었기에 가능한, 아니 빠져드는 것만이 아니라 예리한 지성을 지녔기에 가능할 법한 인물 묘사를 보여줍니다. 섬세하고 정확하고 날카로운 분석력이 깃든 진술들을.


“롤랑 바르트는 꼼꼼한 독서가였지만 왕성한 독서가는 아니었다. 자기가 읽은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글로 썼으므로, 그가 글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마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많은 프랑스 지식인처럼(그가 사랑한 지드는 예외다), 그도 비세계적이었다. 그는 외국어를 몰랐고 외국 문학은 번역된 것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가 건드린 유일한 외국 문학은 독일 문학일 것이다.


손택이 직접 책에서 <우울한 열정>을 숭배하기 위해서 썼다고 밝힌 것은 아니지만(저자 서문이나 후기도 없고요), 아들의 말, 폴 굿맨 숭배를 짐작케 하는 대목 그리고 롤랑 바르트를 설명한 대목에서,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숭배와 찬미임을 느낍니다.


“이반은 내가 폴 굿맨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폴 굿맨이 미국에 살면서 건강하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강렬한 기쁨을 느끼면서도, 나 자신이 폴 굿맨과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눈곱만큼도 그와 교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바르트의 글은 모두 논쟁적이다. 그렇지만 그의 기질 가장 깊은 곳의 충동은 호전적인 것이 아니라 찬미하는 것이다. (중략) 바르트는 찬양하고 자신의 열정을 나누는 데 더 관심을 갖는다.”


바르트를 향한 손택의 설명 중에서 찬미에 관한 서술은 손택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제가 <우울한 열정>을 그녀가 ‘숭배’한 예술가들을 다룬 에세이라 말한 까닭이고요. 그래서 저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에세이 중에 발터 벤야민을 묘사한 표현이 ‘우울한 열정’인데 책 전체를 대표하기엔 적합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게 대안이 있는 건 아니고요.


문학, 영화, 비평에 관해 무관심한 분들이 읽기엔 다소 어려운지도 모르겠군요. (아마도 어려운 게 아니라 낯선 것일 테지만.) 누군가에겐 술술 읽히지 않더라도, 내게는 흡입력과 깊은 의미를 안겨준 책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글을 쓸 때, ‘균형’과 ‘깊이’를 깃들인다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거든요. 두 가지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책장을 덮습니다.


지성으로 판단하여 감성으로 찬미한다(균형)!

흠뻑 빠져들어 그의 전부에 접근한다(깊이)!


- 크리스마스 이브를 손택과 함께한, 조르바. (2013. 12. 24)

Posted by 보보

허균의 <한정록> 제2권을 읽었습니다. 노장의 학문을 좋아하여 예법을 무시하고, 속세를 피해 죽림에 모여 제멋대로 살았다 해서 ‘죽림칠현’이라 불렸던 이들의 고사(古事)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책의 첫머리에 다짜고짜 등장합니다. 이야기의 전문을 옮겨 봅니다.

 

혜강, 완적, 산도, 유영이 죽림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왕융이 늦게 왔다. 완적이 이죽거리며 말하였다. “속물이 또 와서 흥이 깨졌다.” 그러자 왕융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도 흥이 깨질 때가 있는가?”

 

이야기는 끝입니다. 이게 뭐야? 나의 첫 반응입니다.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책 내용은 계속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고사도 짤막한데, 나를 황당하게 만들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혜강은 성품이 대장장이 일에 잘 맞았다. 집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매우 무성했는데, 그 주위에다 물을 끌어 둘러놓고 여름철에는 그 아래에서 대장일을 하였다.

 

이렇게 끝납니다. 다음 고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재미도 감동도 얻지 못했습니다. 국문학사상 최초의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선생은 도대체 무슨 의도로 <한정록>이라는 책을 썼을까요? 나와는 뭔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 책을 덮어버리면 그만인 걸까요?

 

허균 선생의 인생관이 어떠한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직감할 뿐이었습니다. 선생의 인생관이 나와는 다르더라도 그것 자체로 훌륭한 것일 수도 있고, 내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균 선생은 <한정록>의 머리글에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해 두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라 찬찬하지 못하였고, 부형이나 스승 또는 훈장이 없어서 예법 있는 행동이 없었다. 또 조그마한 기예는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하지도 못하면서도 스물한 살에 상투를 싸매고 과거를 보아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경박하고 거침이 없는 행동에 당대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나는 마침내 노장이나 불교 같은 데로 도피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일 되어가는 대로 내맡기어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42세 때의 글입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지만 공업은 아직 이루지 못했음을 두고 슬퍼했습니다. 선생의 글은, 멋지게 살았던 선인들의 인생을 향한 동경으로 이어집니다.

 

“제일 멋지게 산 저 당의 사마승정처럼 산과 계곡에 마음과 뜻을 자유롭게 팽개쳐놓지도 못했고, 그 다음으로 멋지게 산 양나라 도홍경처럼 자녀의 혼인을 끝내고 멀리 유람하거나 관직을 사직하고 여행을 떠나지도 못했으며, 그들보다 못하지만 당의 백거이처럼 벼슬을 하다가 자연 속으로 돌아와 정회를 푼 것과 같이 하지도 못하였다.”

 

<한정록>은 이런 생각을 하던 즈음에 쓴 책입니다. 선생은 사십 평생의 삶을 회한으로 되돌아보는 동시에 앞날을 어떠한 인생관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며 선인들의 글을 읽었습니다. <세설신어>, <고사전>, <하씨어림> 등의 책을 읽으며 가려 뽑아서 책을 만들어 <한정록>이라 명했습니다.

 

<한정록>은 입신양명을 돕는 책이 아닙니다. 선생이 멋진 삶이라고 꼽았던 사마승정이나 도홍경 그리고 백거이의 삶을 동경하거나 추구하고 싶을 때 펼쳐야 하는 책입니다. 내게 필요한 책이었습니다. 내 안에는 두 가지의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욕망과 여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

 

두 가지의 욕망은 서로 배타적입니다. 하나의 추구가 다른 하나를 방해한다는 말입니다. 성취하려 들수록 내 삶의 여유는 줄어듭니다. 나는 더 이상 삶의 조바심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좀 더 여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정록>을 읽어야겠다고, 내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정록>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 계기도 있었습니다. 허균 선생은 불교와 도가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유교의 경전 <논어> 덕분에 <한정록>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논어>의 옹야편에는 유명한 ‘지호락(知好樂)’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어느 인문학자는 “맹자의 앎, 공자의 좋아함, 도연명의 즐김”이라는 말로 공자의 지호락 비교론을 풀이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인생을 사는 데에는 예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를 중시하느라 자신의 흥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인 도연명의 ‘즐김의 경지’에서는 유가에서 배운 교훈과는 다른 유형의 배움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다시 <한정록>을 펼쳐 들었습니다.

 

혜강, 완적, 산도, 유영이 죽림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왕융이 늦게 왔다. 완적이 이죽거리며 말하였다. “속물이 또 와서 흥이 깨졌다.” 그러자 왕융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도 흥이 깨질 때가 있는가?”

 

완전히 새로운 독서체험이었습니다. “자네들도 흥이 깨질 때가 있는가?”라는 말에서 죽림칠현들의 즐기는 삶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습니다. <한정록>의 다른 부분들 역시 제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처음에는 숨어사는 행복을 다룬 구절만 와 닿았는데, 이제는 책의 거의 모든 대목에서 감동하고 배웁니다.

 

죽림칠현 중 유영과 같은 인물은 집에서 옷을 홀딱 벗고 지내는 등의 예법에 어긋난 흥으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흥을 추구하느라 예법을 어긴 인물이나 예법을 지키느라 흥을 잃어버린 인물 모두 서로 다른 극단의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예를 품은 흥’을 만끽하며 살고 싶습니다. 예를 지키며 흥에 취하는 경지를 살고 싶습니다. 지금의 내 삶에는 흥이 좀 더 필요합니다. 도연명의 시나 <한정록>이 필요한 때입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지식을 배운다는 목적으로 <한정록>을 읽었지만, 지호락 비교론 덕분에 이제는 내 삶에 흥과 즐김의 영역을 넓혀가기 위해 읽습니다.

 

어느 여름날,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서 내게 잘 맞는 일에 매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그 즐거움이 세상을 다 얻은 것에 못지않은 기쁨임을 생생히 체험하고 싶습니다. 저 옛날 죽림칠현의 혜강 선생처럼 말입니다.

 

혜강은 성품이 대장장이 일에 잘 맞았다. 집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매우 무성했는데, 그 주위에다 물을 끌어 둘러놓고 여름철에는 그 아래에서 대장일을 하였다.

 

(소설가 김원우 선생은 허균의 <한정록>에서 가려뽑아 <숨어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한정록>과 목차와 번역이 같고 분량만 약 1/2로 줄였습니다. 두 권 모두 같은 출판사 책이라 가능한 일입니다. 분량만 다른, 같은 저자의 같은 책이라 보면 됩니다. 김원우 선생의 역주나 설명도 거의 없으니까요. 다만 <숨어사는 즐거움>에는 여백이 많아 책의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두 권 중에 무엇을 추천할까 고민하다가 분량이 적고 편집이 나은 <숨어사는 즐거움>을 표제로 내세웠습니다. 허균의 <한정록>은 두 권짜리 책이거든요.)

 

- 예를 품은 흥을 즐기는, 조르바 (2013. 3. 14)

Posted by 보보

퇴계 선생의 시 한 수를 읊어 드립니다. 선생은 1548년 48세 때 충북 단양의 군수로 부임했는데, 백성들을 섬기면서도 자주 시를 지었습니다. 지금의 단양군 장회리 아랫마을에 있는 여울을 바라보며 지은 시랍니다.


<장회여울>

힘을 써야 겨우 조금 앞으로 가고
손 놓으면 대번에 떠내려가지.
자네 만약 뜻이 있거든 잘 봐 두게
여울물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편역자의 해설처럼 “마음을 닦는 데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로 읽히기도 하고, 공부를 시작했으면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괴로운 과정도 끝내 이겨내야 한다는 엄중한 조언으로 들리기도 하네요. 저의 해석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겁니다. 제자 이함형에게 보낸 편지에 아래와 같은 글도 있으니까요.


“이제 겨우 공부를 시작했으면서 대번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서 기쁘고 즐거운 맛과 안정된 효과가 있기를 바라고 있더군요. 그리고 공부를 하는 데 공력이 많이 들어가고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괴롭게 여겨, 자신의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다며 그리로 책임을 돌리고 있더군요.” (p.114)


<도산에 사는 즐거움>은 학자요, 교육자요, 시인이었던 퇴계의 다양한 면모를 모두 엿볼 수 있도록 선생의 시와 산문 그리고 편지글을 엮은 책입니다. 시는 ‘자연을 벗 삼아, 매화와 함께 한 나날, 나의 일상 나의 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상을 보니’ 라는 4가지 테마에 따라 엮었더군요.


시인의 마음을 노래한 ‘서정시’가 대부분이고, 철학적 이치를 읊은 ‘철리시’도 더러 있습니다. 퇴계의 매화 사랑은 유별납니다. 매화를 읊은 시만 따로 엮어 <매화시첩>을 만들었고, 숨을 거두기 전에는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명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책에는 매화를 노래한 시 8수도 실렸습니다.


산문과 편지글은 ‘참된 나에 이르는 길,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산수 유람의 즐거움’이라는 3가지 테마로 엮었습니다. 퇴계가 남긴 글을 수습해서 간행한 문집에는 편지글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네요. 그래서인지 산문보다는 편지글이 많습니다.

 

퇴계가 활동했던 당시에는 사상적 진통이 극심했습니다. 성리학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이 첨예했는데, 퇴계가 기대승, 노수신 등의 학자들과 서신으로 벌였던 논쟁은 유명합니다. (기대승이 주고받은 서신은 2003년에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고요.) 성리학은 토론과 논쟁을 거치며 체계화되고 심화되었습니다. 퇴계 선생이 성리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도산을 읽는 즐거움>은 퇴계 선생의 철학적 논변을 담지는 않았습니다. 일전에 <함양과 체찰>이라는 퇴계 입문서로 LG의 계열사에서 독서토론회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이(理)와 기(氣)에 대한 이론 부분이 어렵다는 반응이었습니다. <함양과 체찰>에서 이론 대목을 걷어낸 셈이니, 성리학 공부가 불필요한 일반인들이 퇴계 선생을 접하기에는 <도산을 읽는 즐거움>이 맞춤하다는 판단입니다. 퇴계를 몰라도 책읽기에는 어려움이 없으니까요.


요컨대, 책은 학문의 발전을 도운 대학자의 면모보다는 일상을 살아가는 수행자, 독서를 즐기는 학습자, 유람을 즐기는 도량가로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서두에 인용한 시와 편지글처럼 마음 수양과 인생살이를 돕는 지혜를 담은 글을 엮었습니다. 몇 구절을 인용하렵니다. 5백여 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도 유용하게 읽히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네요.


“일상적인 가정생활이야말로 학문의 큰 근본을 세워 집중하여 공을 들여야 할 곳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준마가 달리는 것과 같으니, 서른이 되어도 뜻이 확고해지지 않으면 끝이다.”


“대저 그대는 선을 추구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게 문제이며, 학문을 즐기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조급한 게 문제이며, 예를 중시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편향된 게 문제입니다. 그대는 너무 지나치게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을 진정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대는 너무 조급한 마음으로 학문을 즐기기 때문에, 아직 배우지 않은 것도 지레 이미 배운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대는 너무 편향되게 예를 좋아하기 때문에, 기어이 세속을 바로 잡으려 드는 것을 예에 맞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도산에 사는 즐거움>은 돌베개의 ‘우리고전 100선’ 중 여덟 번째 책입니다. 우리고전 100선은 “한국인이 부담감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품격과 아름다움과 깊이를 갖춘 우리 고전”을 선별한 시리즈랍니다. 편역자의 간결한 해설은 시리즈의 품격을 높여 주고, 손에 잡히는 얇은 분량은 독자의 부담감을 덜어주네요.


박희병 선생의 간행사 중 “고전의 현대화는 결국 빼어난 선집을 엮는 일이 관건이자 종착점”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질 좋은 번역 작업까지 더해져야 할 테고요. 정약용 시 선집, 홍대용 선집, 허균 선집, 삼국사기 등이 우리고전 100선의 다른 책들입니다. 일만 원으로 쉽게 풀이한 우리 고전을 손에 쥘 수 있다니! 출판사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Posted by 보보